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고 최대한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 위해 스스로 깨달음을 성취하는 보리심을 개발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因)과 과(果)에 대한 일곱 가지 가르침(칠종인과법)과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동등히 생각하고 교환하는 것(자타상환법)입니다. 저마다 평등심 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발전시키는 평등심은 다릅니다.
- 칠종인과법의 명상에서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였다고 인식하기 전에 오는 평등심은 친구, 적, 낯선 사람을 관상 하는 것을 포함해 집착, 애착, 반발을 그만두기 위한 평등심 입니다. 사실 그 이름 중 하나는 “친구, 적, 낯선 사람들을 향한 집착, 애착, 혐오감을 멈추게 하는 단순한 평등심” 입니다. 여기서 단순하다는 말은 더 많은 것들을 수반하는 두번째 방법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이 첫 번째 유형의 평등심의 또 다른 이름은 성문(산스크리트어 shravakas)과 연각(산스크리트어 pratyekabuddhas)에 공통된 평등심을 발전시키는 방식, 단순한 평등심 입니다. 성문(듣는 사람)과 연각(스스로 진화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소승(작은 수레) 수행자의 두 가지 유형입니다. 이러한 평등심의 유형에서의 단순하다는 말은 우리는 헌신적인 보리심은 갖지 않으며 관여치도 않는다는 것을 함의 합니다.
- 여기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우리의 태도를 균등히 하고 교환하기 위한 선행으로서 우리가 발전시키는 평등심은 위와 같은 유형의 평등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유정의 이익을 돕고 그들의 고뇌를 없애는것과 관련해 친근 하거나 소원 해지거나 하는 것을 생각지도, 행동에도 가지지 않는 평등심 입니다. 이것은 특히 타와 식별되는 현저한 대승(거대한 수레)의 평등심을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단순한 평등심
만약 우리가 칠종인과법에서 누구나가 자신의 어머니 였던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 오는 평등심을 발전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세 사람을 관상하기
첫째로 자기가 싫어하거나 적으로 간주하는 끔찍하게 여겨질 정도로 불편한 사람,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 그리고 낯선 사람 또는 그러한 감정을 전혀 갖지않는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세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관상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때 보통 어떤 태도가 생겨날까요?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불쾌감, 불안함, 혐오감이 생겨납니다. 소중한 친구에게는 끌림과 애착이 생깁니다. 낯선 사람에게는 매력도 혐오도 느끼지 않기에 도움도 해를 주기도 원치 않는 무관심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이에게 혐오를 멈추는 것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관상하는 사람들이 모두 여자라고 해봅시다. 첫째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우리가 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부터 시작합니다.
- 그녀가 불쾌하고 혐오스럽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둡니다.
- 더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무언가 나쁜 일이 그녀에게 생기거나, 또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좋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나쁜 감정과 소망이 생겨나는 이유를 분석합니다. 보통 그녀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끼쳤거나, 우리나 친구들에게 심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지금 우리는 너무 싫어하는 이 여자에게 무언가 나쁜 일이 생기길 바라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좋은 이유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 과거 생에서 소위 적이라 불리는 사람은 여러 번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친척이자 친구였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셀 수 없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 이 생에서 일어날 일은 확실치 않습니다. 그녀는 이번 생 후반에 큰 도움이 되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 어떠한 경우에도 그녀와 나는 무한한 후생을 가질 것이고 그녀가 언젠가 나의 엄마나 아빠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 때, 그녀는 나를 아주 많이 도와줄 것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그녀에게 걸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과거, 현재, 미래 그녀는 나에게 끊임없이 도와왔고, 돕고 있고, 도울 것이며, 궁극적으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이 생에서 나에게 약간의 상처를 주었다는 등의 사소한 이유로 그녀를 적으로 간주하고 잘못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닙니다.
