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팔송”의 해설 – 달라이 라마

때때로 우리는 매우 부정적인 사람들을 만나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우리가 도와준 사람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한다면,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훈련 방법으로, 우리는 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침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카담파 게셰 랑리 랑빠의 글인 《수심팔송》혹은 태도 훈련은 우리가 화를 낼 위험에 처했을 때 태도를 바꿀 수 있는 방법과 지혜로운 마음을 훈련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처음 일곱 구절은 방법, 즉 자애와 보리심을 다루고, 여덟째 구절은 지혜와 분별 의식을 다룹니다.

제 1게송: 모든 존재는 여의주보다 귀하다

모든 중생이 최상의 행복을 얻기를 바라오니, 항상 그들을 여의주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우리 자신과 모든 중생(유정)들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모두 완전히 평등합니다. 하지만, 우리 각각은 한 개인이지만, 다른 중생들은 무한히 많습니다. 

지금 두 가지 숙고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기애와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이기적인 태도는 우리를 매우 폐쇄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주된 열망은 자신이 행복해지고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이루는 방법을 모릅니다. 사실, 이기적인 행동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반면에 남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남을 자신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남을 돕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스럽게 행복해 집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것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는 정치인들은 존경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끊임없이 타인을 착취하고 나쁜 짓을 하는 정치인들은 끔찍한 사람의 본보기로 기록됩니다. 종교, 내생, 열반에 대해 잠시 차치하면, 심지어 이생에서도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기 중심적인 행동으로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반면에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그들의 삶과 에너지를 진심으로 바쳤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숭고한 업적을 항상 존경하며 기억합니다. 그들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결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심지어 우리의 친족이 아닌 사람들도 우리를 좋아해 주고, 우리와 함께 행복을 느끼고, 따뜻한 감정을 느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좋게 말하면서도 뒤에서 험담을 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물론 아무도 우리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남을 도우려고 노력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최대한 적게 한다면, 우리는 이 생에서도 많은 행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 살지 않습니다. 길어야 100년입니다. 우리가 그 기간 동안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염려하며, 덜 이기적이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훌륭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행복의 원인입니다. 이기적이어서 언제나 스스로를 최우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 다음으로 삼는다면 실제 결과는 우리 자신이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지막으로, 남을 우선시하는 것이 앞서 나가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다름 생 또는 열반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것이 점차적으로 올 것입니다. 이 생에서 우리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남는다면, 우리는 이 세계의 좋은 시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도이든, 기독교 신자든, 공산주의자이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세계의 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이기주의를 근절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든 방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샨티데바의 훌륭한 경전인 《입보리행론》은 이것에 매우 도움이 됩니다. 저 자신도 이 경전에 따라서 수행합니다. 그것은 매우 유용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우 교활하고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논리적인 추론과 신중한 분석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고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 서양 심리학자들은 분노를 억누르지 말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분노를 실천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표현해야 할 정신적 문제와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문제 사이에서 중요한 구별을 해야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불공평하게 대우받는데 그럴 경우에는 불만을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를 내면에서 괴롭힐 것입니다.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분노와 같은 번뇌의 부정적인 감정을 함양한다면, 그것은 우리 성격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분노를 표현할 때마다, 우리는 미래에 분노를 더 쉽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할 때까지 점점 더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어떤 것들은 확실히 표현하기에 적절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을 통제하려고 할 때 처음에 그것은  어렵습니다. 첫째 날, 첫째 주, 첫째 달에는 그것들을 잘 통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우리의 부정성은 점차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정신 발달의 진보는 약이나 다른 화학 물질을 복용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통제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이든 궁극적이든 우리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여의주보다 다른 존재에 더 의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항상 다른 중생들을 더 돌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실제로 이루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과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둘 다 중요합니다. 첫째, 우리가 순수한 동기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 만족스럽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첫 번째는 순수한 동기를 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 전에 동기를 완전히 가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완전히 깨달은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방대하고 광범위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우리는 보살의 수행계위 중 제일 단계인 환희지(歡喜地, 처음으로 성자가 되어 진실로 희열이 가득 찬 지위) 에 도달해야 합니다. 즉, 공성(공)의 비개념적인 인식과 초감각적 지각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많은 단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질을 갖추기 전에도 우리는 보살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의 행동은 보살보다 덜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자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좋은 동기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이것은 더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이며 단순히 명상과 만트라 복창을 하며 고립된 곳에 머무르는 것보다 낫습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에 따라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외딴 곳에 머물면서 일정 기간 안에 확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마도 절반의 시간을 활동적인 일에, 나머지 절반은 명상 수행에 바치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제 2게송: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높이 여기고 나 자신을 낮게 여기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면, 나 자신을 모든 이들보다 낮은 존재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나 자신보다 높이 여기게 하소서.

