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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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통에서는 부처는 자신의 비범한 노력을 통해 해탈을 달성한 평범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또 다른 전통에서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존재가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2,500년 전에 현현하여 활동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삶을 알고 우리 자신의 영적인 길을 위해 어떤 영감을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전통적인 연대에 따르면, 고타마 붓다로도 알려진 석가모니 부처는 기원전 566년부터 485년까지 인도 중북부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다양한 불교 자료에는 그의 삶에 대한 수많은 다양한 설이 포함되어 있고,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오랜 세월에 거쳐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최초의 불교 문헌은 붓다의 입적 후 3세기 만에 편찬된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세부 사항 중 많은 부분의 정확성을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특정 세부사항이 다른 것들보다 나중에 문어체로 등장하였다는 것만으로 신빙성이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많은 것들은 계속해서 구전 형태로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처를 포함한 위대한 불교 스승의 전통적인 전기는 대체로 사실에 입각한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훈적인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전기는 불교도로 하여금 해탈과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게끔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부처의 생애 이야기를 통해 배움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이 맥락에서 이해하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의 생애의 출처

부처의 생애에 대한 가장 초기의 출처는 상좌부 불교경전 중의 《중아함경》(Pali: Majjhima Nikaya) 에서 나온 여러 팔리어 경전과 사찰 생활의 규율에 대한 다양한 소승학파의 여러 가지 율장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경전은 부처의 생애에 대한 일화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보다 자세한 첫 번째 설명은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소승불교 대중부의 《대사 大事》(Skt. Mahavastu)와 같은 불교 운문 작품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운문은 《삼장》(Skt. Tripitaka, Three Baskets) 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예를 들어, 부처가 왕실의 왕자로 태어났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런 또 다른 운문 작품은 소승불교 설일체유부 학파의 문학 《방광대장엄경》(Skt. Lalitavistara Sutra) 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후기 대승불교 형태의 경전은 초기의 것을 일부 차용하여 개량한 것으로 예를 들어, 부처는 오래전에 깨달음에 얻었고, 왕자 싯다르타로 등장하여 다른 이를 이끌기 위해 깨달음을 달성한 길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전기 중 일부는 삼장에 포함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시인 마명에 의해 서기 1세기에 쓰여진 《불소행찬》(Skt. Buddhacarita) 입니다. 그 외는 《승락금강》 문헌과 같은 탄트라에서도 나중에 나타났습니다. 거기에는 부처가 《대반야바라밀다경》 (Skt. Prajnaparamitasutra,  Perfection of Wisdom Sutras)에 대해 설파하며 동시에 바즈라다라로 현현하여 탄트라를 가르쳤다는 설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설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고 영감을 줍니다. 하지만 먼저 역사상의 부처를 묘사한 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의 탄생, 초년 및 출리

초기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현재의 네팔과 인도의 국경에 있는 카필라바스투(가비라위)의 수도가 있는 석가 주의 부유한 전사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족의 왕자로 태어났다는 언급은 없고, 그의 고귀한 태생과 싯다르타라는 이름은 나중에야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는 슈도다나 였으나 그의 어머니 마야 부인의 이름은 후기의 전기에서만 언급되는데, 6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그녀의 옆구리로 들어가 부처를 잉태하는 기적을 꿈에서 본 것과 그가 전륜성왕 또는 위대한 선인이 될 것이라는 선인 아시타에 의해 예견된 것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후 부처가 카필라바스투 근처의 룸비니 동산에서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순결하게 태어나 일곱 걸음을 내딛고 “내가 왔다”라고 말한 것이나, 출산 중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부처는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야쇼다라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그들은 아들 라훌라를 두었습니다. 29살의 나이에 부처는 가정 생활과 호사스러운 계승을 버리고 탁발유행자가 되었습니다. 

