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에 대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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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란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두려워하는 어떤 것에 대한 강한 혐오감입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의 하나로, 분노는 우리의 마음의 평온함과 자제력을 빼앗습니다. 하지만, 인내심을 기르는 다양한 수행을 통해 우리는 분노를 피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삶에 특정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겪고 싶지 않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울해집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좌절감을 느끼고 사회적 지위, 생활 조건 또는 가족 상황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일에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이가 들어 아프거나 매우 쇠약해지고 청력이나 시력을 잃는 것과 같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물론, 아무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때때로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우리의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다치기도 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로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많은 정서적, 심리적 문제와도 대치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논의하거나 공개하고 싶지 않은 일들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자녀에 대한 기대, 걱정, 근심 등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이것들은 “상황이나 문제가 제어 불능으로 반복되는 것”, 산스크리트어로 “삼사라(윤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문제가 제어 불능으로 반복되는 윤회

저는 번역가 교육을 받았고, 번역가로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그곳에서 불교에 대해 번역하고 강의를 해왔습니다. 저는 불교에 대한 많은 오해들을 발견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원어와 원의를 번역하기 위해 선택한 영어 단어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빅토리아 시대 선교사들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아시아 언어의 원어가 갖는 용어의 의미와는 무관한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보통 “고(苦)” 로 번역됩니다. 만약 우리가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불교는 매우 염세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설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우리가 편안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부유한 사람에게 “당신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그들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게는 비디오 레코더도 있고, 고급 차도 있고, 게다가 멋진 가족도 있습니다. 전 제 삶에 만족해요.”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통”이라는 무거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동일한 불교의 개념을 “문제”로서 번역하고,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얼마나 부유하든, 자식이 몇 명이나 되든 간에 모두가 인생에서 어떤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모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용어로 티베트의 전통에서 유래한 이러한 불교의 설명을 논하고자 합니다. 

문제가 제어 불능으로 반복되는 것은 윤회입니다. 느슨한 의미에서 “윤회” 는 우리가 항상 초조하거나 걱정이나 불안을 안고 있는 것처럼 통제할 수 없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석존께서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제(진정한 괴로움)”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그것들은 진정한 원인이 있기에 마찬가지로 막아낼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을 막고 “멸제(진정한 소멸)를 이루는 방법은 “도제(진정한 길)”를 따르는 것입니다. 즉, 도제는 원인을 제거하는 이해의 길을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원인을 제거하면 우리는 문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문제의 본질: 실체적 정체성에 집착하는 것 

인생에서 직면한 이런 어려움들이 통제 불능인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궁극의 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세상에서 진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무지”보다는 오히려 “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무지”는 마치 당신이 어리석기 때문에 이해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보다는 우리는 단순히 인지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정신적인 수준의 불안으로 경험합니다.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어떤 종류의 실체적인 정체성, 어떠한 유형의 “나”에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에 대한 진실이나 환상에 불과한 것을 믿고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이다, 나는 가정에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내 아이들은 나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 만일 인생에 있어서의 신조가 모두 아버지인 것에 근거하고 있으면, 분명히 이것이 우리를 어떤 곤경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만약 아이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아버지”나 그런 형태의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인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를 매우 화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집안의 수장인데 직장에 가면 직장 사람들에게 업신여김과 멸시를 받고, 내가 반대로 그들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 상황이면 어떨까요? 아버지이거나 존경을 받아야한다는 정체성에 지나치게 매달린다면 직장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을 때 굉장히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업가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이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고, 내가 가야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의 사업이 실패한다거나, 실적이 나빠지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기운이 빠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업이 실패하면 자살을 하거나 온갖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붙잡고 있던 이 견고한 정체성 없이 삶을 이어가는 것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우리는 남성적인 매력에 기초해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남자답고, 당당하고, 매력적인 남자다.” 하지만, 나이가 들기 시작하고 남자다움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우리를 미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라면, 완전히 풀이 죽어 버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삶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정체성은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전통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젊은이들이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전통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매우 화를 내고, 매우 속상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자라난 전통적인 중국 관습을 따르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젊은 현대인이라는 것에 자신의 정체성의 기초를 둘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세대의 현대인이고 이런 전통적인 가치들은 필요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이 생각에 집착하고 있고 부모님들이 우리가 전통적인 가치를 따르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대우하기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젊은 현대인으로서 매우 짜증이 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자신의 내면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현대인이기 때문에 중국 설날에 부모님을 방문하거나 이 모든 전통적인 의식을 행할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많은 문제를 겪을 것입니다. 

