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의지하고 고통을 피하는 법

산스크리트어인 Dharma(다르마)를 티베트어로는 ‘chö(최)’로 옮깁니다. ‘chö(최)는 ‘지니다’ 또는 ‘구제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무엇을 구제하고 지닌다는 의미일까요? 바로 고통을 제거하고 행복을 성취하게 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가진 모든 중생을 위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자각하라 

우리가 겪는 고통에는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통과 또 하나는 신통력이 없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세계의 고통입니다. 인간이기에 느끼는 고통은 일반적으로 생로병사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후의 고통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반드시 인간으로 태어날 것도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날 것을 보장하는 타당한 논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은 후에 다시 안 태어나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환생할 내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 외 일입니다. 이 생에서 선한 업을 쌓는다면 당연히 내세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반면에 악한 업을 쌓는다면 악도에서 크나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합니다. 환생은 이런 식으로 작동합니다.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날 것입니다. 볍씨를 심으면 벼가 날 것입니다. 이처럼 악업을 지으면 내세에 지옥, 아귀, 짐승 가운데 하나로 태어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옥을 네 가지 – 화탕지옥(火蕩地獄), 한빙지옥(寒氷地獄), 초반지옥, 후반지옥 – 로 나눕니다. 이 네 지옥을 세분화해서 8열 지옥과 8빙 지옥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첫 번째 지옥은 등활지옥(等活地獄)입니다. 죽지 않고 계속 부활하는 지옥입니다. 다른 지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는 고통이 등활지옥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보다는 덜하다고 하니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등활지옥 아래에는 더 비참한 고통을 주는 지옥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지옥의 중생과 굶주린 아귀를 볼 수는 없지만 동물들이 겪는 고통은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죽어 동물로 태어나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하다면 여기 인도 길거리에 있는 동물들을 보십시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르마(법)는 내세의 고통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구제합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윤회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다르마는 우리를 윤회의 고통에서 구제합니다. 더 나아가 대승의 법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합니다.  

안전한 삼보 전에 귀의하기

평소 우리는 불, 법, 승 삼보를 많이 듣습니다. 불보(부처님)는 완전히 깨달은 분들을 뜻합니다. 법을 가르치는 분들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불보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 처음으로 바라나시에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성스러운 길은 법을 의미합니다. 해탈을 하려면 수행해야 할 법입니다. 이 법은 법보(다르마)입니다.  

수행은 두 가지를 수반합니다. 고통스런 윤회의 뿌리를 인식하고, 이 뿌리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되는 윤회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아와 현상이 실제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이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개발해야 합니다. 실재한다는 집착을 제거하는 해독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독제를 강화해야 합니다. 대상을 바르게 아는, 무아와 무자성의 지혜가 해독제입니다. 무아에 대한 이해만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윤회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절대 원인 없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윤회의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번뇌)과 업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 그리고 업의 뿌리는 ‘내가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집착’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착각 – 자아가 실제한다고 집착 – 을 없애는 치료제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 치료제를 개발하지 못한 것일까요? 왜 우리는 무아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요? 이유야 많겠지만 그 가운데 한 가지를 꼽자면 아직 우리는 죽음과 무상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무상

태어남에는 죽음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 가운데 죽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오랜 세월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위해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가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약으로도 죽음을 치료하지 못했습니다. 

막연히 ‘언젠가 내가 죽을 거야.’ 하는 생각은 죽음을 숙고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언젠가 죽을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자각하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적절한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해체되고 분해되어 부패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죽음을 인식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느낄 두려움과 이 두려움을 가시게 할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처입니다. 살아 생전 부정적인 업을 많이 쌓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매우 두려워합니다. 울부짖습니다. 뺨에는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입술은 달달 떨립니다. 옷에 똥오줌을 지리고, 무서워하며 까무러치기도 합니다. 살아생전 행한 수많은 악업의 과보로 죽는 순간 이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통입니다.  

