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불교 문학에는 부처의 역사적 생애가 다층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초기 판본은 어떤 경전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다만 팔리 경전(sutra)과 상좌부 고전 문학에 기록된 사건들을 합친 것입니다. 훗날 대중부, 설일체유부, 대승 불교의 전통은 이 경전에서 나온 간단한 개요를 많은 세부 사항, 때로는 초인적인 것을 더해 윤색한 것입니다. 그러나 팔리 경전 원본에서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시대에 살면서 개인적으로나 승가 조직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도전에 직면한 매우 인간적인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티븐 베췰러(Stephen Batchelor)의 《어느 불교무신론자의 고백》에서 제시된 학술 연구를 기반으로 부처 초기의 생애를 다룹니다. 모든 명칭은 팔리어를 기준으로 합니다.
부처는 기원전 566년 룸비니원(현재 네팔 남부)에서 태어났습니다. 룸비니원은 샤캬국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싯다르타(Siddhattha)라는 이름은 팔리 경전에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편의상 여기에서 사용하기로 합니다. 고타마, 흔히 부처를 지칭하는 데 쓰이는 명칭은 사실 그가 속한 부족의 명칭입니다.
싯다르타의 아버지인 슈도다나(Shuddhodana)는 후대의 불교 문학에서 묘사된 것처럼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는 고타마 부족 출신의 귀족으로 샤카국의 지역 통치자였을 것입니다. 팔리 경전에는 싯다르타 어머니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산스크리트어 자료에서는 그녀를 마야부인(Maya-devi)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싯다르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이모인 마하파사파제(Mahaprajapati)는 당시의 풍습대로 그의 아버지와 결혼하여 싯다르타를 양육했습니다.
사캬국은 고대의 공화정 체제였지만, 싯다르타가 태어났을 때 이미 강력한 코살라 왕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코살라국은 현재 비하르의 갠지스 강 북쪽 기슭부터 히말라야 언덕 기슭까지 뻗어 있습니다. 왕국의 수도는 슈라바스티(사위성, Shravasti) 입니다.
부처님 생애의 주요 장소들에 대한 간단한 지리적 묘사로 그의 전기를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사캬국은 코살라국의 동부에 있으며, 사캬의 남동쪽에는 말라(Malla)주가 있습니다. 말라의 동쪽에는 밧지 공화국(Vajji republic)이 있고, 수도는 바이샬리(Vaishali) 입니다. 밧지 공화국은 부족 연방으로 통치되었는데 리차비족(Licchavi)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밧지와 코살라의 남쪽 갠지스강 건너편에는 강력한 마가다 왕국이 있었는데, 수도는 라자그리하(왕사성, Rajagrha)였습니다. 코살라의 남쪽, 현재의 파키스탄 펀자브(Punjab)에 위치한 간다라(Ghandhara)는 당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 총독의 관할이었고, 수도에는 당시 최고의 명문 대학 탁카실라(Takkasila)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 그리고 현지 인도의 사상과 문화가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싯다르타가 자란 카필라바스투는 당시 주요 상업 동맥인 북로(北路)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북로는 서쪽에서 코살라 왕국과 간다라를 이어 샤캬, 말라, 밧지 공화국을 통해 남쪽의 마가다국에 이릅니다. 팔리 경전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29살 이전의 삶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다양한 문화를 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심지어 탁카실라에서 공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 문헌에서 야쇼다라(Yashodhara)로 알려진 밧다깟차나(Bhaddakaccana)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녀는 싯다르타의 사촌이자 데바닷타(Devadatta)의 여동생입니다. 데바닷타는 훗날 부처의 주요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와 밧다깟차나 사이에는 아들 라훌라(Rahula)가 있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싯다르타는 29살이 되던 해에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영적 진리를 찾아 마가다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북로를 따라 갠지스 강을 건너 라자그리하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에 마가다국의 통치자는 빔비사라(Bimbisara) 왕이었고, 코살라국의 통치자는 파세나디(Pasenadi) 왕이었습니다. 양국 동맹의 일환으로 두 국왕은 각각의 여동생과 결혼했습니다. 파세나디 왕의 여동생 이름은 데비(Devi)입니다.