단지 하나의 직업의 맥락에서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융통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했던 일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세상이 끝났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다른 직에 취업하는 것이 가능하고, 반드시 한 종류의 직에 종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정체성에 매달립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종류의 규칙을 따르고, 어떤 유형의 삶을 원하는지에 대한 특정한 개념을 고수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영구적이고, 확실하며, 진정한 자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러한 개념에 따름으로써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타나는 모든 번뇌를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정체성에 대해 계속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고 그것을 증명하고 주장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나는 이 집안의 아버지다.”라고 생각한다면, 감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권위를 주장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가족에 대한 우리의 힘을 지켜야 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굽실거려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을 단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만약 이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매우 방어적이 되거나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매우 불쾌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보여줘야 한다. 나는 정말 남자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다른 아내를 찾으려 하거나,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존재하는지 증명하기 위해 어린 여성과 바람을 피우기도 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과 태도

매력과 탐욕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은 우리가 실체적 정체성을 증명하거나 유지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이러한 감정은 매력, 탐욕과 같은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갈망하는 탐욕은 그 정체성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 주변에 있는 무엇인가를 얻어야 할 때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내 정체성이 아버지나 가족의 가장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존경을 받아야 한다. 새해에는 아이들이 나를 방문해야 하고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을 다 지켜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충분한 존경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이 나를 매우 안전하게 느끼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존경을 받지 못하면 상처를 받고 매우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행운과 성공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항상 마작에서 이겨야 한다.” 만약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라면, 내가 항상 마작이나 다른 도박에서 이기면 안정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점쟁이를 찾아 가거나 중국 불교 사원에서 점대를 던져 나는 성공했다, 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바람직한 답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내가 성공할 것이라고 느끼기에는 자기 자신의 직능이 너무 불안정한 것입니다. 나는 항상 더 많은 신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징조를 받아야 안심을 느끼기 때문에 강박적으로 이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내 사업의 권위자이다. 나는 권력에 매료되고 권력은 나를 안전하게 해 줄 것이다.”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여러 가지 다른 심리학적인 틀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내가 강력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에 근거할 수도 있고, 내가 실제로 강력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나를 도와줄 그런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에 근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회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복종하고, 그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한다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권위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인을 두고 있다면, 항상 그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그저 그들이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목받는 것에 열중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젊다면, 우리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정체성은 현대적이고, 젊은 유행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최신 패션, 영상, 음악, 그리고 모든 패션 잡지에서의 소식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내 정체성을 보호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여러가지 많은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얻음으로써 충분한 재산, 소유물, 권력, 관심, 사랑을 구축할 수 있다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충분하고 완전히 만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고, 그렇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분노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혐오와 분노

우리가 외관상 확고한 정체성을 보호하는 또 다른 방법은 혐오, 적대감, 분노입니다: “만약 내가 싫어하고 내 정체성을 위협하는 특정한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안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 정치적 견해나 인종 또는 문화에 근거하고 있다면, “다른 견해, 다른 피부색,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배제하면 안전해질 것입니다.”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내 하인이 내가 원하는 것과 약간 다르게 일을 하고 있거나, 직원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과 조금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내가 그들을 바로 교정할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제대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안심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책상 위의 서류가 정돈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것을 다르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는 이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만약 그들이 내 방식대로 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안심할 것이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아니면, 우리가 항상 옳은 사람이 되는 것에 정체성의 기반을 두고 있다면, 누군가 우리를 탐탁해 하지 않거나 비난하면 굉장히 방어적이고, 적대적이며, 화가 나게 됩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이 사람의 비판을 감사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 혹은 그들의 비판이 부당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검토하는 기회로 삼아 우리가 태만하거나 잘못이 없는지를 확인하지 않고 – 오히려 상대방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그 사람을 무시하고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수동적이고 적대적인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나”를 거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옳기 때문에 그 실체적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 사람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편협한 무지