부처가 몸담았던 당시의 사회와 시대의 맥락에서 출리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처가 탁발유행자가 되기 위해 떠났을 때, 그는 아내와 자식을 곤경과 빈곤에 삶에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확실히 그의 부유한 대가족에 의해 보살핌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처는 전사 계급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족을 떠나 전쟁에 나가야 했고, 이는 남성의 의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외부의 적들과 끝없이 싸울 수 있지만, 진정한 싸움은 우리의 내부 적들과 일어납니다. 부처는 이 싸움에 나섰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난 부처는 평생을 그 구도에 바치는 것이 영적 구도자의 의무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만일 우리가 가족의 곁을 떠나 승려가 되려면 가족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연로하신 부모님을 의미합니다. 가족의 곁을 떠나든 그대로 머무르든 불교도의 의무란 부처가 한 것처럼 향락에 잠기는 것을 이겨 냄으로써 고통을 덜어내는 것입니다.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부처께서는 생로병사, 윤회, 불행, 무명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어하셨습니다. 나중 이야기에서, 부처는 그의 마부 찬나에 의해 궁전 밖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도시에서 부처는 고행자 뿐 아니라 병자, 노인, 죽은 사람들을 보았고 찬나는 각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누구나 겪는 진정한 괴로움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려고 하셨습니다. 

부처가 마부로부터 진리를 구하는 길에 대한 도움을 받는 것이 기록된 이 일화는 《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에서 아르주나가 마부 크리슈나 로부터 친족에 대항해 싸워야 하는 전사로서의 의무에 대해 들은 이야기와 평행을 이룹니다. 불교와 힌두교의 경우에서 우리는 편안한 삶의 벽을 넘어 진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의 더 깊은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각각의 사례에서 마차는 해탈로 이끄는 승을 상징하고, 마부의 말은 현실에 대한 진리를 찾도록 이 수단을 몰아가는 원동력 입니다. 

부처의 가르침과 깨달음 

부처는 금욕주의의 구도자로서 두 명의 스승 과 함께 다양한 선정과 형태가 소멸된 선정을 달성하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부처는 더 이상 극심한 괴로움이나 세속의 행복을 경험하지 않는 완전한 삼매 상태의 최고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태가 번뇌의 오염된 감정에서 영구히 구원해 주지는 않는 일시적인 것일 뿐 그가 극복하고자 하는 더 깊고 보편적인 고충을 확실하게 제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엄격한 금욕주의를 실천했는데, 이 수행 또한 육도윤회(samsara)에 관련된 뿌리 깊은 문제를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부처가 네란자라 강 부근에서 6년간의 단식을 끊으려 하자, 수자타라는 마을 처녀가 유미죽을 공양했다는 것은 나중에야 비로소 등장합니다. 

부처의 예는 마약과 같은 인위적인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명상의 완전한 평온함과 행복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깊은 황홀경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관행으로 스스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처벌하는 것 역시 해결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해탈과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이러한 목표에 이어지지 않는 영적인 방법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고행을 포기한 후,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숲 속에서 홀로 명상을 했습니다. 뿌리깊은 두려움이란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보다 더욱 강하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태도로, 자성으로 성립될 수 없는 “나”를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서기 10세기 인도의 거장 다르마락시타는 《마음훈련》(The Wheel of Sharp Weapons) 에서 독이 있는 식물의 숲을 방황하는 공작의 예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보살들이 자기 집착과 자성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나”에 대한 고집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탐욕, 분노, 어리석음 이라는 유독한 감정을 사용해 변용시켰음을 나타냅니다.