우리가 누구와 함께 있든 종종 ‘나는 그보다 강해’, ‘나는 그녀보다 아름다워’, ‘나는 더 똑똑해’, ‘나는 더 부자야’, ‘나는 훨씬 더 자격이 있어’ 등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많은 오만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자선사업에 종사할 때에도 스스로를 약자를 이롭게 하는 위대한 보호자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것 또한 오만함 입니다. 우리는 매우 겸손하게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고, 우리의 서비스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스스로를 동물과 비교할 때, ‘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 ‘나는 승려다’ 혹은 ‘나는 여승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고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곤충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곤충들이 매우 순수하고 교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우리는 종종 목적을 달성하거나 자신을 더 낫게 하기 위해 교묘한 방식으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왜곡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는 곤충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해야 합니다. 곤충들은 아무도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일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훈련시키는 방법입니다.  

제 3게송: 번뇌를 강력한 방편으로 맞서 대처하라 

내 모든 행동을 자신의 흐름으로 분별하고, 내 마음속에서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그 마음이 나 자신과 타인을 해롭게 하므로 강력한 방편으로 맞서 대처할 수 있도록 하소서.

우리가 매우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자신에게만 몰두할 때 우리의 마음을 조사해보면, 번뇌 망상의 태도가 이러한 행동의 뿌리임을 알게 됩니다. 번뇌 망상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어지럽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감정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에게 대항책을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번뇌 망상의 일반적인 대항책은 공성(공)에 대한 명상입니다. 하지만, 초보자인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특정한 감정에 대한 대항책도 있습니다. 따라서 집착을 위해, 우리는 추악함을 명상하고, 분노를 위해 사랑을, 무명을 위해 연기(의존적 발생)를, 많은 방해되는 생각들을 위해 호흡과 기를 명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에 대한 집착/애착을 발달시킵니다. 그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매력적이지 않거나 못생긴 것으로 보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한 애착을 발달시킬 수 있고 그 형태를 매우 매력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애착을 분석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단순히 피부를 보는 것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이 몸의 본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살, 피, 뼈, 피부 등의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피부를 분석해 봅시다. 예를 들어 자신의 피부를 살펴봅시다. 만약 우리가 피부 한 조각을 떼어내서 며칠 동안 선반에 놓는다면, 그것은 정말 혐오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피부의 본성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똑같습니다. 사람의 살점에는 어떤 부분에도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우리가 약간의 피를 본다면 애착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이라도 다 긁힌 상태라면 아름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추함은 사실 육체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뼈, 골격도 모두 혐오스럽습니다. 해골과 십자 대퇴골 표시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집착/애착이나 사랑을 느끼는 무언가를 분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단어를 갈망이나 집착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물체의 추한 측면을 더 생각하고, 사람이나 사물의 본성을 이 관점에서 분석하십시오. 비록 이것이 우리의 집착/애착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을 조금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물의 추악한 면을 보는 습관을 만들 때 명상의 목표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랑과 친절은 ‘이 사람은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존경과 친절을 보여줄 것이다.’와 같은 생각에 바탕을 두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랑의 토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이 사람은 행복을 원하는 살아있는 존재이고, 고통을 원하지 않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이에 근거해, 나는 사랑과 자비심을 느낍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랑은 무명과 무지에 바탕을 둔 견고하지 않은 첫 번째 사랑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연민에 대한 근거는 견고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단지 애착/집착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작은 태도 변화는 즉시 우리를 변화 시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감정이 매우 피상적인 것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혼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종종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 그들은 적이되고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했습니다 - 아무도 증오로 결혼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은 관계의 기반이 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작은 변화는 다른 사람의 완전한 태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입니다. 물론 나는 행복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상대방도 행복을 원할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이 사람도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확고한 근거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심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상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아무리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추한 것으로 변하더라도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연민을 보여주는 주된 이유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완벽하게 안정적입니다. 