- 몇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은행 직원이나, 나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고 과거에도 몇차례 주었던 큰 권력을 가진 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자제력을 잃고 화가 나서 나의 얼굴을 때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약 내가 화를 내고 분노에 사로잡히면, 그가 나에게 더 이상 돈을 주는 것을 그만 두는 이유가 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그가 변심해 그 돈을 다른 누군가에게 주려고 할 위험마저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맞는 것을 참고 시선을 아래로 하고 조용히 있는다면, 그는 내가 동요되어 화내지 않았다는 것에 더욱 기뻐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더 많은 돈을 주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일을 크게 만든다면, 이것은 마치 티베트의 속담처럼 입 속에는 음식이 있는데 혀가 그것을 쫓아낸다가 됩니다.
- 그렇기에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고 모든 유생들 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의 도움은 장기적으로 100% 확실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나에게 끼칠 가볍고 사소한 해로움에 집착하는 것은 완전히 부적절한 것입니다.
- 다음으로 우리는 전갈, 들짐승, 또는 유령 들이 아주 작은 도발에도 즉각적으로 그것에 응징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그러한 생물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분노를 가라 앉힙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든 간에, 나는 이성을 잃고 화를 내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나는 들짐승이나 전갈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 마무리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삼단논법의 논리로 정리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 전생에 그들은 나의 부모님 이었습니다.
- 후생에 그들이 나의 소중한 친구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전혀 없습니다.
- 미래의 어떤 시점에 그들은 나의 부모로 다시 태어나 나를 많이 도와줄 것입니다. 그들은 세 시대에 걸쳐 나를 돕고 있습니다.
- 만약 내가 대가로 화를 낸다면, 나는 들짐승 보다 나을게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이번 생에 어떤 작은 해를 끼친다 해도, 화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을 멈추는 것
- 우리는 처음 관상했던 나의 적, 친구, 낯선 사람의 그룹에서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 그녀를 향한 끌림과 애착의 감정이 일어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 이 사람과 얼마나 함께하고 싶은지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그리고 나서,
- 그렇게 열중하고, 집착하는 이유를 살펴봅니다. 그녀가 이생에서 작은 도움을 주고, 친절히 대해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그런 면에서 내가 그녀에게 끌리고 애착이 두는 것입니다.
- 이제 그러한 감정을 갖는 것이 올바른 이유인지 검토합니다. 이것도 좋은 이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 의심 없이 과거 생에서 그녀는 나의 적이었고, 나를 해치고, 심지어 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적도 있습니다.
- 나중에 그녀가 나의 최악의 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 후생의 삶에서 그녀가 언젠가는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정말 나쁜 짓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 그녀가 이생에서 나를 위해 훌륭하지만 사소한 일을 했다는 작은 이유 하나로 그녀에게 푹 빠져 집착한다면, 나는 (그리스 신화의) 세이레네스의 식인 요부들의 목소리에 매료된 남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예쁜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해 그들을 잡아 먹어 버립니다.
- 이와 같이 누군가 이생에서 우리를 위해 한 사소한 일로 어느 누구에게도 집착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중립의 사람에 대한 무관심 멈추기
세번째로, 우리는 친구도 적도 아닌 낯선 사람, 중간에 있는 사람에 대해 같은 과정을 따릅니다.
- 우리의 관상에서 그런 사람에게 초점을 두고,
- 이 사람을 해치거나 돕고 싶지도 않고, 없애거나 함께 하고 싶지도 않는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둡니다.
- 그녀를 무시하려는 의도를 더 느낍니다.
-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의 이유를 살펴봅니다. 그녀는 우리를 돕지도, 해 하지도 않았기에 우리는 그녀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이렇게 느끼는 것이 타당한 이유 인지에 대해서 더욱 면밀히 살펴볼 때, 궁극적으로 그녀는 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과거 생에서, 이생에서, 미래의 생에서 친해질 것이고,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분노, 집착 또는 무관심의 모든 감정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문이나 연각의 공통된 평등심을 발전시키고, 타인을 위한 헌신적인 마음인 보리심을 계발하기 위한 칠종인과법 에서 모든 사람은 우리의 어머니 였다는 것을 인식을 선행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태도를 평등하게 하고 교환하기 위한 선행으로서 대승에 현저한 평등심
자신과 타인을 위한 태도를 평등하게 하고, 교환하기 위한 선행으로서 대승에 현저한 평등심을 발전시키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 서로 상대방의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하는 방식입니다.
