업에 대한 소개

일상 용어로 설명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할라파에 다시 올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나눌 이야기의 주제는 까르마, 즉 업입니다. 불교 공부를 할 때는 주제가 무엇이든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불교의 전체 불교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는 경험과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때로는 행복을 느끼다 때로는 불행을 느낍니다. 이것이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불행을 느끼기도 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상황을 잘 살펴보면 다양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행이라는 것은 분명 고통입니다. 누구도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쁜 소식이 들리고, 안 좋은 말을 듣고…… 다양한 감정으로 인해 여러 가지 고민을 할 때, 우리는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실제로 보고 듣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과 전혀 무관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떨까요? 우리는 때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함께 보낸 시간을 추억할 때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행복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행복감은 결코 지속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결코 만족하지도 못합니다. 정작 우리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도 행복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충분히 즐겼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할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행복감 뒤에 또 다른 갈망이 뒤따라올 것이고, 그 다음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 행복할 수도 있지만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런 통찰이나 분석이 불교에서는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세계의 많은 사상가들이 행불행에 대해 분석하고 또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이해하고 가르친 것은 그보다 더 깊은 유형의 문제이자 고통이었습니다. 붓다는 행불행으로 가득 찬 중생의 삶을 더 깊이 관찰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그저 한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하는 행복과 불행은 끊임없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되풀이하게 합니다.  

붓다는 이 불만족스러운,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았고, 그 원인은 실상에 대한 무지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타인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반복되는 행불행은 근본적으로 법을 준수하고 준수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과 처벌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학자 가운데 많은 이들은 복종 여부에서 행복과 불행이라는 감정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붓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불행의 실제 원인은 ‘무지’라고 했습니다. 순종 여부와는 무관합니다. 삶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무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핵심 요소도, 필수 요소도 아닙니다. 우리 삶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충분히 제거 가능하고, 완전히 제거하면 반복되지 않습니다. 붓다는 무지를 제거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타인에게 무지를 제거해 달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잘못된 인식은 바르게 고치고, 항상 바른 생각을 한다면 반복되는 행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업은 행위로 인해 일어나는 인과 작용이다

행복과 불행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업을 짓기 때문입니다. 되풀이되는 행불행이 바로 업의 전부입니다. 무지함이 어떻게 행불행과 편안함과 불쾌함을 만들까? 부연하자면 업은 원인과 결과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인과는 매우 복잡한 주제입니다. 붓다의 말씀대로 항아리는 첫 번째 물방울과 마지막 물방울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물방울이 한데 모여 항아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좀 전에 한 일이거나 한 생 전에 한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서 생긴 결과입니다. 

실제로 업의 인과 작용은 과학적 관점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인과 작용이란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여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방에서 이 강의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이 지금 그리고 매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일에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업은 자신의 마음과 깊이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날씨와 같은 물리적인 다른 원인도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다양한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도 역시 우리들처럼 무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업은 신념도 아니고, 운명도 아닙니다. 업은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자 우리의 태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업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매 순간, 그리고 관계된 모든 행위의 인과적 패턴을 지칭합니다. 즉 우리의 행동과 태도에서 비롯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입니다. ‘업’은 일반적으로 행위의 원인과 결과의 전부 를 지칭하기도 하고, 전체 과정 중 한 측면을 구체적으로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좀 더 정확하게, 보다 자세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업에 대한 다양한 체계

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업에 대한 자세한 해석들을 찾다 보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서양인들은 이 부분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나 상황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 입각해 여러 측면에서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관점, 심리적인 관점, 경제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설명합니다. –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설명은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특정 관점인, 즉 심리학, 정치적, 경제적 관점 등을 기반으로 대상을 인식합니다. 불교도 이와 비슷합니다. 불교의 다양한 사상 체계에 따라 업의 작용을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프로이드와 칼융의 주장이 다르듯이 서양 심리학 같은 하나의 학문 내에서도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방식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불교의 다양한 사상체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업의 작용에 대한 다양한 이해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업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다양한 불교 사상을 자세하게 다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여러 사상이 있음을 알아 두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다양한 불교의 사상 체계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경험을 서양 사상에 적용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업과 반드시 모순된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업은 충동적인 마음 작용이다

업, 그 자체를 하나의 항목 – 일종의 사상 체계에 따르면 정신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정신적 요소’란 어떤 의미일까요? 정신적 요소는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아는 누군가를 멀리서 보고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와 관계된 여러 많은 감정들이 일어납니다. 이 감정들은 그 사람을 인식하는 나의 다양한 측면들입니다. 일부는 아주 근본적인 인지력으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 이 사람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인지함과 동시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집중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정신적 요인으로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다가가는 순간, 함께 작용합니다. 