물론,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즐길 때, 혹은 우리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들로부터 즐거움을 얻을 때, 우리는 어느 정도의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용수(나가르주나)가 《보행왕정론(고귀한 화환)》(Skt. Ratnavali) (169)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가려움을 긁는 것은 즐거움을 주지만, 이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가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비슷하게, 세속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즐겁지만,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은 더욱 즐겁다.

반면에, 분노에 대한 대항책은 사랑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노가 매우 조잡하고 거친 정신 상태이므로 사랑에 의해 부드러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명에 관해, 우리는 무지 또는 무의식에서 시작해서 노년기와 죽음까지 이어지는 12연기(十二緣起)에 대해 명상합니다. 좀 더 미묘한 수준에서, 우리는 연기법을 모든 현상이 어떻게 실체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지를 근거하는 이유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제 4게송: 성품이 악한 사람을 귀중한 보물로 소중히 여기라

성품이 악한 유정 중생이 무거운 악행과 고통에 억눌리는 것을 볼 때면, 마치 귀중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우리가 본성이 악하고, 잔인하고, 거칠고, 불쾌한 사람을 만날 때, 우리의 일반적인 반응은 그 사람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 어린 관심은 줄어들기 쉽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생각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약해지도록 두는 대신에, 우리는 마치 귀중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그 사람을 특별한 사랑과 자비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제 5게송: 패배는 내가 받고 승리는 다른 사람에게 바치라

다른 사람이 시기심으로 나에게 헐뜯음과 욕설 등의 부당함을 행할 때, 그 패배는 내가 받고 승리는 다른 사람에게 바칠 수 있게 하소서.

누군가가 우리가 무능하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고, 모욕하거나 비판할 때, 우리는 쉽게 화를 내고 그 말을 반박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신, 우리는 겸손하고 참을성 있게 이 거친 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거친 말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진 좋은 자질들에 대해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자만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자질과 기술에 대해 확신을 갖고 그것을 용감하게 사용해야 하지만 오만하게 자랑스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완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오만/자만의 대항책으로 길러지지만, 우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좋은 자질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이상적으로, 우리는 많은 용기와 힘이 필요하지만 자랑하거나 과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우리는 가진 기회를 잡고 옳은 것을 위해 용감하게 싸웁니다. 이것은 완벽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좋은 자질이 전혀 없지만 자신이 얼마나 우월한가를 자랑하고 정작 어려운 시기에 물러난다면, 우리는 그 반대일 뿐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매우 용감하지만 자만이 없고, 다른 사람은 매우 자만하지만 용기가 없습니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승리를 바치는 조언에 관해서는 두 가지 상황을 구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복지에 집착하고 매우 자기 중심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승리를 제공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복지가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매우 열심히 노력하여 다른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며, 패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결국 둑까따(보살의 46계 중 하나로 행위로 저지른 가벼운 죄)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매우 해로운 일을 하는 상황에서 만약 모든 평화로운 방법이 실패할 경우, 강제적인 방법이나 다른 조치들을 삼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회가 있을 때 우리가 강력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서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 보살계와 부당함을 감수하고 남에게 승리를 안겨줘야 한다는 다섯 번째 게송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살계는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챙기는 상황을 말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극도로 해롭고 위험하게 행동하는 경우, 필요하다면, 그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종종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자기 중심적인 보살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광범위한 친절과 자비심에 의해 부여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부정적인 업보를 만들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감정들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할 때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가는 매우 복잡합니다. 자신에 대한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는 것이 그들에게 결정적이거나 일시적인 방법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미래에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운 일을 하는 것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유익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긍정적인 힘이나 공덕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인입니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계정지품83-84):

보시바라밀과 같은 육바라밀을 순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중요하게 행하여,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뜻을 버리지 말라. 중요한 것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바로 알아차려 항상 타인을 이롭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자비를 지니신 분이 멀리 내다보시어 (소승에서) 금지된 것을 (대승에서는) 허용하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금지된 행동을 하는 것의 이점이 단점을 능가하는지 여부를 피상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는 수준에서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어려울 때, 우리는 자신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대승집보살학론》(Skt. Shiksasamuccaya) 에서 샨티데바는 보리심을 가지고 행해지는 일반적으로 금지된 행동의 이점이 그러한 동기 없이 행하는 부정적인 행동보다 더 크다고 유사하게 말합니다.  