- 가장 심오한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하는 방식입니다.
상대적인 시점에 의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 자기 자신의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시키는 방식입니다.
- 타인의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시키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하는 방법
여기에는 다음 세가지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 모든 유정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인생에서 우리의 부모, 친척, 친구 이기도 했으니 어떤 사람에게는 친근감을 느끼고, 다른 이들은 거리감을 두고, 이 자는 친구이고, 저 자는 적이고,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다른 것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10분, 10년, 10생 동안 보지 않더라고 그녀는 결국 내 어머니 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를 도왔고 해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도운 횟수나 얼마나 도왔는지에 비하면, 그들이 나에게 해를 끼친 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친밀히 여기고, 다른 이는 배척하고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자신의 죽음의 때는 불확실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내일 사형이라고 판결이 내려져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마지막 날을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고 상처 입히려고 애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사소한 것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하루를 무언가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일게 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고위 관리가 누군가에게 극도로 분노해 다음날 그를 가혹하게 처벌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날 하루를 그것을 계획하는 데 다 썼지만 다음 날 아침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분노는 완전히 터무니 없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다음 날 사형 선고를 받은 경우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오늘 그를 해하게 하는 것은 무의미 한 것입니다.
타인의 관점에 따라 평등심을 실현하는 방법
이것도 세 가지로 나뉩니다.
-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 자신은 꿈속에서조차 고통받고 싶지 않으며, 아무리 행복해도 그것이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벌레부터 모든 유정들은 행복하기를 원하며 결코 고통을 겪거나 문제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받아들이고, 다른 이는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열명의 거지가 내 집에 왔다고 가정해 봅시다. 일부에게만 음식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제공하지 않는 것은 부적절하고 불공평합니다. 그들은 모두 배고프고 음식을 필요로 하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잘못된 견해(무명)에 의해 오염 없는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 글쎄요, 누가 그것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러나 그릇된 견해로 변질된 행복에 대해서조차도 모든 유정이 충분한 자량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찾으려고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소원하다고 배척하고, 다른 이는 친하다고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다른 예로 열명의 병자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은 모두 비참하고 불행하다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를 베풀어 치료해주고, 다른 사람들은 잊는 것은 불공평 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유정이 각자의 특정한 개인적 고뇌나, 제어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일반적인 고뇌로 인해 똑같이 비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소원하다고 배척하고, 다른 이는 가깝다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적절 합니다.
가장 심오한 관점에 의존하는 평등심을 실현하는 방법
이것 또한 세 번의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 잘못된 우리의 시각 때문에 우리가 자신을 도울 사람, 혹은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진정한 친구로, 자신을 상처 입히는 사람을 진정한 적으로 어떻게 분류하는 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가 분류한 방식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렇게 (피안으로) 가신 붓다 자신도 그렇게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르마키르티가 『양평석』 에서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신체 한쪽에서 향수를 뿌리고 있는 사람과 반대쪽에서 그의 몸을 얇게 자르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하십니다.”
우리는 질투 때문에 항상 그를 해치려 했던 사촌 데바닷타를 부처님이 어떻게 대했는지의 예에서 이러한 공평함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가 이름 붙인 형태의 범주에서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편파적이거나 편을 드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확립된 존재에 대한 자신의 아집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아집은 자신의 혼란한 마음에 의해서 비롯 되어 사실이 아닌 방식으로 사물을 보여줍니다.