어떤 정신적 요소가 업인가요? 업은 우리를 그 사람에게 끌어당기는 정신적 요인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다가갈 때 일어나는 내면의 충동입니다. 그래서 일부 이론에서 업을 물리적인 힘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의도’와 같은 다른 정신적 요소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과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요? 이 사람을 껴안을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업은 단순히 그를 보고 다가가 안거나 때리고 싶은 행동을 일으키는 정신적 충동입니다. 물론 다른 요소들도 관련이 있지만 업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다가가 안거나 때리는 행동을 하게끔 하는 정신적 충동입니다. 또한 정신적 충동은 포옹이나 주먹질 같은 신체적 행동만 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생각하는, 정신적 욕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말하거나 육체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정신적 충동을 수반합니다. 

업의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 

과학과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원인과 결과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업, 즉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과가 생깁니다. 그러나 업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지은 업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인에게 행한 행동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한 행동이 미치는 영향은 물리적인 요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을 때리면 그 사람의 피부에 멍이 듭니다. 단지 물리적인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있을 뿐 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경험을 하는가는 온전히 상대방 스스로에게 달려 있지 않나요? 가령 내가 어떤 사람에게 아주 잔인한 말을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그 사람이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또는 화를 심하게 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상대가 나를 무시하고,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잘못 들을 수도 있습니다. 가끔 우리 마음은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내뱉은 말이라고 해도 반드시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실, 불교에서는 그 누구도 해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여기에 해당되는 업과는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업의 결과를 말할 때, 업의 충동과 함께 자연스럽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행동한 결과가 업의 결과이며, 우리가 각각 경험하게 될 업이기도 합니다. 

개개인에게 내재된 업의 효과가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는, 업은 서양 과학이 말하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해서 특정 성향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잠재력과 만들어진 습관은 차이가 있지만 행동을 반복하는 것과 반복된 행동의 잠재력으로 인해 우리는 그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경향과 잠재력은 무엇을 발생시킬까요? 예를 들어, 경향은 상대방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불쾌한 말을 하고 싶은 느낌을 일으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스스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업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업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동에 수반되는 충동이자 강박입니다. 

이런 경향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콘텐츠’는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좀더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을 만나지만 그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는 방식도 포함됩니다. 좀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 말투도 세세하게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업때문에 상대가 우리에게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소리를 지르는 경향이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업장은 타인이 나에게 소리를 지를 때 경험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물론 이해하기 쉬운 예는 아니지만 이해를 돕기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갓난 아기가 있습니다. 이 아기는 기저귀가 젖으면 어머니가 갈아주기 전까지 젖은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기저귀를 갈아줄 것인가는 둘째 치고, 아기는 그 상태를 참고 견뎌야 합니다. 기저귀를 더럽힌 건 아기 본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삶을 스스로 엉망진창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더더욱 엉망이 돼 갑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타인에게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듯이 타인도 우리에게 비슷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러나 업은 지음과 동시에 바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상대방에게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해도 그는 여전히 우리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윤회에 대해 전체적으로 논의를 해야 하는데, 어떠한 업이든지 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며 현세에서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현세에서 결과가 보여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서양인인 우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교가 이와 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현세에서 선하게 산다면 내세에 천국을 경험할 것이며 반대로 악하게 산다면 내세에 지옥의 과보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아주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불교는 과연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매우 복잡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업의 원인과 결과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윤회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불교도 관점에서 보는 윤회의 개념이 아닌 불교도 관점에서 보는 윤회의 개념을 말이지요. 업의 원인을 짓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결과를 경험하는 주체는 누구입니까? 포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게 될 ‘나’는 존재합니까?

윤회와 윤회를 경험하는 주체는 일단 접어 두고,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는 법칙에 따라 상벌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현생은 일종의 시험(테스트)이고 다음 생은 이번 시험의 성적표라고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업의 효력이 발생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 변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특정 활동이 인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 세대에게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합니다. 