또 다른 메커니즘은 편협한 무지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주위에 벽을 만들고 있습니다: “만약 무언가가 나를 위협하고 나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면, 나는 그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 행동할 것이다.” 우리는 가족과의 어려움,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집에 돌아오면 마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내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TV를 켜고 문제가 없다는 듯 행동합니다. 이것은 폐쇄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상담하고 싶어해도 우리는 그저 그들을 밀어냅니다. “나의 정체성은 내 가족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가족은 완벽합니다. 우리는 모든 전통적인 가치를 따릅니다. 왜 당신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균형과 조화를 무너뜨리려고 합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이러한 유형의 태도는 편협한 무지라고 불립니다. 

마음에 솟구치는 충동은 업의 발현입니다

우리가 이런 여러가지 번뇌를 품을 경우, 이어서 여러가지 충동들이 마음에 생겨납니다. 이것은 업이 관계되는 것이지만, “업”이란 운명이나 숙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사업이 실패하거나, 누군가가 차에 치일 때 우리는 “맙소사, 안타깝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업이다.”라고 말하고는 합니다. 이것은 “그것이 신의 뜻이다.”라고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업을 논하고 있는 것이지 신의 뜻이나 숙명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충동, 즉 무언가를 하도록 이끄는 마음에 생겨나는 다양한 충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결국에는 잘못된 결정이 될 사업 관련 결정을 내리려는 충동,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우리 자녀에게 요구하려는 충동, 혹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내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사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충동입니다. 우리에게 떠오를 수 있는 또 다른 충동은 무표정을 하고, TV를 켜서 다른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충동, 즉 업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문득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실행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로 반복되는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그것이 메커니즘입니다. 

우리는 직장에서의 위치나 가정의 문제에 대해 항상 불안하고 걱정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성공했으니 부모와 사회를 기쁘게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실체적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걱정거리가 존재하고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그러한 정체성을 방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폐쇄적이 되어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온갖 종류의 어려움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도 이런 일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모두가 그저 잘 보이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이런 모든 걱정과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으며, 나중에는 충동적으로 폭발하여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것은 종종 가족이나 직장에서 문제에 연루되지 않은 누군가를 향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곤란한 문제들이 제어 불능으로 반복되는 다른 메커니즘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다양한 감정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감정들이 문제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모든 감정이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까요?  

건설적인 감정

우리는 사랑, 상냥함, 애착, 관용, 인내, 배려와 같은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감정과 갈망, 분노, 오만, 거만함,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이거나 파괴적인 감정 사이의 구별을 지어야 합니다.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또는 티베트어에는 감정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것이나 부정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만, 영어에 있는 양쪽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단어는 없습니다. 

어떤 감정이나 정신 상태가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마음을 해치는 감정 또는 마음을 해치는 태도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열중하거나 집착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를 매우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는 존경을 받기를 매우 열망하여 걱정하거나, 누군가의 사랑, 관심 또는 찬동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어 우리를 가치 있고 안정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은 갈망이라고 하는 어지러운 감정과 태도의 관점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적대적일 때마다 우리는 매우 불안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편협하게 행동할 때 그것 역시 불안한 감정입니다. 이 모든 정신 상태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사랑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구별해야 합니다. 