극도로 중요하지만 때로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설명하는 경전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위 경전에서 금지되는 특정 행동은 상위 경전에서는 허용됩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어떤 상황에서도 결정을 내리는 것이 더 쉬워질 것입니다. 

제 6게송: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선지식(스승)으로 보라

내가 큰 기대를 갖고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나에게 아주 부당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그들을 최고의 선지식(善知識, 스승)으로 보게 하소서.

우리는 보통 우리가 정말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자신에게 매우 감사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배은망덕하게 반응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쉽게 화를 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화를 내지 말고 인내심을 연습해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선지식(스승)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그들을 존경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서 인내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인내심을 기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업의 법칙에 대한 지식과 믿음 자체가 인내를 낳습니다. 우리는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며, 내가 전생에 저지른 행동의 결과입니다. 나는 이미 무르익고 있는 이 경험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견뎌야만 합니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 고통 받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나는 인내와 같은 건설적인 태도를 통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에 짜증이나 화를 내는 것은 미래의 불행의 원인인 부정적인 업보 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인내심을 수행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몸의 고통스러운 본성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다 - “이 몸과 마음은 모든 종류의 고통의 기초입니다. 그들에게 고통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결코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인내심을 기르는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또한 샨티데바가 《입보리행론》에서 말한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인욕품 10):

만약 고칠 수 있다면 이에 좋아하지 않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고칠 수 없다면 이에 좋아하지 않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만약 우리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걱정하거나 기분이 나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면, 걱정하고 화를 내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것은 매우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은 화를 내는 것의 단점과, 인내심을 실천하는 것의 이점을 숙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이며, 따라서 우리의 더 나은 자질 중 하나는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인내심을 잃고 화를 내면,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잃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인 인간의 지혜를 잃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심을 잃고 짜증을 낸다면, 이 귀중한 도구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와 결단력으로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 7게송: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내가 받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리라 

요약하면, 직접 간접적으로 생긴 이익과 기쁨은 모두 어머니들께 줄 수 있게 하시고, 나의 어머니들의 모든 손해와 고통은 남들이 모르게 내가 받게 하소서.

이것은 강한 자비심과 사랑으로 동기를 부여하여 다른 사람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우리의 모든 행복을 그들에게 주는 (통렌) 수행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으며, 다른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 압도당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지는 모릅니다. 이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들의 모든 고통과 부정적인 업보를 받아들이려는 의도를 발전시키고 그것이 즉시 우리 안에서 무르익기를 기도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들도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결여되어 있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행복, 즉 우리의 몸, 부, 그리고 긍정적인 업의 힘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서 즉시 무르익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떠안고 그들에게 우리의 행복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존재들 사이에 그러한 전이가 일어날 때, 그것은 과거로부터의 매우 강한 끊어지지 않는 업의 연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 명상은 우리의 마음 속에 용기를 쌓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고, 따라서 큰 도움이 되는 수행입니다. 

《일곱 가지 마음 수련법》에서 게셰 체게와는 “주고 받기를 번갈아 가며 훈련하여 그 둘을 호흡에 장착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랑리 탕빠는 이것이 은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선정품 120):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과 다른 사람(유정)들에게 속히 안전한 방향을 제시하려 하는 자라면, 그는 자신과 타인을 바꾸기를 행하는 거룩한 비밀을 수행해야 한다. 