반면에 살아생전 악업을 짓지 않은 사람의 경우,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고통을 쉽게 감내합니다. 죽음이란 마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내면이 정화되면 될수록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열 가지 악업을 삼가고, 열 가지 선업을 행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죽음은 수월할 것이고, 거듭되는 환생으로 겪는 고통이 언젠가는 멈출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보다 긍정적인 내세를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약이 되는 나무의 씨앗을 심으면 약을 얻겠지만 독이 되는 나무의 씨앗을 심으면 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 의식에 선업의 씨앗을 뿌리고 자라게 한다면 내세에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심신이 모두 훌륭할 것입니다. 악업을 삼가고 선업을 지으라는 가르침은 부처님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과 무상을 어떻게 숙고해야 할까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순히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실효성이 없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열 가지 악업 가운데 하나라도 범하면 죽는 순간에 큰 두려움과 고통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내세에는 많은 불행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생전 선업을 행한다면 죽는 순간에 두려움과 고통을 덜 느낄 것이며 내세에는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죽음을 마주하는 바른 사유법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죽고 말 것인데 뭘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 말인가?” 하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고 나면 내가 어디로 가는가?’ ‘내가 그동안 어떤 원인과 조건을 지었는가?’ ‘나의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세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세에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내세에 대해 명상을 할 때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윤회를 하는 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윤회계에 태어난 이상, 어떤 형태의 몸을 가져도 결국엔 죽습니다. 가끔 설화를 통해 백 년, 심지어 천 년을 살았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접합니다. 천 년을 살았다 해도 결국엔 죽습니다. 죽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윤회계에서 얻은 우리 육신은 결국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장소 역시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때가 되면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아무리 좋은 약도, 진언도, 수행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외과 수술로 특정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진 몰라도 죽음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삶을 살건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 생사, 사후, 내세 등을 숙고하는 것이 선업을 짓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계획하고는 바로 시작하지 않고 일단 미룹니다. ‘내일이나 모레부터 시작을 해야지’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먼저 죽을지, 언제 죽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백 년쯤 살 수 있으면 쉬엄쉬엄 수행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의 수명이 언제 다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미루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 태 속에서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걸음마도 채 떼기 전에 죽기도 합니다. 장수를 할 것이라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육신은 약합니다. 돌이나 철로 만들어졌다면 훨씬 더 단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인간의 몸은 매우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못되기가 무척 쉽습니다. 작고 깨지기 쉬운 부품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손목시계와 비슷합니다. 몸은 결코 믿음직한 물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식중독이나 해충 때문에 죽을 수도 있고, 심지어 작은 가시에 찔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소한 것조차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오래 살기 위해 먹는 음식들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혹시 어쩌다 우리가 백 년을 산다고 해도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갔고, 여전히 이루지 못한 것들도 많습니다. 짐칸에서 잠든 사람처럼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평생 많은 돈을 벌고, 비싼 보석을 지니고, 훌륭한 집에서 살아도 죽는 순간에는 모두가 같습니다. 죽으면 빈손으로 갑니다. 아주 사소한 물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몸마저 두고 갈 것입니다. 이 육신과 정신이 분리되고 나면 의식의 흐름만이 이어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이 몸마저 두고 갑니다.  

업(까르마) 

사후에는 어떤 의식이 함께할까요? 죽으면 이 몸과 가족 친지, 그간 소유했던 모든 것을 전부 두고 가야 하는데 내세에 도움이 되는 건 무엇일까요? 

사후, 의식을 따라가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살아생전 쌓은 업, 즉 씨앗입니다. 열 가지 악업 가운데 하나라도 지었다면 그 업은 의식에 하나의 씨앗으로 남습니다. 살생, 도둑질, 부적절한 성관계 등 몸으로 악업을 지었다면 의식에 남습니다.  거짓말, 이간질, 거친 말, 잡담 등 입으로 악업을 지어도 그 습관이 우리 의식에 실려 함께 이동합니다. 타인의 것을 탐내고, 타인에게 악의를 품고, 전생과 내생을 부정하고, 인과를 부정하고, 귀의처르 부정하는 등 왜곡된 생각을 품고 살았다면 이 또한 의식에 새겨져 내세로 이어집니다. 

선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업을 짓고 악업을 삼가면 선업이 의식에 남습니다. 이 의식의 흐름은 내세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보다 나은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숙고한다면 선업을 짓고 악업을 피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사소한 빚도 남기지 않아야 하며 최대한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인과의 법칙 아래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좋은 성품을 지녔지만 말이 거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에게 “개 같은 놈!”이라고 한 그 인과로 오백 생을 개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사소한 것일지라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선업이 엄청난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과거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을 당시, 매우 극진하게 공양물을 올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과보로 아이는 다음 생에 환생하여 많은 탑과 기념물을 세우며 불법 전법에 헌신했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아쇼카왕입니다. 