불교 전통에서 사랑은 다른 사람이 행복과 행복의 원인을 가질 수 있도록 바라는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나 똑같이 행복하기를 원하며, 누구도 문제를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추론에 근거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처럼 남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좌우되지 않고, 그 사람이 행복하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과도 같습니다. 어머니는 설령 아이가 그녀의 옷을 더럽혔거나, 토를 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아파서 자신의 옷에 토했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같은 걱정,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존성이나 필요의 표현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절대 나를 떠나지 마세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당신은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좋은 아내, 좋은 남편이 되어 항상 밸런타인데이에 꽃다발을 보내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당신이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음, 이제 나는 당신이 싫어 졌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않았고,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없었기 때문이에요.”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번뇌이고 불교의 사랑의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꽃다발을 보내든 말든, 그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든 말든, 우리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주든, 우리에게 심하게 행동하고 심지어 우리를 거부하든 상관없이 그 사람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비슷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들이 긍정적일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분노는 항상 마음을 해치는 감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드디어 분노에 대해 논하게 됩니다. 우리가 화를 낼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분노는 항상 우리를 괴롭힙니다. 아무도 화를 내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화를 낸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 음식의 맛을 좋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화나고 속상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고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지르는 큰 소란을 피우지 않더라도, 직장이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에서 화가나 있으면, 그로 인해 소화불량이나 위궤양이 생기기도 하고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억제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어려움들을 겪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제로 상대방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매우 적대적인 표정이나 분위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산한다면, 고양이와 개 조차도 우리 곁에 있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와 분노에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슬그머니 떠날 것입니다.   

분노에는 실질적인 이점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분노가 너무 강하거나 좌절되어 어떻게든 분출해야 하고, 격분하여 누군가에게 사납게 말을 뱉거나 저주한다면 이것으로 정말 기분이 나아질까요? 다른 사람이 상처받고 화를 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까요? 또는 우리가 너무 화가 나서 주먹으로 벽을 치고 싶어서 실제로 벽을 치면 기분이 정말 좋아질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확실히 분노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교통 체증에 갇혀서 너무 화가 나서 경적을 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습니까? 그래서 약간은 차가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고, 그들은 “저 경적을 울리는 멍청이는 누구야?”라고 수근거릴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경험해야만 할까요?

만약 분노와 같은 번뇌와, 그것을 바탕으로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고함을 치거나, 혹은 적개심으로 자기 자신을 고립 하거나, 다른 사람을 거부하는 충동적인 행동이 문제의 원인이라면, 우리는 항상 그런 문제들을 가지게 될까요? 이것은 우리가 항상 경험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번뇌는 마음의 본성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항상 흐트러져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태일지라도 분노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침내 잠이 들었을 때 우리는 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노, 적개심, 분개와 같은 번뇌가 없는 특정한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런 번뇌가 영구적이지 않고, 마음의 본성의 일부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들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만약 우리가 단순히 표면적이 아닌 가장 깊은 수준에서의 분노의 원인을 막으면, 그것을 확실히 극복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모든 감정과 느낌을 버리고 마치 스타트렉의 스폭처럼 감정이 없는 로봇이나 컴퓨터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혼란, 인식의 결여에 기반한 혼란한 감정과 태도를 없애고 싶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체계가 실로 풍부합니다. 

분노 극복하기: 우리 삶의 질을 바꾸다 

우선, 우리는 분노나 모든 흐트러진 감정과 태도를 제거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특정한 동기나 근거가 필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면, 왜 그것을 해야할까요? 따라서, 동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함으로써 그러한 동기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고 어떠한 문제도 가지고 싶지 않다. 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싶다. 나는 늘 분노와 분개를 느끼기 때문에 내 삶은 별로 즐겁지 않다. 나는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늘 내 안에 존재하고, 그 때문에 항상 불행하다고 느껴 삶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다. 게다가, 이것은 소화 장애로 이어져서 몸이 좋지 않다.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즐길 수 조차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의 질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메시지 중 하나는 우리가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불행할 운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지금 이 순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싶다. 나는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적개심과 원한을 떨쳐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면,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고 나는 위궤양이 생길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고 주술을 걸어 해를 끼치려는 것과 같은 끔찍한 일을 할 수도 있다. 그 일로 상대방이 나와 가족을 저주하는 보복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비디오나 영화 대본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사태가 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미리 생각한다면, 우리는 분노를 없애고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문제를 줄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없애기를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벼운 적개심과 분노를 느끼는 것조차 불쾌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강한 결의를 개발해야 합니다. 

해탈의 결의

제가 보통 “해탈의 결의”라고 부르는 것은 “포기(renunciation)”로 번역되고 있어 다소 오해를 부를 우려가 있습니다. 이 역어를 쓰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굴에서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용감하게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를 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다음과 같이 결심하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문제들에 질렸고, 지루하다. 이제 벗어나야 한다.”