이 수행은 초보 보리심 수행자들의 마음과 맞지 않기 때문에 ‘비밀’ 혹은 ‘숨겨진’ 이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단지 선택된 소수의 수행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의 또 다른 구절(선정품 126)에서 “다른 유정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다면, 일체의 원만함을 두루 성취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용수는 《보행왕정론》에서 “다르마(법) 수행은 단순히 몸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들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샨티데바가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해를 입힐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가 머리를 치거나 그러한 행동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샨티데바는 때때로 강한,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매우 강하게 논쟁하고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 강력한 방편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을 해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복지에만 집착하는 ‘나’와 깨달음을 얻게 되는 ‘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샨티데바의 이 구절을 이전과 이후의 구절의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가 논의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에는 실체적인 존재에 집착하는 ‘나’가 있고, 자기애와 관련된 ‘나’가 있고,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사용하는 ‘나’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다른 문맥에서 ‘나’에 대한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면, 그것이 단 한 명의 중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우리는 스스로 삼계의 고통을 짊어지거나 지옥의 한 곳에 떨어지는 것이 합당하며 이것을 할 용기를 길러야 합니다. 모든 유정을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해야 하고 기꺼이 지옥계의 가장 극심한 영역인 아비치(무간지옥)에서 한량없는 무한겁을 보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해를 우리 자신이 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점은 우리가 지옥계의 한 곳에 기꺼이 갈 수 있는 용기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실제로 그곳에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카담파 게셰 체게와가 죽어갈 때, 그는 갑자기 제자들을 불러서 그의 수행이 실패했기 때문에 특별한 공양, 의식,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게셰는 자신이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지옥에서 태어나기를 기도해 왔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을 따라야 할지에 대한 순수한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옥이 아닌 청정한 땅에 다시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악도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강하고 간절한 소망을 발전시킨다면, 우리는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큰 긍정적인 힘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기적인 사람이 되려면 현명하게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편협한 이기심은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반면, 현명한 이기심은 우리를 성불로 이끕니다. 이것은 정말로 현명한 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보통 처음으로 하는 것은 성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경전들을 통해 우리는 부처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나는 성불하고 싶기 때문에 보리심을 수행해야 합니다.’라고 마지못해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성불을 열망하는 만큼 보리심을 염두에 두고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동기를 잊고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지옥계에 간다면 우리 자신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줄 수도 기적을 행할 수도 없지만, 법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는 가르칠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첫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거쳐야 하는 수행과 경험의 전체 경로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초기 단계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리심을 수행해야 한다고 느끼는 적절한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이기적인 관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가장 일반적인 자기 중심적인 태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러한 방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일종의 거짓말과 같습니다.

제 8게송: 모든 현상이 마음의 환상임을 깨달아 세간팔법의 혼란을 극복하라 

이 모든 것이 세간팔법(世間八法) 으로 오염되지 않게 하시고, 모든 현상이 마음의 환상임을 깨달아 집착할 것 없는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 구절은 분별하는 깨달음이나 지혜를 다룹니다. 이전의 모든 수행은 소위 세간팔법(칭찬, 비난, 즐거움, 괴로움, 이익, 손해, 명성, 치욕) 이라고 불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현상들에 관련된 개념으로 오염되어서는 안됩니다. 