마가다국에서 싯다르타는 두 스승 아라다 카라마(Arada Kalama)와 우드라카 라마푸라타(Udraka Ramaputra)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두 스승은 브라만 전통 출신으로 싯다르타에게 무소유처(無所有處,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유로 깨달은 선정의 경지)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者, 생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이러한 성취에 만족하지 못했고 그의 스승들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인 고행 생활을 시작해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또 다시 그러한 수행이 해탈로 이어지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고행을 멈추고 현재의 보드가야(Bodh Gaya)인 야우루빌바(Urubilva) 근처로 갔습니다. 그는 39살에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마다다국에 간지 6년 후의 일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그는 서쪽의 바라나시(Varabasi) 바로 외곽에 있는 현재의 사르나트(Sarnath)인 리쉬파타나(Rishipattana)의 녹야원(鹿野苑, Mrgadava)으로 갔습니다. 파세나디 왕은 갠지스 강 북쪽의 이 지역을 동생 데비의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할양했습니다. 부처는 다섯 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녹야원에서 우기를 보냈습니다. 곧 그들은 소수의 신도들을 끌어들였고 부처가 돌봐야 할 승단을 꾸렸습니다.
리파비족의 귀족인 마할리(Mahali)는 웨살리(Vesali)를 방문했을 때 부처에 대해 들었고 빔비사라 왕에게 부처를 마다가국으로 초청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장마가 끝난 지 얼마 후에 커져가는 승단을 이끌고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았고 우기에 그의 승단이 안거를 보낼 수 있는 ‘죽림정사(竹林精舍, Venuvana)’라는 유휴 화원을 제공했습니다.
이윽고 지역의 저명한 구루의 제자인 사리불(샤리푸트라, Shariputra)과 목건련(Maudgalyayana)은 부처의 승가에 합류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부처의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리불은 부처에게 점점 확대되는 승가를 위해 계를 부탁했고, 빔비사라왕은 탁발하는 영적 단체인 자이나교의 관례를 도입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특히 한 달에 네 차례 포살(布薩)을 열어 가르침을 점검할 것을 요청했고 부처는 이에 동의했습니다.
어느 날, 코살라 왕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의 대부호인 급고독(給孤獨, Anathapindika) 장자는 사업차 라자그리하에 왔습니다. 부처에 감명을 받은 그는 파세나디 왕의 성 사왓티의 한 부지에 부처가 우기를 지낼 수 있는 장소를 약속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와 그의 승단은 코살라 왕국으로 이동했지만, 급고독 장자가 그들에게 머무르기에 적합한 장소를 세울 때까지는 몇년이 걸렸습니다.
그 동안 부처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카필라바스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슈도다나는 곧 그의 신도가 되었고, 8세의 아들 라훌라도 승가에 합류하여 사미(沙彌)가 되었습니다. 이 후 몇 년 동안 부처의 사촌인 아난다(Ananda), 아누룻다(Anuruddha), 데바닷타(Devadatta), 부처의 이복형제인 난다(Nanda) 등 여러 샤카의 귀족들이 승가에 합류했습니다. 난다는 ‘순다라난다(Sundarinanda)’, ‘아름다움을 즐기는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의 양모이자 이모인 마하파사파제는 커져가는 승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으나 처음에 부처는 거절하셨습니다. 그녀는 낙담하지 않고 머리를 깎고, 노란 가사를 입고, 많은 여성들과 함께 부처를 따랐습니다. 마하파사파제는 부처에게 출가를 계속 요청했지만, 부처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모두 거절했습니다. 결국 부처가 입적하기 몇 년 전, 아난다가 중재하여 마하파사파제를 대신해 부처에게 다시 청했고, 부처는 마침내 여성들에게 수계하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이는 밧지 공하국의 웨살리에서 일어났고 불교의 비구니 승단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급고독 장자는 그의 아낌없는 보시로 유명했는데, 부처가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온 몇 년 후에 그는 사왓티에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불리는 공원을 거금을 들여 샀습니다. 그는 그곳에 부처와 승려들이 우기를 지낼 수 있는 호화로운 사원을 세웠습니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지 약 20년 만에 부처는 승가를 위한 본격적인 하안거(夏安居)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매년 장마철의 하안거 기간에는 승려들이 3개월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전념했습니다. 부처는 기원정사에서 19번의 하안거를 보냈고, 그 기간에 844번의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급고독 장자는 비록 말년에 파산했지만, 승단의 지속적인 주요 후원자였습니다.