여기서 발전시키고 있는 태도는 해방되려는 결의와 함께 우리의 낡고, 불안정한 생각, 말, 행동 패턴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주 굳은 경의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해방되려는 우리의 시도는 미미하여 결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얻고 싶지만 부정적인 습관과 감정과 같은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를 멈추고, 문제나 그 원인을 기꺼이 단념해야 한다는 단단한 결의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분노를 없애야 한다. 내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사회를 위해 화를 버려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나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며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만일 내가 화를 낸다면 면목만 잃을 뿐 아니라 그 일로 온 가족을 망신시킬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내 동료들을 모두 망신시킬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는 화를 다스리며 그것을 없애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더욱 강력한 동기는 다음을 숙고함으로써 생겨납니다: “나는 분노를 없애야 한다. 왜냐하면 분노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아이들, 동료들, 부모님 같은 다른 사람들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내가 화가 나서 분노와 적개심에 격분한다면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주요 장애물이고,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동기 부여를 진정으로 개발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을 적용하려는 강한 의욕이 없다면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방법들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첫 번째 단계는 동기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우리가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 무엇일까요? 분노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무엇인가에 대해 폭력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동요된 마음의 상태로 정의됩니다. 분노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동물, 상황 또는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분노를 표현함으로써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든 해를 입히려는 욕망이 결합되어 그것에 편협하고 인내심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의 반대는, 한편으로 편협함의 반대인 인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해롭기를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종종 화가 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고, 직장에서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우리의 일을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매우 화를 냅니다. 또 다른 예로, 누군가가 우리의 발을 밟았을 때 우리는 그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화가 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화를 내지 않고도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인내심을 기르기 위한 샨티데바의 조언

8세기의 인도의 위대한 상사 샨티데바는 많은 유용하고 현명한 생각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가 쓴 것을 바꿔 표현해 보겠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있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걱정하거나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왜 걱정과 화를 냅니까? 이 경우, 분노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페낭에서 싱가폴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지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 예약이 꽉 차서 이미 만석이라고 한다면, 화를 내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분노는 우리가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돕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 항공편을 탈 수 있습니다. 왜 화를 냅니까? 다음 항공편을 예약하고,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약 TV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왜 화를 내고 걷어차고 욕하는 것입니까? 그냥 TV를 수리하면 됩니다. 그것은 매우 명백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것을 바꾸면 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혼잡한 시간에 교통 체증에 갇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앞에 있는 모든 차들을 파괴할 레이저 빔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일본 만화 에서와 같이 교통 정체 위를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깨끗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 나는 교통 체증에 걸려있으니 라디오나 카세트 플레이어를 켜고 불교의 가르침이나 즐거운 음악을 들을 거야.”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러시아워 교통 체증에 걸릴 시간대를 알고 있으므로 테이프를 가지고 들을 준비를 미리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교통 체증에서 운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무실이나 가족 또는 무엇이든,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좋은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둠 속에서 발을 부딪혔다면, 펄쩍펄쩍 뛰면서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질까요? 미국 속어로는 그것을 “고통의 춤을 추다”라고 합니다. 다쳐서 너무 아파 위 아래로 껑충껑충 춤을 주지만, 그것이 통증을 낫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고, 뛰고 소리지르며 고함을 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요? 모두가 찾아와 “아, 안타깝게도 발끝을 다쳐버렸군요.”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것일까요? 어린 아이나 자녀가 다치면, 그들의 엄마가 와서 뽀뽀를 해주고 위로를 해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취급해 주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항상 줄에서 32번이나 9번이 되지는 않지만 결국 내 차례는 올 것이다.”라고 무상함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황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고 우리는 이 시간을 다르게 사용할 것입니다. 인도에는 “기다림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줄에 서서 자신의 차례나 버스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이용하여 줄이나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그들의 직장 문제 등에 대해 물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자비의 감각을 기르는데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있다면, 30분을 욕하면서 보내는 것보다 건설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샨티데바의 또 다른 충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막대기로 우리를 때렸다면 누구에게 화를 낼 것인가? 우리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그 막대기에 화를 낼 것인가?”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화를 내야하는 대상은 그 막대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아프게 한 것은 막대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아무도 막대기에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왜 우리는 사람에게 화를 낼까요? 왜냐하면 막대기가 그 사람에 의해서 다뤄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 생각해 본다면, 그 사람은 그의 번뇌에 의해서 다뤄졌습니다. 그래서 화를 낸다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막대기로 때리게 한 그 사람의 번뇌에 화를 내도록 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번뇌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이 어떤 곳에서도 기인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유발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여 날 막대기로 때리게 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했는데 상대가 그것을 거절하여 화를 냈을 수도 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따지고 보면 사실 그것은 내 자신의 잘못이다. 내가 너무 게을러서 스스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부탁했지만 상대가 거부하자 화가 난 것이다. 내가 나태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화를 낸다면, 이 사람에게 부탁을 한 어리석고 게으른 내 자신에게 화를 내야한다.” 