행복과 불행

업이 성숙되는 완전히 다른 측면 – 다시 말해 이러한 업들의 결과가 발생하는 또 다른 측면은 – 은 이 강의 초반에 설명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행복과 불행의 측면입니다. 마치 절벽 꼭대기에서 우리를 향해 굴러오는 바위처럼,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서 반복되는 특정 행동으로 우리는 특정 일들을 경험하게 되고 행복과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이 점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밟았을 때 ‘이 끔찍한 바퀴벌레를 내가 잡았다.’ 하며 매우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바퀴벌레를 밟는 것을 매우 끔찍하고 힘겨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때리거나 소리 칠 때 슬퍼하거나 불편해하지만 반대로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죄인이고, 악한 사람이며, 선량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맞아도 싸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 속담은 멕시코에서 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누군가 이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믿습니다. “제 남편이 저를 때리는 것은 저를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만일 저를 때리지 않는다면 제게 관심이 없다는 걸 거예요.”

사람마다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관점이 많이 다른 것 같지 않나요? 1차원적으로는  우리가 강박적으로, 반복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것이 1차원적 측면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행복이든 불행이든 실질적으로 느끼고 겪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두 가지 측면 모두 과거 우리가 행한 업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 업이 같진 않습니다. 다릅니다. 행복과 불행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측면입니다. 우리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면 그 결과로 우리는 불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을 하면 그 결과로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긍정적인 행동과 부정적인 행동

이제, 불교에서 바라보는 긍정(선한)과 부정(악한)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당연히 긍정과 부정에 대한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우리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다양하므로 행동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향이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관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은 우리 행동을 야기하는 마음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애착,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 그것은 부정적인 행동입니다. 반면에 우리 행동에 강한 애착이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으면 긍정적인 행동입니다. 물론 더 나아가 자애와 자비, 관용 등을 바탕으로 한다면 아주 긍정적인 행동이 될 것입니다. 

물론, 또 다른 요인도 있습니다. 행동을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하도록 만드는 다른 요인들을 살피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행동을 좌우하는) 한 가지 요소는 윤리적 자기 존엄성 또는 도덕적 자기 존엄성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존감과 또는 자긍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신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행동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신경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될 대로 되라’는 행동입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은 부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한 인간으로서 존중한다면 바보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한다면 어리석고 악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높은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윤리적 자존감의 여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긍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지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 다른 요인은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끔찍한 행동을 했다고 합시다. 내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내가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이 곳 멕시코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불자인 우리가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 싸운다면 불교와 불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출신 지역, 국가, 종교가 무엇이든, 우리가 하는 행동이 가족은 물론 속한 지역 사회, 국가, 종교 등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행동을 삼가는 것입니다. 주변을 의식하는 이런 마음가짐과 배려와 없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매우 심오한 통찰에 해당합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자긍심, 자기 존엄성(자존감)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존중입니다. 

이 점은 테러리즘을 대처할 때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테러리스트들이 개개인과 공동체의 존엄성을 갈취하고 스스로의 삶을 훼손하고 파괴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배려와 우려가 없다면 밖에 나가서 파괴를 일삼는 짓을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은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방식, 특히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기억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자존감이나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행동 방식이 상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배려심을 갖는 것인데 저는 ‘배려하는 태도’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상대방에게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배려하는 태도”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애욕, 화, 그리고 자존감 상실에서 비롯되는 행동, 배려심 없는 행동, 이런 처신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가볍게 여길 때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요? 불행일까요? 이 불행은 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욕심, 분노, 무례 같은 이런 부정적인 요소가 있는 마음 상태가 평온한 마음 상태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부정적인 요소가 우리 내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할까요? 아니면 불행을 야기할까요? 우리가 이 부분을 보다 깊이 생각한다면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결국 우리에게 불행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가 없는, 정반대되는 마음 상태를 지닌다면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편적인 범주에서 긍정적인 행동과 부정적인 행동의 결과인 행복과 불행을 경험할 것입니다. 

첨언하면, 우리가 하는 특정 행동들 – 고함을 지르거나 친절을 베푸는 행동 등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으며,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또 다른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행동(업)의 또 다른 결과는 환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유형의 환생을 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로 환생할 수도 있고, 바퀴벌레로 환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간으로 환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몸과 마음을 가지고 환생을 하든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경험할 것이고, 특정 방식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다른 세부적 사항이 많지만 입문 강의에서는 일반적인 원칙만 다루겠습니다. 