- 나아가 우리가 그렇다고 파악한 유정이 아군과 적군의 범주에서 실로 존재한다고 확립 되었다면, 그들은 언제라도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항상 정확한 시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계를 생각해 보세요. 시간이 지나며 상태가 변하고 느리게 작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상태 또한 계속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가령 제어 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상황에서는 아무런 확증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여기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먹고, 어머니를 때리고, 적을 돌보는 아들의 예가 도움이 됩니다. 이 예는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적인 길(lam-rim)에 있는 중급 레벨의 동기를 개발하기 위한 지침에 나와 있습니다. 한번은 가전연 존자가 아버지가 연못의 생선으로 다시 태어나 그 아들이 그것을 먹고 있는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의 어머니였던 개를 아버지의 생선의 뼈로 때리고 원수였던 자신의 아기를 팔 안에서 어루만졌습니다. 가전연 존자는 윤회를 헤매고 있는 생물 상태의 그러한 변화의 부조리에 웃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들이 고정된 아군이나 적군이라는 범주 속에서 사람들이 존재 할 것이라는 집착과 아집을 멈추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배척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 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상호의존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산과 가까운 산의 예처럼 양자는 서로 의존하여 상대적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우리가 가까운 산에 있으면 다른 산이 먼 편이고 이 쪽이 가까운 듯 합니다. 우리가 저쪽으로 가면 이쪽이 더 먼 산이 되고 저쪽이 더 가깝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입장에서 “나”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친구와 적은 단지 사람을 보고, 여기는 다른 방식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친구이자 누군가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가깝고 먼 산처럼 모든 것은 우리의 관점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다섯 가지 결정
위의 사항들에 대하여 생각한 후, 우리는 다섯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편향된 견해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적인 시각으로 보느냐 아니면 가장 깊은 시각으로 보느냐를 떠나서 어떤 사람들은 가깝고, 다른 사람들은 생소하게 여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은 결심을 해야 합니다. “나는 편향된 견해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는 배척하고 다른 이는 받아들이는 편견을 스스로 없앨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대와 집착은 현세와 내세 모두에 일시적으로나, 궁극적으로,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수백 가지 종류의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것들은 제어할 수 없이 반복되는 윤회 환생의, 고뇌의 감옥에서 나를 계속 돌게 만드는 수위 와도 같습니다.
1959년 동란 이후 티베트에 남은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절, 부, 재산, 집, 친척, 친구들에게 애착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20년 가량 수감되었고, 이것은 그들의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한 편향된 감정은 기쁨 없는 지옥계의 불길 속에서 우리를 불러들이는 학살자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밤에 자는 것을 방해하고 괴롭히는 우리 내면의 곪은 악마입니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뿌리째 없애야 합니다.
반면에 모든 유정이 행복하고 문제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한 태도는 일시적으로나 궁극적으로 모든 관점에서 중요합니다. 모든 부처들과 보살들이 그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가는 주요 경로 입니다. 그것은 삼세 제불의 뜻이자 가장 깊은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유정이 그들 편에서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든, 도움을 주든 내 입장에서는 달리 취할 길은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화를 내거나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는 멀게, 다른 이는 친근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외에 상황들을 다루는 다른 길이나 방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결정을 내렸습니다. 나는 누구에게나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에 대해 공평한 태도를 취할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결코 고통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가능한 한 최대한의 노력을 하려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스승이시여,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구루 푸자 – 라마 초파』 (The Guru Puja – Lama Chopa)의 5절에서의 첫번째 절을 읽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편안함과 기쁨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저를 가지해 주십시오. 아무도 가벼운 고난조차 원하지 않고, 현재 누리는 즐거움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 첫 절에서는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고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동등하게 없애는 것에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가깝거나 소원하거나 하는 느낌을 갖지 않는 공평한 태도를 발전시키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공평한 태도는 자기 자신에게 하는 유형의 평온함 또는 평준화의 정의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가게에서 멋진 상품을 찾고 그것을 사기로 결정할 때처럼, 우리는 그 태도를 발전시키고 이루어야 겠다는 굳은 결심을 합니다.