비록 그것이 부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이기심과 같이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번뇌로부터 자기 자신이 자유로운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가?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돕기로 동의하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일까? 내가 그렇지 않다면, 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기대했을까?” 이것은 분노를 다루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저는 분노가 항상 고함치거나, 소리지르거나, 상대방을 때리는 것을 통해 표현될 필요는 없다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정의에 따르면, 분노는 생겨날 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번뇌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내면에 분노를 숨기고 결코 드러내지 않아도, 그것은 내면에서 매우 파괴적으로 작용하여 우리를 매우 화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후에 매우 파괴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에 표현되지 않은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 제가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방식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 

인내의 다양한 유형

인내의 대상 유형

인내심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내의 대상 유형입니다. 요점은 표적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향해 총을 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친구의 바지 엉덩이 부분에 종이를 핀으로 고정시키거나 풀로 붙이는 게임을 합니다. 그 종이에는 “나를 차세요”라고 쓰여 있고, 아이의 엉덩이에 있는 이 표시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 아이를 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인내를 적용해보면, 과거의 자신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통해서 어떻게 “나를 차세요” 표시와 같은 것이 우리의 뒤에 핀으로 고정되어 왔고, 이 때문에 현재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리에서 강도를 당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과거나 전생에 부정적으로 파괴적인 행위를 한 것으로 내가 표적을 만들지 않았다면, 나는 강도가 나를 강탈하고 때리기 위해 서있는 어두운 거리를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때 같으면 나는 그곳에 가거나 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 밤은 그 어두운 길로 걷고 싶었다. 평소에는 훨씬 일찍 귀가하는데 그날은 친구들과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더군다나 나는 강도가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바로 그 길을 택했다. 왜 그 충동이 내 머리에 떠올랐을까? 과거에 내가 이 사람을 해치는 어떤 일을 저질렀음으로 인과의 관점에서 그것이 지금 무르익고 있음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충동이란 업의 표현으로 우리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의 과거의 부정적인 업적을 지우고 있다. 그것은 훨씬 더 나쁜 상황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별일 없이 끝난 것을 기뻐해야 한다. 그 사람은 나를 강탈했지만, 나를 총으로 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정적인 업이 단지 가볍게 무르익어 끝을 맺게 된 것 같아 안도감을 느낀다. 결국, 그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며 나는 그것을 없애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어 기쁘다. 나는 더 이상 업의 빚을 지고 있지 않다.”

이런 유형의 사고는 큰 도움이 됩니다. 언젠가 주말에 친구와 함께 해변에 갔을 때를 기억합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시내에서 차로 먼 거리였습니다. 약 한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하고 나니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길가의 자동차 정비소에 들렀습니다. 정비사가 차를 점검해 보더니 차축에 균열이 생겨 계속 운전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견인차를 불러 도시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제 친구와 저는 주말 휴식을 위해 이 아름다운 해변 리조트에 가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화가 나고 속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보았습니다: “와, 이는 훌륭해! 우리가 계속 운전했다면, 우리가 운전하는 동안 차축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을 거야. 끔찍한 사고를 당해서 둘 다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몰라. 업이 이렇게 큰일없이 가볍게 무르익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견인차를 타고 도시로 돌아가서 다른 차를 빌린 다음 다른 계획을 짰습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상황을 많이 경험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각도로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나의 과거의 부정적인 업을 고갈시키고 있다. 이 업의 빚은 무르익었다.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상황이 훨씬 안 좋았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그 상황을 훨씬 건전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에 기반한 인내