오랜 명상 끝에 부처는 35세의 나이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후의 설명에는 마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조복한 후, 현재의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른 상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질투의 신 마라는 보기에도 무섭고 유혹적인 환영을 내보내 부처의 꺠달음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초기의 설명에서 부처는 세 가지 명지, 즉 자신의 모든 전생에 대한 완전한 지식, 다른 모든 사람의 업과 환생에 대한 완전한 지식, 그리고 사성제를 획득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후기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깨달음을 얻어 일체지자(一切知者, 모든 현상의 평등과 차별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불교 정사(精舍) 승단을 가르치고 세우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는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설파하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주의 창조자인 인도의 신 브라마와 신들의 왕 인드라는 그에게 가르침을 간청했습니다. 브라마는 부처에게 만약 그가 가르침을 거부한다면, 세상의 괴로움은 끝이 없을 것이며,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설명은 풍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당시의 오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인도의 영적 전통이 설파하는 방식보다 뛰어났던 것입니다. 결국 가장 높은 신들조차 중생의 고통을 영원히 끝낼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의 설법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 설법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불교에 대한 비유적 묘사에서 브라마는 오만과 자부심을 상징합니다. 스스로가 전지전능한 창조주 라는 브라마의 잘못된 생각은, 자성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나”가 존재하고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혼란의 전형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좌절과 고통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이 참된 괴로움과 참된 원인을 진정으로 멈출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브라마와 인드라의 간청을 받아들여, 부처는 사르나트로 가서 녹야원에서 과거 함께 고행을 한 다섯 승려에게 사성제를 설파했습니다. 불교의 비유적 묘사에서 사슴이란 온화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쾌락주의와 금욕주의의 양극단을 피하는 온화한 방법을 가르치는 부처를 상징합니다. 

곧 이어 인근 바라나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탁발유행자로서 엄격한 금욕을 따르는 부처와 합류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들은 재가신자가 되어 시주를 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단련되고 자질을 갖추게 된 제자들이 나오자 부처는 다른 이들에게 가르침을 주도록 그들을 행각 시켰습니다. 이렇게 탁발승들은 빠르게 성장했고 곧 각지에 거처를 잡으면서 각각의 “정사(精舍)”승단을 형성했습니다. 

부처는 실천적 지침에 따라 불교 승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새로운 지원자를 승단에 데려올 때, 승려들은 정사 밖의 세속적인 권력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특정한 규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범죄자, 군사 등 왕궁을 섬기는 자들, 노예 계급에서 해방되지 않은 노예, 나병 같은 접촉 전염병이 있는 자들의 불교 승단 입단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20세 미만의 젊은이도 입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처께서는 문제를 전혀 원치 않으셨고, 승단과 불법의 가르침에 대한 사회의 신망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지역 관습을 존중하고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야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어 그들 역시 그것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는 보드가야의 한 왕령인 마가다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처의 후원자이자 제자가 된 빔비사라 왕은 그를 라자그라하(현대의 라지기르)로 초대했습니다. 그곳에서 사리푸트라와 마우드갈리아야나 또한 확대되어가는 부처의 승단에 합류하여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지 1년 만에 부처는 그의 집인 카필라바스투(가비라위)로 돌아갔습니다. 부처의 아들인 라훌라도 승단에 들어가 있었고, 그의 이복 형제인 수려한 외모의 난다도 집을 떠나 일찍부터 입단했습니다. 부처의 아버지인 슈도다나 왕은 가계가 끊어진 것에 대해 매우 슬퍼했고, 장래에 아들이 승단에 들어가려면 부모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부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이 설명의 요점은 부처가 아버지를 잔인하게 대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정 내에서 불교에 대한 나쁜 의도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처와 가족의 조우 장면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서 그는 신통력(神通力)을 이용해 33천(도리천, 忉利天) 또는 일부 출처에 따르면 도솔천(兜率天) 으로 가서 그곳에서 윤회한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깊은 친절에 감사하고, 그에 보답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불교 승단의 성장 

초기 불교 승단은 20명 이하의 소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각각의 승단은 독립적으로 승려의 탁발행각을 위한 소정의 경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각 승단의 활동과 결정은 어떤 불화도 피할 수 있도록 성원들 사이의 표결로써 결정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유일한 권위자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부처는 법의 가르침 자체가 승단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정사의 규율 자체는 필요하면 변경할 수 있었지만, 어떠한 변화도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져야 했습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가 자이나교와 같은 다른 탁발교단이 하는 것과 같은 분기별 모임인 재계(齋戒)/오포사타(烏逋沙他)의 관습을 채택하도록 제안했습니다. 이 관습에 따르면, 승단의 구성원들은 달의 각 분기가 시작될 때 모여 가르침을 토론합니다. 부처는 그 시대의 관습을 따르기 위한 제안에 열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에 동의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이나교를 바탕으로 승단과 가르침의 체계에 대한 많은 측면을 구축한 셈입니다. 자이나교의 시조인 마하비라는 부처보다 약 반세기 전에 살았습니다. 