나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없앨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갖는 것의 결점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이기적으로 자신을 아끼는 태도 때문에 우리는 나쁜 행위를 저질렀으며 열 가지 파괴적인 행동을 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지옥으로 떨어지는 환생을 가지고 옵니다. 그로부터 아라한(해탈한 자)에 이르지 못하기까지 이러한 이기적인 생각은 행복과 평안을 잃는 원인이 됩니다. 보살들은 깨달음에 가깝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 차이점은 그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자기애의 정도에서 비롯 됩니다. 나라의 분쟁에서 영적 스승과 제자 사이, 가족 내 또는 친구들 간의 불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이기심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자신 안의 점점 곪아가는 이기심과 자기 애착을 없애지 않는 다면 어떠한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자기 애착에 휘둘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스승이시여, 제가 모든 이기적인 생각을 스스로 제거하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이것이 제 2절에서의 생각입니다.
이기심이라는 이 고질병이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을 초래하여 비난을 받아야 하므로, 이 악마와도 같은 이기심을 파괴하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이와 같이, 2절을 통해 우리는 이기적인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기로 굳게 결심합니다.
나는 다른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나의 주요한 수행으로 삼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는 것으로써 그에 뒤따르는 이익과 좋은 자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번 생에는 모든 행복과 모든 것이 잘 되고, 훗날에는 인간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며, 일반적으로 모든 행복과 깨달음의 성취까지 모두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옵니다. 우리는 많은 관점에서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존경받는 공직자의 인기는 그의 타인을 향한 배려와 아끼는 마음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 또는 훔치는 것을 억제하는 우리의 윤리적인 자기 규율은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파생되는데 이것이 우리의 윤회 환생을 가져다 줍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 성하는 항상 모든 사람의 안녕을 생각하는데, 그의 모든 좋은 자질은 이 다른 이를 소중히 여기는 데서 생겨납니다. 욕망의 신 카마는 툭메이 장포 보살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위대한 티베트인 수행자는 곤충이 불길에 날아가면 눈물을 쏟는 그런 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모든 사람들을 깊이 배려했기 때문에 귀신이나 간섭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 조차 그를 해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정령들이 말했듯이 이것은 그가 우리를 이롭게 하고 소중히 여기는 생각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가 과거 생의 하나로 신들의 왕인 인드라로 태어났는데 신들과 아수라들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수라들이 이기고 있어 인드라는 그의 전차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는 많은 비둘기들이 모여있는 길가로 이르러 비둘기 몇 마리가 치일까 두려워 마차를 멈췄습니다. 이를 보고 아수라들은 그가 돌아서서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전차를 멈춘 줄 알고 도망쳤습니다. 이것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간 것은 인드라의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이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처럼 수많은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는 이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정장관 또는 고관이 관직에 우아하게 앉아있을 때, 그의 지위와 그에 얽힌 모든 것이 타인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예에서 다른 사람들의 친절은 단순히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 외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행정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그는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이 그의 앞에 와서 일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 그는 그들과 상호의존을 하며 똑바로 앉아 그들에게 봉사할 것입니다. 라마도 마찬가지 입니다. 타인과의 상호의존 속에서 그는 점잖게 앉아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지위는 그를 도울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법이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가르치므로 그의 도움은 그가 그들의 친절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자비심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우리는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적이 우리를 해하면 우리는 인내심을 발전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깨달음에 더욱 가까워 지는데, 이는 우리가 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정들이 모든 행복과 복지의 기초이자 뿌리이므로 아무도 싫어하지 않고 그들이 무엇을 하든, 나를 해칠 수 있든 상관없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늘 귀중히 여기고, 만약 그들에게 무슨 나쁜 일이 있으면 상실감을 느낄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그들을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그들은 나의 영적 스승들, 여러 부처님, 또는 귀중한 보석들 과도 같습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스승이시여, 타인에 대한 이런 마음과 감정을 한시도 잃지 않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세 번째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축복받기를 보장하는 마음은 무한한 공덕으로 통하는 관문인 것을 알고, 그래서 이 방황하는 자들이 우리의 적으로 나타나더라도 우리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이런 식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수행을 우리의 중심 목표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나는 확실히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많은 결점과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의 많은 자질에 대해 생각하는 문호에 기대어, 누구를 소중히 여기는가에 대한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고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실제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 우리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제어 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상황과 고뇌 속에서 윤회 환생에서 다시 윤회 환생으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은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를 교환했습니다. 