부처가 약 40세 때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은 기원정사에서 부처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부처는 왕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 후 그는 부처의 후원자이자 추종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와 파세나디 왕 사이에는 늘 미묘한 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 비록 왕은 학양이 풍부한 지적 후원자였지만, 향락을 추구하고 잔학한 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왕은 친구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말라의 반둘라(Bandhula)를 편집증적으로 처형하고 반둘라의 조카 카라야나(Karayana)에게 군대를 통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몇 년 후, 총사령관 카라야나는 파세나디 왕을 폐위시켜 외숙부의 복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파세나디 왕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용인해 운명을 바꿨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도둑과 들짐승으로부터 자신과 승가를 보호할 왕이 필요했고, 다른 부유한 시주자들에게 지원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왕위 계승자를 위해서 파세나디 왕은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왕후, 마가다국의 왕 빔비사라의 여동생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에 파세나디 왕은 말리카(Mallika)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말리카는 아름다운 하층 카스트 출신의 부처 신봉자였습니다. 조정의 브라만 사제들은 그녀의 천한 출신에 분개했습니다. 말리카는 와지리(Vajiri)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이때 왕은 아들을 낳기 위해 세 번째 아내를 두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부처의 사촌동생 마하나마(Mahanama)의 딸 비사바카티야(Vasabhakhattiya)와 결혼했습니다. 부처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마하나마는 샤카국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마하나마는 부처의 가까운 제자였던 아난다와 아누룻다의 형제였습니다. 마하나마는 비사바카티야를 왕녀로 속여 보냈지만, 그녀는 사실 그와 여종과의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습니다. 비사바카티야는 파세나디 왕 사이에서 아들인 비두다바(毘盧擇伽, Vidudabhava)를 낳았지만, 어머니의 혈통적인 비밀로 인해 코살라국 왕세자로서의 지위는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이 속임은 비사바카티야와의 친족 관계에 있던 부처님을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했습니다.
비두다바는 그의 출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16세 때 처음으로 샤카국을 방문해 할아버지인 마하나마를 알현했습니다. 그곳에서 파세나디의 군대의 총사령관인 카라야나는 비사바카티야의 엄마의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라야나가 파세나디 왕에게 그의 아들이 여종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리자 왕은 샤카족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노예로 신분을 강등했습니다. 부처는 그들을 대신해 사정했고, 왕은 결국 그들의 지위를 복원시켰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코살라국에서 부처의 지위는 더 이상 확고하지 않았습니다. 70세 무렵 그는 처음으로 마게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왕의 대나무 숲 정사가 아닌 지바카(Jivaka)의 망고 정원에 머물렀습니다. 이는 부처가 그때 이미 병에 걸렸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부처가 72세 때 그의 첫 후원자였던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아들 아자타샤트루(Ajatashatru)에게 왕위를 빼앗겼습니다. 아자타샤트루는 그의 아버지를 굶어 죽을 때 까지 투옥했습니다. 파세나디 왕의 여동생인 빔비사라의 아내도 슬픔에 죽었습니다. 데비의 복수를 위해 파세나디 왕은 조카 아자타샤트루 왕에 대항하는 전쟁을 일으켜 데비의 결혼 지참금으로 빔비사라 왕에게 보낸 갠지스 강 북쪽 바라나시 주변의 마을을 탈환하려고 했습니다. 전쟁은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빔비사라 왕은 평화 유지를 위해 딸 와지리를 아자타샤트루 왕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부처의 사촌이자 아자타샤트루 왕의 스승인 데바닷타는 부처의 승가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데바닷타는 부처에게 숲에서 살 것, 나무 밑에서 잘 것, 일반 신도들의 집에 들어가지 않을 것, 옷을 꿰매어 입고 신도들의 천 공양을 받지 않을 것, 엄격한 채식주의(생선, 고기,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않을 것)를 실천할 것 등의 승려들을 위한 추가적인 계율을 도입할 것을 설득했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승단을 지나치게 금욕적으로 만들어 현실 사회와 동떨어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데바닷타는 부처의 권위에 도전해 많은 부처의 제자들을 자신의 이념으로 끌어들였고, 자신의 승단을 조직하여 부처와 대치하면서 승가의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데바닷타는 여러 차례 부처의 암살을 기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마침내 사리불과 목건련은 부처의 승단을 떠난 승려들에게 돌아오기를 권했습니다.
데바닷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듯 했지만 부처에게 용서를 빌기도 전에 죽었습니다. 어쨌든 부처는 그에게 원한을 품거나 악의를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자타샤트루 왕도 역시 부왕을 죽인 것을 후회했고, 어의 지와카(Jivaka)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처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시해한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했습니다.