사리푸트라는 또한 정사의 규율에 대한 윤리 규정을 위해 계율을 제정해 줄 것을 부처께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특정한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결정하고 유사 사례의 재발을 막기 위한 서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책은 그러한 행동을 하는 누구에게나 해로운 무도와, 특정한 상황 및 특정한 이유를 가진 특정인에게 금지된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행위를 고려해 이러한 방침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율(vinaya)의 규칙은 실용적이었으며, 특히 부처께서는 문제를 피하고 나쁜 행위를 초래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런 다음 부처는 율의 규칙에 따라 분기별 모임에서 승려들이 죄과를 회개하고 계본을 송독하는 것을 실시하였습니다. 가장 심각한 위반은 집단 제적이 적용되거나 아니면 집행 유예의 불명예만으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이런 정기적인 참회의 모임은 한달에 두 번만 개최되었습니다. 

부처는 석 달간의 우기 안거(安居)를 제정했으며, 그 동안 승려들은 한 지역에 머물면서 이동을 피합니다. 그것은 도로가 침수된 경우, 아무래도 승려들이 밭을 가로지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작물의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실용적인 승려 집단의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발전은 결과적으로 재가 신자들에게 불편이 생기는 것을 피하고, 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우기 안거 이후에 시작되어, 부처는 코샬라 왕국의 수도 쉬라바스티 외곽에 있는 제따와나 동산에서 25번 우기를 보냈습니다. 그 땅에 상인 아나타삔디까(급고독장자)가 부처와 그의 승려들을 위한 정사를 건립하고 파사익왕(프라세나짓)은 승단에 많은 기진을 하였습니다. 제따와나에 있는 이 정사(기원정사, 祇園精舍)는 부처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위대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부처가 신통력을 겨루려고 온 이교 6종파 사상가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중 누구도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부처가 논리보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이성이 닫혀있는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이해의 유효성을 확신 시키기 위해서 행동과 행위를 통해 구현된 것의 수준을 명시하는 것이 최선책 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은 말보다 중요합니다”.

여승단 질서의 기초를 다지기

설법을 해나가다 부처는 숙모인 마하파사파제의 요청에 따라 바이살리에 여승단을 설립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그러한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했지만, 남자 스님보다 더 많은 계율을 정한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는 여성이 남성보다 자제심이 부족하기에 더 많은 계율을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성 집단을 설립하는 것으로 악평을 불러, 자신의 가르침이 너무 일찍 끝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처는 승단 전체가 경멸 당하지 않기를 바랐고, 여승단이 부도덕한 행동을 한다는 어떠한 혐의도 받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부처는 규칙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불필요한 것으로 판명되면 보다 중요도가 낮은 것부터 철폐할 의사가 있었습니다. 부처의 사려깊음은 승의제와 그 지역의 인습에 합당한 세속제라는 두 진리의 역학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심오한 진리에서는 여성 출가자를 넣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일반인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멸시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여성 출가자에 대한 계율을 늘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승의제에 있어서는 사회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지만, 세속제에서는 불교 승단이 존경과 널리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불교의 전통적인 관습 때문에 여성 출가자나, 여성, 모든 소수집단에 대해서 어떠한 불이익이 있다면 시대의 규범에 맞추어 수정하는 것만이 부처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용과 자비는 불교의 가르침의 주안점이 됩니다. 예를 들어, 부처는 이전에 다른 교단을 지원해 온 새 제자에게 그 교단을 계속 지원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불교 승단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입단자들이 서로를 돌보도록 촉구했습니다. 만일 출가자가 병에 걸렸을 경우에는 다른 출가자가 간병을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입단자 모두가 불교도 라는 가족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재가불교 모두에게 중요한 교훈입니다. 