출리심과 자비심

자신이 저지른 부정적인 행동과 결과를 숙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행한 부정적인 행동으로 인해 겪게 될 비참한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출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출리심을 숙고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명상입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을 모든 생명체에게로 확장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을 원치 않지만 고통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사유합니다. 이를 통해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는 바람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만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타인들도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토대로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을 훈련하고, 이를 보다 확장시켜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출리심을 통한 자비심 명상은 훨씬 더 광대하고 유익한 사유 방식입니다. 

우리는 왜 타인을 염려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다른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시는 우유는 소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추위와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따뜻한 옷은 양과 염소의 털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고통을 염려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아주 사소한 이유 몇 가지를 예로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이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기도, 염불, 명상, 그 어떤 수행을 하든지 이 생각이 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살아 있는 존재들을 돕는 행위가 되게 하소서.’ 이런 마음가짐은 자신에게도 이롭습니다. 또한 일상생활을 할 때 모든 이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을 쫓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친절하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고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의식의 흐름에 심어야 합니다. 이 생각을 반복적으로 사유해 의식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매우 유익한 방식입니다. 과거 이렇게 사유한 이들은 부처가 되고, 보살이 되고,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성인은 모두 이 마음에서 탄생했습니다. 우리도 성인이 된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친 인과

질문) 누군가가 피해를 입히려고 한다면 자신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는 매우 광범위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머리를 몽둥이나 막대기로 때린다면 그 순간 바로 ‘내가 전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를 받고 있구나’를 떠올려야 합니다. 또한 이 사람이 지금 한 행동으로 ‘언젠가 과보를 받겠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이상의 서로 악업을 짓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심해야 합니다. 한편으론 상대에게 갚아야 할 악업의 빚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질문) 만약 어떤 사람이 저의 아내와 자식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가족을 보호하는 행동은 부정적인 행동입니까?

답) 아내와 자녀를 보호하는 것은 가장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지혜롭게, 능숙하게 가족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가족을 보호하는 동시에 가해자를 공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가족을 보호해야 합니다. 

질문) 그 사람이 저의 아이들에게 해를 입혔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없습니까? 부도덕적이고 잔인한 행위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닙니까? 이건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답) 이런 상황을 지혜롭게 풀자면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처님 전생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때 부처님은 오백 명의 사람들과 바다에 묻힌 보물을 찾으러 나선 배의 선장이었다고 합니다. 오백 명 가운데 욕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보물을 혼자 차지하기 위해 배에 타고 있던 동료들을 모두 죽일 계획을 꾸몄다고 합니다. 보살(전생의 부처님)은 그 사람의 계획을 미리 알고 살생이 자행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살생의 악업을 기꺼이 선택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타인을 구하기 위해 지옥에 태어나는 것마저 감내할 수 있다면 부처님과 같은 용기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한 것처럼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벌어진 살생을 악업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까?

답) 용수 보살의 저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부모, 형제, 삼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업을 지었다고 해도 악업의 과보를 받는다.” 차이가 있다면 아내와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한 행동을 하기에 앞서 자신이 받을 인과를 알고 ‘악업을 순순히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뿐입니다. 여러분이 가족에게 해를 입힌 상대방을 해치면 내세에 그에 따른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이 고통을 감내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더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돼.’ 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고통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역시 악업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답) 아내와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선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를 해한다면 그것은 악업에 해당합니다. 가족을 보호하면서 지은 선업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를 해하면서 지은 악업의 과보를 전부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합니다. 

질문) 린포체께서는 금생에 악업을 지으면 내세에 고통을 받고, 선업을 지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업을 쌓는 것으로 윤회에 다시 환생하지 않고 해탈할 수 있습니까?

답) 여러분이 해탈을 성취하고 싶다면 모든 가르침을 하나하나 배우고 수행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에서 설명하는 교리를 완벽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랬을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속죄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제대로 따른다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완전한 해탈도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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