“사랑과 자비에 근거하는 인내”라고 불리는 형태의 인내도 있습니다. 이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지르는 사람들을 모두 정신적으로 혼란한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인내심은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를 당황시키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체면을 구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앵무새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를 비난한다면, 우리는 체면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 새에게 화를 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 나간 사람이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쳐도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체면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때때로 짜증을 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는 환자가 화가 났을 때 환자에게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환자에게 자비심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화나게 하거나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자비심을 느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체면을 잃는 사람은 그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체면을 구기는 쪽은 우리가 아닙니다. 모두가 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끄럽게 할 사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자비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때리려는 사람을 막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우리는 아이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우리와 다른 사람들 또는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노로 그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한다면 화가 나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 훈육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가 체면을 잃지 않도록 돕고 싶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노가 아니라, 배려로서 아이를 훈육하기를 원합니다. 

구루(스승)-제자 유형의 인내

다음은 “구루-제자 유형의 인내”입니다. 이것은 제자가 스승 없이는 배울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면 인내심을 키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10세기에 위대한 인도의 상사인 아티샤 존자는 티베트 불교의 부흥을 돕기 위해 초대되었습니다. 이 인도의 상사는 인도인 요리사를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 인도인 요리사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매우 무례하고 불쾌한 사람이었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아티샤 존자를 매우 존경하여, “스승이시여, 왜 당신은 이런 무례한 사람을 인도에서 데려 오셨습니까? 그를 다시 되돌려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당신을 위해 좋은 음식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티샤 존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 그는 단지 나의 요리사가 아닙니다. 그는 내 인내의 스승이기에 이곳에 데리고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직장에 항상 불쾌한 말을 하는 성가신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우리의 인내의 스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항상 손가락을 딱딱 두드리는 매우 불쾌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항이나 버스 정류장에서 긴 지연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이것을 인내심을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 나는 이것을 하기 위해 훈련을 해 왔다. 나는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훈련을 했고, 이제 나는 내 자신을 시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혹은 만약 우리가 직장에서 일부 관료적 양식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도전으로 받아 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랜 기간 무술을 수련하다가 드디어 내 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얻은 것과 같다. 나는 아주 기쁘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인내와 관용을 훈련해 왔다면, 우리가 이렇게 불쾌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아! 여기에 도전 과제가 있다. 내가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지, 내면에서 평정을 잃지 않고, 화를 내지 않고, 속상해 하지 않는지 보자.”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은 무술 시합보다 훨씬 큰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몸이나 신체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감각의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한다면, 화를 내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발전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은 나의 단점을 지적하고 있고 그것은 나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견디고 태도를 바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매우 화가 난다면, 그것은 정신이 나간 사람의 욕설과 비판보다 우리의 평판을 더 해칠 수 있습니다. 

필연성에 대한 인내

분노에 대처하고 인내를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필연성에 대한 인내”입니다. 나쁘고 무례하게 행동을 하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불의 본성은 뜨겁고 활활 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불 속에 손을 집어 넣는다면, 화상을 입을 것입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겠죠? 불은 뜨겁고, 그것이 불이 타오르는 이유입니다. 만약 우리가 점심 시간에 시내를 가로질러 운전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까요? 점심 시간대에는 교통이 아주 막힐 것입니다. 그것이 필연성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뜨거운 차 한잔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면 그는 그것을 쏟아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할까요? 그는 어린 아이이고, 우리는 그 아이가 아무것도 엎지르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우리의 사업을 위해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하여 약속을 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실망시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대했습니까? 사람들은 미성숙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인도의 상사였던 샨티데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하고 싶다면 당신이 직접 하십시오. 누구에게도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만약 당신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을 배신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아무런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러한 상황을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내가 무엇을 기대했을까? 만약 인간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라면, 나는 화를 낼 이유가 없다.”