세간팔법은 백색, 흑색, 혼합일 수 있습니다. 각 쌍의 첫 번째를 경험할 때,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두번째를 경험할 때의 지나치게 낙담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태도와 ‘나’라는 실체적인 존재에 대한 집착 때문에 발생하는 흑색입니다. 만약 이러한 감정이 그러한 애착 없이 발생 하지만 두 가지 동기와 함께 발생한다면 그것은 혼합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이생의 행복과 자기애에 얽매이지 않고 실체로서의 ‘나’의 존재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백색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구절을 첫 번째 일곱 구절에서 설명한 수행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간팔법(칭찬, 비판 등)에 관한 것들에 대한 실체로서의 ‘나’에 대한 우리의 집착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수행이 이렇게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현현하는 모든 것은 환영임을 인식하고 그것들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집착과 애착의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환영’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실체적으로 확립된 존재는 그들이 현현하는 곳마다 다양한 대상의 측면에서 우리의 마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에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즉, 독립적으로 확립된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체적인 존재가 나타나므로, 그러한 존재는 환영/허상인 것입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현상(제법諸法)에는 그러한 불가능한 존재의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공성(공), 즉 현현하는 것은 공하다는 것을 확고하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현상(법)이 고유한 본질이 없다(무자성)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후, 실체가 없는 것이 고정 불변하는 고유한 성질이 있는 것처럼 나타날 때, 우리는 고유한 본질(자성)을 가진 존재는 없다는 우리의 이전의 깨달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이러한 불가능한 존재의 방식을 반박합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즉 고유한 본질(자성)이 있는 실체적인 존재와 이전에 경험한 것처럼 그것의 공성을 결합할 때, 우리는 모든 현상의 허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체를 가진 듯한 존재의 현현은 허상이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단지 망상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상호 의존적 발생(연기법)에 의해 확립됩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고, 그것의 존재는 단지 인연에 의해 (의존적으로 생겨나는 기능을 통해) 발생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만약 행위의 주체와 행동의 존재가 단지 서로에게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고(연기성), 독립적으로 실재하고 기능할 수 없음(무자성)을 깨달을 수 있다면, 공은 연기의 발생의 과정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본질적으로 실재할 수 없는 존재, 즉 고정 불변하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실존하는 사물의 경험은 그 자체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가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 없는 본질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에 의해 반박됩니다. 논리는 현상들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그 자신의 본질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타당한 방법으로 경험하기 때문에, 그 법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다시 말해서, 무엇이 그들의 존재 증명합니까? 그들의 존재는 오직 마음에 근거해야만 연기에 의한 발생으로 확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물의 존재는 오직 마음(nāma, 명칭/단어/낱말)에만 의존하여 확립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매우 천천히, 천천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사물이 정말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편에서 고정되어 있는 무언가에 의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지, 혹은 더 간단히 말해서, 실제로 찾을 수 있는 실체가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의 편에서 확립된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정말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논리적으로 사물들이 자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존재를 확립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또는 다른 요인들의 힘에 의해 의존적으로 – 달리 말하면, 완전히 독립적으로 또는 의존적으로 연기에 의해 확립되는 것입니다. 논리는 사물이 자성에 의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가 확립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의존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존재가 확립되거나 설명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나타내는 개념이나 명칭(언어)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현상(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자성이 있어 독립적으로 성립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물의 존재가 자성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승 경전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편에서 그들의 실재를 확립하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현상의 존재는 오직 다른 요인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오직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여기서 단어 ‘단지’는 무언가를 배제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배제되고 있는 것은 마음 자체도, 마음이 의미하는 것도, 마음이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대상의 타당한 인식 방법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아무 것도 나타내거나, 의미하지 않거나, 또는 마음의 대상이 지시하는 물체가 타당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현상의 존재가 마음의 작용과는 다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현상의 존재는 단순히 마음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마음이 가리키는 것은 타당한 인식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사물의 실제 본질은 그들의 존재가 단순히 마음의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작용 외에는 대체 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상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리키는 객체(사물)가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의 지정된 개체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의 존재조차도 단지 마음의 작용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장 궁극적이고 정확한 견해인 귀류논증 중관파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의미에서 바깥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내면의 의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오직 마음(정신 작용)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사물도 의식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성(실존성)이 없습니다. 생각과 개념의 존재는 오직 마음이 분별하여 존재할 수 있습니다. 공성, 부처, 선, 악, 무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현상의 존재는 온전히 마음의 작용에 의지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 때문에’ 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마음만으로 실재할 수 있는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제합니다. 그것 이외에 ‘마음 때문에’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 인물과 가상 인물을 생각해 봅시다. 둘 다 그들의 존재가 그들을 위한 명칭(언어적 개념화)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정신작용으로 언어적으로 개념화하고 이름 붙일 수 있으며 그것이 다입니다. 우리는 ‘실제 인물’과 ‘가상 인물’을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칭의 측면에서, 어떤 명칭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실제 인물’은 현존하는 사람을 지칭하지만, ‘가상 인물’은 현존하는 사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약

우리를 감정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우리에게 하는 거친 말과 나쁜 행동이 허상인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들이 내재적으로 나쁜 사람, 언어, 행동 자체가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투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이렇게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이름표를 붙이고 그들을 지정하는 개념과 단어 혹은 명칭이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는 것으로 우리는 그들을 여의주로서 이름 붙여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과의 만남을 인내와 겸손과 같은 좋은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여깁니다. 

랑리 탕빠의《수심팔송 》"Eight Verses of Mind Training" 원문을 듣고 읽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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