결정론 또는 자유 의지

우리는 특정 행동 패턴을 반복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경험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행동과 일치하거나 때로는 일치하지 않는 행복과 불행을 경험합니다. 모든 일이 매 순간 상승했다가 하락하기도 하고, 좋았다가 나빠지기도 합니다. 이 순간 이후에 무슨 일이 생겨날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과 자신의 업에 의해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의 업과 행위, 그리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날씨, 지진 등등의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처님께서도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일 가운데 ‘업’이 가장 복잡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업’은 이미 결정된 것인지 아니면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인지를 묻는데, 우리는 이 점에 관해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둘 다 정답이 아닙니다. 결정론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를 그 누군가가 이미 정해 놓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정합니다. 누군가의 설정에 의한 것, 정해진 바는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설계해 놓았고 우리는 그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닙니다. 

반대로 자유 의지는 식당에서 메뉴판을 앞에 두고 무엇을 주문할지 결정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우리 인생을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삶은 이렇게 결정되는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분리된 ‘나’가 이 삶 밖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메뉴를 고르듯이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들을 선택하고 있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 또 우리에게 일어날 일들이 누군가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 속 작은 항목처럼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앉아서 버튼을 누르면 선택한 음료가 나오는 자판기와 같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알려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의 경험들을 자판기 안에 있는 사탕을 고르듯이 누군가가 선택해서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원하는 것이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겠다. 모든 사람이 나를 친절하게 대할 것이다.’ 이렇게 미리 정해 놓고 예정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자신이 선택한 것을 꺼냅니다. 그것이 자유 의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일어날 일, 우리가 할 일을 결정하는 것,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자유 의지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정지어진 것만은 아니며 완전히 자유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만도 아닙니다. 훨씬 더 미묘하고 정교합니다. 

업의 근원인 우치(어리석음)

앞에서, 불교적 관점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경험하는 행불행의 원인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들, 우리 통제를 벗어난 일들의 원인도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매순간이 하나의 신드롬처럼 나타나는데, 그 원인은 무지(우치)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은 부정적인 행동이든 긍정적인 행동이든 무지를 기반으로 한 ‘지속적인 습관’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매 순간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무지(어리석음, 우치)란 무엇일까요? 무지는 불교에서 매우 심오한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무지’를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 ‘나는 항상 옳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등등. 우리가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자기 중심적인 인식을 하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전화를 걸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건 무관하게 전화를 합니다. 방해를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현재 하고 있는 그 어떤 일보다 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의 ‘무지’로 인해 누군가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잔인하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도록 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타인이 원하는 것보다 확실히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줘야 합니다. 

한편,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 누군가에게 필요 이상 친절하게 굴기도 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자신과 함께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기 바랍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꼭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양육법이나 가정을 꾸려 가는 방법을 조언합니다. 과연 도움이 되는 행동일까요? 자식이 부모의 조언과 도움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고려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부모들을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들은 자식을 키우면서 충고를 들으라고 강요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알아. 그러니 내 말을 들어!’  