법계(法界)에 관한 인내

분노에 맞서는 마지막 방법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법계(法界)에 관한 인내”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타인, 사물에 실체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상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어떤 면에 큰 실선을 그리고, 우리의 실체적인 정체성을 이 측면에 투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나다. 나는 항상 이래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신의 선물이다.” 혹은 “나는 패배자, 낙오자다.”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큰 실선을 누군가에게 그려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불쾌한 사람이야. 그는 나쁜 사람이야. 그는 늘 문제의 근원이야.” 하지만, 그것이 이 사람의 모습, 실체적 정체성이라면, 이 사람은 항상 이렇게 존재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이렇게 존재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누구에게나, 그의 아내, 기르고 있는 개, 고양이, 그의 부모님 등 모든 존재에게 불쾌감을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본질적으로 불쾌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실체적이고, 자성이 있는 정체성이나 본성을 명시하는 그들을 둘러싼 실체적인 선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에게 그렇게 화가 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불쾌한 행동이 비록 자주 발생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그것은 그가 항상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용한 습관 개발

어려운 상황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논리적 사고법은 모두 “예방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법(Dharma)”라는 말을 제가 번역하는 방식인데, 법은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채택되는 방책입니다. 우리는 유익한 습관으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인내심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함으로써 화를 내는 것을 방지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명상”입니다. 명상에 대한 티베트어 단어는 “어떤 것을 습관화 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인내의 다양한 유형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이치에 맞는지를 가리기 위해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이치에 맞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적용하고 싶은 동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 후 그것들을 예행연습하고 훈련하며 적절한 습관을 기르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점들을 먼저 재고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후에는, 사물을 그 방식으로 보고 느끼려고 해야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해서 마음 속에 상황을 그려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화나고 속상한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의 누군가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불행하기 원하지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지만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아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이렇게 보고 느끼려고 노력하고 집에서 조용히 앉아 마음속으로 그것을 많이 연습할수록, 우리가 직장에서 그 사람이 매우 불쾌하게 행동하기 시작할 때, 더 쉽게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에게 화를 내려는 충동 대신, 더 참을성 있고 너그러워지고자 하는 새로운 충동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것입니다. 

그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인내심을 개발하기 위해, 그를 어린아이처럼 간주하는 훈련을 해왔다면,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이 불쾌한 방식으로 행동할 때 체면을 구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한 자비심을 키웁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이런 식으로 보고 느끼는 습관을 키울 수 있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보고, 느끼는 것이 유익한 습관이 될 때, 그것은 점점 더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화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마음속에 공간이 생깁니다. 우리는 그것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므로 더 긍정적인 충동이 일어나고 더 유익하게 행동할 것입니다. 

불교 강연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호흡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고 각 강연이 시작될 때마다 호흡을 스물 하나까지 셉니다. 이 실천은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을 스스로 먼저 깨달을 경우에도 매우 유용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인가 심한 말을 하고싶은 부정적인 충동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여유를 만들거나, 만약 우리가 화나거나 속상할 때 다시 생각해볼 여유를 줍니다. 우리는 “내가 정말로 소란을 피우고 싶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명상과 더 많은 긍정적인 습관의 발달로, 우리는 더 많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상황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더 많은 긍정적인 대안이 떠오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고 이러한 대안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집중력을 기르기 위한 실로 다양한 명상법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들은 단순히 추상적인 훈련으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용하고 적용하기 위해 수행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언제 적용할까요? 우리는 불쾌한 사람이나 불쾌한 조건을 다루는 어려운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인내심 있는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약

우리는 자기 통제와 규율만으로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통제와 규율만으로 자제한다면, 분노는 여전히 우리 안에 머무릅니다. 우리가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분노가 끓어올라 이로 인해 위궤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방법들은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노를 통제하여 내부의 모든 것을 억제한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생기는 충동 그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억제해야 할 부정적인 충동 대신에 긍정적인 충동이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동기에 따라, 우리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에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가장 강력하고 숭고한 동기를 가지고, 우리의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에게 문제나 폐를 끼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최대한 도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여러가지 감정이나 문제로 인해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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