약 일년 후에, 부처는 고향 샤카를 다시 찾았습니다. 파세나디 왕이 부처를 뵙고 경의를 표하는 사이, 카라야나는 쿠데타를 일으켜 비두다바 왕자를 코살라국의 왕위에 앉혔습니다. 폐위된 파세나디 왕은 숨을 곳이 없어 마가다국으로 피신해 그의 조카이자 사위인 아자타샤트루 왕의 보호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파세나디 왕은 도시에 들어갈 수 없었고 다음 날 사망했습니다.
한편, 코살라국의 새로운 왕 비두다바는 그의 할아버지 마하나마가 혈통에 대한 진실을 속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샤카국에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마하나마는 부처의 사촌이자 샤캬국의 당시 통치자였습니다. 부처는 세 차례나 왕에게 출병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끝내 제지하지 못했습니다. 코살라국의 군대는 샤카국의 수도인 카필라바스투의 모든 주민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부처는 이 대학살을 막을 수 없어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로 떠나 아자타샤트루 왕의 보호를 구했습니다. 이전에 파세나디 왕이 보호를 요청했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마가다국으로 가는 길은 밧지 공화국을 지나는데, 그곳에서 부처의 가장 가까운 제자 사리불이 수도 바이살리에서 부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시종이었던 수나카타(Sunakshatra)는 가사를 벗고 교단을 떠난 바이살리 출신의 귀족으로 밧지 장로회에 유언비어를 퍼트려 부처를 비방했습니다. 그는 부처가 어떠한 신통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초월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단지 논리를 통해 욕망을 버리는 법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부처는 이것을 칭찬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과 비구니 승단의 설립 가능성까지 겹치면서 부처는 밧지국에서 지지와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갠지스 강을 건너 라자그리하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영취산(靈鷲山)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지냈습니다.
아자타샤트루 왕의 재상 왓사카라(Vassakara)는 부처를 찾아와 아자타샤트루 왕이 영토 확장을 계획하고 있으며 곧 밧지 공화국을 침공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부처는 밧지족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고 그들의 전통적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이전에 코살라국이 샤카를 침략했을 경우처럼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에 부처의 최측근 제자였던 사리불과 목건련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가 많았던 사리불은 질병으로 죽었고, 목건련은 홀로 안거를 보내는 중에 도적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마가다국에서 동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 부처가 다시 한 번 북쪽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은 고향인 사캬 지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아마도 코살라국의 침략을 겪은 후의 모습을 보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출발 전 부처는 아난다에게 영취산에 모든 승려들을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마지막 설법을 했습니다. 그는 승려들에게 밧지 공화국의 민주적 체계를 따라 승가를 구축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승려와 대중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조화롭게 공존하며, 그들의 공양을 나누고, 장로들을 예우해야 합니다.
부처가 곧 영취산과 마가다국을 떠나 밧지 공화국의 바이살리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곳에서 하안거를 보냈습니다. 그는 이 사회가 다가오는 전쟁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타락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밧지 공화국의 호감을 잃게 된 부처는 홀로 우기를 보내고 그의 승려들로 하여금 친지와 지지자들을 찾도록 했습니다.
하안거 기간 동안에 80세의 부처는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했습니다. 아난다는 부처에게 승려들을 위한 마지막 설법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처는 승려들에게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 장차 그의 가르침이 그들의 귀의처와 행동의 지침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으려면 부처의 가르침을 내면화하고 다른 승단이나 지도자의 구원에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부처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우기가 지나자 부처는 사촌이자 제자인 아난다와 아누룻다와 함께 다시 떠났습니다. 샤캬로 가는 길에 그들은 말라의 양대 도시 중 하나인 파와(Pava)에서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대장장이 춘다(Cunda)는 부처 일행에게 독이 든 돼지고기를 공양했습니다. 부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제자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음식을 먹고 나머지는 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말라는 군사를 이끌고 샤카 지역의 민중을 학살한 카라야나 장군의 고향입니다. 독이 있는 돼지고기는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암기한 것으로 알려진 아난다를 죽일 의도로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난다가 피살되면 부처의 가르침과 승가는 결코 존속할 수 없습니다.