우리 내면에는 무지가 있고, 그 이면에는 부정적인 행동과 긍정적인 행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무지 때문에 우리는 쳇바퀴처럼 계속 도는 것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이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업의 경향과 습관, 특히 업의 경향이 어떤 결과를 맺는지 그 메커니즘을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행불행에 대한 일관되지 않은 우리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경험할 때 수반되는 두 가지 정신적 요인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망’입니다. 행복을 경험할 때, 이 행복과 멀어지지 않으려고 - 매우 강한 욕망 – 갈망합니다. ‘가면 안 돼! 내 곁에 있어 줘! 오래오래 나랑 함께 있으면 안 될까!’ 이런 유형의 감정은 누군가와 함께하면서 행복을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초콜릿 케이크를 먹을 때도 느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느끼는 행복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 행복감을 놓치고 싶지 않아 우리는 점점 더 많이 먹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갈망입니다. 반대로 불행을 겪을 때면 최대한 빨리 벗어나기를 갈망합니다. 이 두 경험의 기저에는 두 번째 정신적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나’라는 강한 주체성입니다. 견고한 ‘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갈망이라는 감정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행복을 쟁취해야 하고,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어야 하며 이 행복에서 멀어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싫어하는 것과는 멀어져야 하고, 남들이 하는 말이 듣기 싫으면 닥치고 있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함을 지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갈망과 더불어 무엇이 되었든 ‘나’라는 강한 주체성 때문에 일관성 없는 행불행을 경험하는데 이것들이 전부 업을 무르익게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반복되는 행복과 불행을 되풀이하고 과거의 모든 행동을 반복합니다 – 나라는 강한 집착은 모든 업을 무르익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매순간 느끼는 행복과 불행에 이 어리석음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리석음은 더 많은 행복과 불행의 순간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또 다른 어리석음을 야기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어리석음은 과거 우리가 행복과 불행을 겪을 때 함께했던 그 어리석음의 결과입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쳇바퀴 (반복되는 순환) – 영원히 도는 바퀴를 불교에서는 ‘삼사라(윤회)’라고 합니다. 만일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업의 전체 체계가 무너지고 우리는 윤회에서 해방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함’을 ‘바르게 아는 것’으로 대체한다면 – 전반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 견고한 ‘나’의 근간은 본래 없으며, ‘이건 있어야 하고 저건 없어야 한다’ 하는 생각의 근간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갈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갈망으로 인한 성향과 습관도 활성화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과 습관을 자극하는 요소가 없어지면 더 이상 그런 성향과 습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에게 공룡을 보는 경향성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공룡이 멸종한 시점부터는 정글에서는 더 이상 공룡을 볼 수 있는 경우는 없겠죠? 제가 정글을 걸을 때면 항상 공룡을 보았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공룡들이 다 멸종해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그 경향이 무르익는, 습관이 되는 요소가 사라지면 그 경향도 더 이상 갖지 않습니다. 업의 경향이 더 이상 무르익지 않으면, 경향이 작용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일관성 없는 행불행을 경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불어 어리석음도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 어리석음(우치, 무지)도 경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윤회의 모든 상황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 행복과 불만족스러운 불행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매우 다른 유형의 안정된 행복, 어리석음과 뒤섞이지 않은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게임에서 이겨서 보상을 받을 때 느끼는 그런 유형의 행복감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해방된 일종의 완전한 해방감입니다. 정확한 예시는 아니지만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꽉 끼는 신발을 저녁에 벗을 때 느끼는 소소한 행복한 느낌과도 같습니다. 발의 고통을 벗어 던진 기쁜 안도감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해방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특정 방식으로 행동하고, 특정 일을 하게 만드는 강박적인 업에 의해 행동이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단순한 해탈을 넘어 부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려면 다른 이들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자비심에서 비롯된 행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무리 

지금까지 업과 관련된 몇 가지 기본적인 이론을 소개했습니다. 업을 설명하는 방법은 훨씬 더 많습니다. 업의 일반적인 원칙에서 설명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업을 지으면 이런 결과가 생기고, 이런 조건이 있으면 더 강한 결과를 경험하게 된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조건이 없거나 목적이 없거나 우연히 한 행동의 결과는 전부 다릅니다. 업의 작용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습니다. 

또한 현재 무르익고 있는 업에 대해 업의 일반적인 원칙을 적용하기도 아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업의 성숙되는 데에는 많은 요소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영향을 받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일반적인 업의 원칙을 적용해 일반화하기는 어렵습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도 이 일이 일어나게 만든 다른 많은 요소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면 그 원인을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해당 시점에 그곳을 지나가게 된 개개인의 업, 교통 상황, 날씨, 도로 상태 등등이 원인이 됩니다. 현재의 업이 무르익어 사고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아주 다양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업의 다양한 측면을 조사해 볼 수 있습니다. 업에 대해 알면 알수록 자신을 통제하고 있는 업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위치에서 타인을 도울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질문

(문) 앞에서 설명한 업과 죄책감은 이 맥락과는 관계가 없습니까? 업과 죄책감은 무관합니까?

(답) 맞습니다. 불교에서 설명하는 업과 죄책감 간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죄책감은 매우 강한 존재성을 지닌 ‘나’와 또 다른 별개의 존재성에 기반에 두고 있습니다. 마치 탁구공과 같습니다. 죄책감은 ‘나’는 너무 나빴고 ‘내가 한 행동’이 매우 나쁘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강한 존재성을 심판을 한 뒤에도 계속 놓지 못하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죄책감은 마치 집안에 쓰레기를 쌓아 두고 절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집안에 쓰레기를 방치해 두고 있으면 얼마나 더럽고, 악취가 나겠습니까? 쓰레기가 더럽고 악취가 지독하다고 하면서 절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문) 업에 대한 설명은 매우 분명하고 논리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무지(어리석음)와 충동,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업의 체계를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한 것만으로 지금 당장 우리의 경험이나 강박적인 충동을 떨쳐버리는 것은 힘듭니다.  