부처의 교훈적 방법론

부처는 살아 숨쉬는 본보기로도 그리고 구두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구두 지시를 내릴 때, 그는 그룹을 가르치고 있는지 개인을 가르치고 있는지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을 따랐습니다. 그룹을 앞에 두고 부처는 설교의 형태로 가르침을 해설하고, 각각의 요점을 다른 표현으로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은 그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그와 그의 승려들을 점심에 초대한 가정에서 식사 후에 개인에게 교시를 주는 경우에는 다른 접근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부처는 청자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고, 청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할 수 있도록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개선하면서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부처께서는 자랑스러운 최고위 사제계급 브라만 출신자에게 그 우월성은 출신계급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긍정적인 자질의 발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부처가 죽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기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지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받아 가지고 오면 그녀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자는 많은 집들을 돌아 다녔지만 어느 집이나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츰 그녀는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방식으로 그녀는 아이를 보다 편안하게 화장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개인의 만남에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직면 시키는 것이 반드시 최선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룹을 가르칠 때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에 대한 음모와 분파

부처가 입적하기 7년 전 질투심 많은 사촌 데바닷타는 승단의 우두머리로서 부처의 자리를 차지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자타샤트루 왕자 역시 부왕 빔비사라를 대체하여 마가다 왕국의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기에, 이 두 사람은 함께 공모했습니다. 아자타샤트루 왕자는 부왕 빔비사라의 암살을 기도했고, 결과적으로 왕은 아들을 사랑한 나머지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아자타샤트루의 성공을 보고 데바닷타는 그에게 부처를 암살해 줄 것을 부탁하지만 부처를 살해하려는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좌절한 데바닷타는 자신이 부처보다 더 “거룩하다”라고 주장하면서 더 엄격한 계율을 제안함으로써 승려들을 부처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했습니다. 서기 4세기 소승 불교의 상사 붓다구사의 《청정도론》 (Pali: Visuddhimagga)에 따르면, 승려들을 위한 데바닷타의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 누더기 조각들을 꿰매어 만든 옷을 입을 것
  • 내의, 중의, 상의 등 삼의 만을 입을 것 
  • 걸식을 위해 방문한 곳에서 결코 청식(請食)을 받지 않을 것
  •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이니 어떤 집도 거르지 말 것 
  • 걸식해 온 모든 것은 한끼에 먹을 것 
  • 발우 안에 얻은 음식만을 만족하게 먹을 것 
  • 그 외의 모든 음식을 거부할 것 
  • 숲에서 머무를 것 
  • 나무 밑에 앉을 것 
  • 주거가 아니라 옥외에서 살 것 
  • 대부분 무덤가에 머무를 것 
  •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동안 자신이 찾은 어떤 자리든 만족할 것 
  • 결코 눕지 말고 앉아서 취침할 것 

부처께서는 만약 승려들이 이 추가적인 계율 규칙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전혀 상관없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규율을 준수하도록 의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승려들이 데바밧타를 따르기로 하고 부처 승단을 떠나 그들 나름의 승단을 결성했습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데바밧타가 정한 계율 규칙은 “13 두타행”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태국에서 아직도 볼 수 있는 숲 속 사찰의 전통은 이 수행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부처의 제자 마하카샤파(마하가섭)는 힌두교 전통 편력의 행자 사두에 의해서도 준수된 이러한 엄격한 규율을 지켰던 가장 유명한 승려입니다. 이들의 수행은 부처 시대의 유행자(遊行者)의 전통이 존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승불교 에서도 십이두타(十二頭陀)라는 비슷한 구목이 있습니다. 이 목록에서는 탁발 시 어떤 집도 거르지 말라는 항목을 빼고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헌 조각을 기워서 입으라”를 넣었고, “걸식 하라”와 “발우 안에 든 음식만 먹어야 한다”는 내용이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규율의 대부분은 후에 대승불교와 힌두교 양쪽에서 볼 수 있는 마하씨다(대성취자)의 인도 전통으로 이어졌습니다. 