피가 섞인 심한 설사를 겪으며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신을 쿠시나가라(Kushinagara) 근처로 데려가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침대를 준비하라고 이르고 그 자리에 있던 몇몇의 승려들에게 더 궁금한 점이나 의심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난다와 그 곳에 있던 승려들은 슬픔에 잠겨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는 기원전 485년에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의 시신이 화장될 무렵 파와에서 승려 일행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마하가섭(Mahakashyapa)이 이끌었고 부처에게 마지막 예의를 다할 때까지 화장을 미루자고 주장했습니다. 마하가섭은 마가다국의 브라만 출신으로 몇 년 전 고령으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습니다. 부처가 마하가섭을 처음 만났을 때, 부처는 자신이 입던 분소의(糞掃衣)를 마하가섭의 새로운 가사와 바꿨습니다. 후대에 이 일은 부처가 법맥의 권위를 물려준 것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것이 조사 법맥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자신이 입적한 후 법(다르마) 자체가 스승이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명시했습니다. 부처는 승가가 밧지 공화국의 민주적 체계를 이어가는 것을 바랐습니다. 그는 코살라와 마가다 왕국의 체계를 본받아 승려 한 명이 교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입적 후에 아난다와 마하가섭 사이에 권력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상사(구루)에서 제자로 권력을 부여하는 인도의 전통적 체제와 작은 공동체에 살면서 공통의 원칙과 수행을 따르는 탁발승들의 보다 평등한 민주체제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마하가섭이 이겼습니다.
부처가 화장되고 그의 유물이 나눠진 후에, 승려들은 다음 우기에 라자그리하에서 결집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검토하고, 확정하여, 성문화하자는 마하가섭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마하가섭은 참석할 수 있는 연로한 장로들을 선발해야 했습니다. 그는 499명의 해탈을 얻은 아라한만을 골랐습니다. 처음에 마하가섭은 아난다를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가 아라한과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난다는 부처의 모든 가르침을 암송할 수 있었지만 마하가섭은 그를 제외했습니다. 또한 아난다는 한 명의 승려가 교단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부처의 확고한 지지자이자 옹호자였습니다. 아마도 마하가섭이 아난다를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아난다가 부처에게 여성들을 수계하라고 설득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하가섭의 보수적인 브라만 전통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가 중의 장로들은 아난다를 배재하는 것에 항의했고, 결국 마하가섭은 아난다를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상좌부의 기록에 따르면 아난다는 결집 하루 전에 아라한과를 습득했습니다.
그러나 첫 결집을 기다리는 동안 아난다는 아자타샤트루 왕의 재상 왓사카라를 만났습니다. 아난다는 왓사카라로부터 마가다국이 밧지 공화국을 침공할 계획 외에도 마가다국의 서쪽에 있는 아반티(Avanti) 왕국의 프리다오타(Pradyota) 왕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부처가 교단 지도자를 통해 승가를 이끌 생각은 없었지만, 마하가섭이 지도권을 이어받아 부처의 가르침과 그의 승가가 이러한 위태롭고 불안정한 시기에 존속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을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500명의 아라한이 라자그리하 근처의 침엽굴(七葉窟, Saptaparnaguha)에서 열린 제1결집에 참여했습니다. 마하가섭이 주재했고, 아난다는 대부분의 경을 암송했고, 우팔리(Upali)는 승가의 계율을 암송했습니다. 이 결집에 대한 상좌부의 기록에 따르면, 특별한 지식에 관한 논(abhidharma)은 이때 암송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설일체유부 내에서 비바사사 기록은 마하가섭이 논의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를 암송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경량부에 따르면 결집으로 독송된 논은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 일곱 명의 아라한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마하가섭으로부터 시작해 7대 조사의 법맥이 이어졌습니다. 중국(Chan), 한국(Son), 일본의 선종(Zen)은 인도의 법맥을 거슬러 올라가 제28대 보리달마(Bodhidharma)에 이릅니다. 보리달마는 인도의 상사로 중국에 선종을 전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그는 선종의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컨대, 상좌부의 팔리 경전은 비범한 카리스마를 지닌 거의 비극적인 영적 지도자로서의 부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극한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나날이 커져가는 제자들과 신도들의 승가 설립과 지원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정치적 음모, 수차례의 전쟁, 고향 백성들의 학살, 정부를 상대로의 개인적 규탄, 지도자의 지위에 대한 제자들의 도전, 최측근 제자 중 한 명의 피살을 겪었고, 결국 자신은 독살당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이 모든 시련을 겪으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후 가르침을 펼쳤던 46년 동안 세상에 해탈과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지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