(답) 그렇기 때문에 먼저 도덕적인 자제가 필요합니다. 앞에서 했던 설명을 떠올려보겠습니다. “너 오늘 옷차림이 너무 이상해.”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순간과 실제 말을 하는 순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 옷차림이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기 전에 내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판단능력을 얻게 됩니다.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상대방의 옷차림에 관해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규율과 자제에서 시작되는 실천법입니다. 

또 자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을 때 어떤 감정이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애착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기반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어리석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방의 옷차림이 추하다고 지적이 상대방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지, 아니면 친절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더 긍정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태도의 정의가 아주 도움이 되는 이유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마음 상태의 일부이며,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면 마음의 평안함을 상실합니다. 우리는 자제하는 마음을 잊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잃으면 우리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교만심에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보다 깊이, 세밀하게 내면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는 이해 못 했어.”라고 말할 때 “아, 그래, 나는 이해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작은 불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감정에는 약간의 자부심과 오만함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공성에 대한 이해를 얻어 실상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심지어 이해했다고 해도 공성에 익숙하도록 매순간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자제력과 부정적인 행동을 삼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문) 제가 조금 놓친 것 같은데, 행복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두 가지 감정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갈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라고 하셨나요? 제가 말하는 것은 업의 성향을 활성화시키는 두 가지 요소입니다. 

(답) 제가 설명하는 것은 업의 성향을 활성화시키는 두 가지 요소입니다. 이것은 12연기법에서 일부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는 갈망이고 다른 하나는 애착으로 인해 갖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얻고자 하는 태도 또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착은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애착은 ‘얻고자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결과’이면서 우리의 경험과 상황보다도 더 확고하게 자리한 ‘나’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문)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한 ‘나’는 무언가와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까? 우리 내면에 무지(어리석음)가 있고, 무지의 뿌리를 제거해야 하는 점도 분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에 무지한 것이며 무엇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답)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는 ‘나’와 거짓된, 실체라고 착각하는 ‘나’를 혼동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을 보면 실제 ‘나’ 있다고 여기는데 실제적인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 관념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추가를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너’가 불행한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가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감정을 경험할 때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라고 합니다. ‘너’ 또는 ‘남들’의 행복과는 별개입니다. 그저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나’는 세속적 ‘나’, 거짓된 ‘나’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속적 ‘나’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영화 속에는 행복한 장면들도 있고, 불행한 장면들도 있습니다. 글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행복한 장면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이고, 불행한 장면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일 뿐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우리가 영화 각 장면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세속적 관념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제목일 뿐입니다. 그저 이름일 뿐입니다. 우리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단지 제목을 거론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인 실제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적 관념에서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따라서 존재합니다. 전체 영화는 각 장면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장면과 분리된 영화 그 자체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속적 관념에 의해 존재한 영화는, 사실, 그저 장면들을 엮은 것에 라벨과 인풋을 추가한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는 행복한 순간이 있고, 불행한 순간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 통념에 의해 ‘나’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행복한 순간에 ‘나’를 찾고 부르지 ‘너’를 찾고 부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지 <스타워즈>가 아닙니다. 행복한 순간 또는 불행한 순간과 분리되어 매순간을 경험하는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나’이며 그런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단어일 뿐입니다. 따라서 ‘나’는 인생의 모든 순간,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에 기반하여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무지는 우리 육체와 분리된 ‘나’가 존재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나’는 육체와 연결되어 있고, ‘나’는 버튼을 눌러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데 지금 발에 가해지는 고통 때문에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으며 이 고통 때문에 몹시 기분이 불쾌하고 이 상황이 싫다고 착각을 합니다. 육체와 분리된 ‘나’는 마치 몸속에 외계인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무지로 인해 육체와 분리된 거짓된 ‘나’는, 세속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나’는 “이 불행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갈망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고정된 ‘나’라는 착각이 없다고 해서 그저 앉아서 그 고통을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발이 불에 닿으면 바로 발을 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패닉 상태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세속적인 통념에 의해 형성된 ‘나’에 대한 개념은 매우 복잡다단합니다.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마무리를 하고 회향 기도를 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이 무엇을 이해하고, 어떤 긍정적인 힘이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저의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긍정의 힘은 더욱 커져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근본(원인)이 되기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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