확립된 불교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승단을 결성하거나, 이를테면 오늘날의 표현으로 독립적인 법 센터를 결성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섯 가지의 중죄(오역죄, 五逆罪) 의 하나인 “승단을 분열시킴(파화합승, 破和合僧)”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데바밧타는 그와 같은 분열을 만들어냈고, 분리된 그룹은 그를 따라 부처의 승단에 심한 악의를 품고 비난을 퍼붓는 죄를 지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분열의 나쁜 결과는 몇 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분열에 대한 기록은 부처가 지극히 관대했고, 전혀 원리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설령 부처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부처가 정한 것보다 더 엄격한 규범을 적용하고 싶어해도 옳았고,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해도 또한 옳다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처가 가르친 것을 수행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만약 출가자가 승단을 떠나기를 원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도로 유해한 것은 불교 공동체, 특히 불교 승단에 악의를 품고 서로를 불신하고 해하게 하는 두 개 이상의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열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부 항쟁의 하나에 나중에 가담하거나 상대방을 혐오하도록 선동하는 것도 극히 해롭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룹의 하나가 파괴적이고 유해한 행위를 하거나 유해한 계율을 따랐을 경우,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그 그룹에 합류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결코 분노, 혐오와 복수에 대한 갈망과 섞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처의 입적 

해탈에 이르러 부처께서는 통상적인 제어 불능의 죽음(윤회)를 겪어야 함을 초월했지만, 81세에 그는 제자들에게 무상을 가르치고 육신을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종자 아난다에게 장수와 끝없는 설법을 간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아난다는 부처가 준 단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부처가 청했을 때만 가르침을 주고, 만일 아무도 묻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어딘가 더 도움이 되는 곳으로 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사의 존재와 가르침은 학생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쿠시나가르에 있는 춘다라고 불리는 후원자의 집에서 그가 부처와 승려들에게 제공한 음식을 먹고 부처는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부처는 임종 때 승려들에게 만약 그들이 의심과 질문이 있다면, 이제 그들의 스승이 될 그의 법의 가르침과 윤리적 규율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부처께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가르침으로부터 이해해야 하며, 모든 답을 주는 절대적인 권위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교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숨을 거두셨습니다.

춘다는 자신이 부처님을 독살했다고 생각하여 매우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아난다는 부처께서 돌아가시기 전 그가 마지막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실제로 큰 긍정적인 힘 또는 “공덕”을 쌓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런 다음 부처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특히 불교 4대 순례지가 된 땅에 있는 성유물 기념탑인 사리탑에 안치되었습니다. 

  • 룸비니(Lumbini) – 부처의 탄생지 
  • 보드가야(Bodh Gaya) –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 
  • 사르나트(Sarnath) – 부처가 처음으로 설교를 한 곳 
  • 쿠시나가르(Kushinagara) – 부처가 열반에 든 곳

요약

다양한 불교의 전통이 부처님의 삶에 다른 설명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각 전통이 부처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의 예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 소승불교(Hinayana) 에서는 오직 역사적인 부처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수행 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도 똑같이 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법을 배웁니다.  
  • 일반적인 대승불교(Mahayana) 에서는 부처는 이미 오래 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열 두가지 깨달음의 행위로 삶을 구현함으로써 깨달음이란 만인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 무상유가(無上瑜伽) 탄트라(Anuttarayoga tantra) 기록에 따르면 부처는 석가모니로 현현하여 반야경을 설하였고, 바즈라다라로 현현하여 밀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것은 밀교 수행이 중관파의 공성(공)가르침에 완전히 기반을 두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와 같이 각 부처의 삶에 대한 인식에서 많은 유용한 것들을 배울 수 있고, 다양한 수준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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