그는 남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과 타인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대조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아끼고 다른 이들을 무시해 왔습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제쳐 두고 우리는 심지어 자신을 위한 아주 사소한 이익조차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고 남들을 무시함으로써 무엇 하나 의미 있는 일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고뇌에서 벗어나겠다는 진정한 출리심과 결단력을 키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이 윤회 환생 중의 가장 나쁜 상태에 빠져드는 것 조차 막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를 소중히 하는 것의 결점에 대해서, 그리고 타인을 소중히 하는 것이 이익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만약 부처님이 자신의 태도를 바꿀 수 있고, 그도 우리처럼 시작했다면 우리도 역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분한 익숙함만 있으면 자기 신체를 돌보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신체 또한 소중히 하는 것 역시 가능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부모라는 타인의 몸에서 난자와 정자를 얻어 이제는 그것들을 자신의 몸으로서 소중히 여깁니다. 애초부터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태도를 교환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교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교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나의 영적 스승이시여,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이것이 제 4절의 취지 입니다.
간략히 말해서,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해 노예가 된 우매한 중생의 결점과 타인을 위해 분투하는 성왕의 미덕의 차이를 이해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깨우치시어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의 태도를 평등하게 하고 교환할 수 있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이처럼, 여기서 우리가 결심할 것은 나와 타인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우리는 분명히 교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반드시 교환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기적인 것의 단점과 남을 아끼는 것의 장점을 생각하고 이번에는 두 가지를 섞어 번갈아 가며 살펴보겠습니다. 즉, 열 가지 파괴적인 행동과 열 가지 건설적인 행동을 차례로 각 목록에서 하나씩 교대로 거치며 그 결과를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소중히 하는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나를 아낀다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뺏는 것에 망설임이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기쁨이 없는 지옥계로 환생하고, 나중에 인간으로 환생한다 하더라도 나는 병으로 단명할 것 입니다. 반면에 내가 타인을 소중히 여긴다면, 나는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그만둘 것이고, 그 결과 더 좋은 상태로 윤회 환생하여 장수할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과정을 도둑질과 도둑질의 자제, 부적절한 성행위에 탐닉 및, 그런 행동의 자제 등으로 반복할 것입니다. 간략하게 제 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 모든 좋은 일의 바탕이고,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모든 고뇌의 문호이니,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교환하는 요가를 우리의 핵심 실천으로 하도록 가피하여 주소서.
다섯 번째 결정은 내가 반드시 나와 타인의 태도를 교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지금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나라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대상에 대한 관점의 교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남을 무시하기 보다는,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이기적인 걱정은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만약 이것에 실패하면, 무언가를 얻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도를 교환하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의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들의 고통을 짊어지는 관상의 훈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과 자비심을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우리는 누군가의 고뇌와 괴로움을 덜어주고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겠다는 남다른 각오와, 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헌신적인 마음인 보리심을 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
이 교법들의 출처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산스크리트어 Bodhicharyavatara)과 카담파의 위대한 고승들의 가르침, 제 4대 판첸라마의 구루푸자 – 라마 초파(The Guru Puja – Lama Chopa)입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 성하의 후반부의 스승인 꺕제 티장 틀제창의 작품집 (The Collected Works of Kyabje Trijang Dorjechang)에 번호가 매겨진 형태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이나 그 안의 숫자에 너무 열중하게 되면 마치 우리 눈 앞에 7개의 만두가 담긴 접시를 두고, 먹는 대신 그것이 몇개인지 그 모양의 근원은 무엇인지 등을 누군가 정식으로 증언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자, 그냥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