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삶을 살자
우리의 몸은 시간이 흐르면 변합니다. 우리의 의지와 수행도 신체의 변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매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시간은 늘 흐르고 있습니다. 어떤 힘도 흘러가는 시간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자기 안에서 불행을 찾아내는 데, 타인들을 괴롭히는 데 시간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데 시간을 쓰는 것은 아주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은 올바른 의도를 갖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자신의 동기와 의도를 확인하고 마음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타인을 돕는 것입니다. 돕는 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타인을 해치는 일은 삼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개인의 직업과는 무관합니다.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긍정적인 동기를 지닐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동기를 실천하며 며칠, 몇 주, 몇 달, 몇 년, 몇 십 년을 보낸다면 우리의 삶은 유의미할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지만 의미 있게 살았다면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최소한 후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건설적으로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현실적인 태도
우리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죽음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그렇다고 죽음을 적대시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물론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육신은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적입니다. 모크샤(Moksha, 해탈)를 진정 바란다면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갖고 있는 한 생사를 겪을 것입니다. 육신의 본질은 고통이며 우리는 이 고통을 멈추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적으로 여기고, 육체는 물론 우리 삶조차도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직시해야 할 문제를 벗어나고 맙니다.
죽음은 이 육신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 생에서 맺은 모든 인연과도 이별을 해야 합니다. 동물들은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죽는 것을 싫어합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죽음은 삶의 일부입니다. 삶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탄생과 죽음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의 비현실적인 사고와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걱정을 더하고, 불안감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 수행자라면 매일 죽음과 늘 변하는 무상을 숙고해야 합니다. 무상에는 두 단계가 있습니다. 발생한 것은 전부 소멸하는 거친 수준의 무상과 원인과 조건에 의해 매순간 변하는 미세한 수준의 무상입니다. 사실, 미세한 무상이야말로 불교에서 전하는 가르침의 실체입니다. 물론 거친 무상도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과 이 착각을 토대로 형성된 부정적인 감정을 줄여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명성을 떨치던 위대한 왕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과 요새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들의 왕국이 불멸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난공불락의 성과 요새를 구축한 그들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입니까?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권좌에 오른 왕들은 “나의 권력과 나의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보십시오. 수많은 이들의 고통으로 축조된 것입니다. 동독의 지도자들은 베를린 장벽을 세우며 공산 정권이 천 년은 너끈히 갈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나’, ‘나의 것’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욕구가 동기를 유발하기 때문에 욕구가 필요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지와 결합된 욕구는 위험합니다. ‘나는 영원할 것이다.’ 하는 생각은 아주 비현실적인 착각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무지가 욕망과 결합하면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냅니다. 끊임없이 많은 것을 원하고 또 원합니다. 반면, 지혜로운 욕구는 매우 긍정적인 작용하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밀교 수행을 할 때 사람의 머리로 만든 해골 잔 같은 물건들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무상함을 연상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만달라를 관상할 때 만달라 바깥에 있는 화장터를 관상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무상을 연상하도록 하는 상징물입니다. 언젠가 강의를 하는데 우연히 지나갔던 공동묘지가 생생하게 떠올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덤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누구나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부처님도 죽음을 보였습니다. 알라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호메트도 죽음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현실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먼저 죽음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에 임박해서도 덜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자라면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죽는 순간에 해야 할 일
마지막 날, 우리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낯설어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생명을 창조하셨으니 거두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죽음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처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윤회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내세를 생각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 아니라 선업을 쌓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순간, 자신이 쌓은 모든 선업을 바친다면 보다 나은 내세의 삶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지 간에 죽어 가는 순간에 정신은 차분하고 고요해야 합니다. 성냄과 두려움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교 수행자들은 가능하다면 지금부터 시간을 내어 자신의 내세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데 보리심 수행과 특정 금강승 수행이 도움이 됩니다. 금강승 가르침에 따르면, 죽음에 임박하면 8단계의 요소가 무너진다고 합니다. 금강승 수행자들은 날마다 이것도 명상해야 합니다. 저는 매일 다른 관상을 포함해 죽음을 적어도 다섯 번 이상 명상합니다. 아직 저는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벌써 죽음의 과정을 세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이런 수행법은 보다 나은 내세를 보장하는 일종의 보험 같은 방법입니다. 무신론자들의 경우,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상’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
주위에 보면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 좋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죽음이 가까워지면 하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충분히 수긍이 되는 부분입니다. 신앙도 없고, 종교도 없는 사람이라면 보다 현실적인 대상에 의지하도록 하십시오. 차분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 주위에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울고 있다면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게다가 가족에 대한 애착이 분노로 이어질 수도 있고, 죽음을 적대시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죽어 가는 사람과 가족이나 친지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저는 불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호주에는 죽어 가는 사람들과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간병하는 데 삶을 바친 수도원이 있습니다. 날마다 자비심을 실천하기 좋은 방법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요약
죽음은 결코 특별하거나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전 세계에서 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지한다면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사소한 일로 다투고 싸우는 일은 줄어들 것입니다. 대신, 최선을 다해 타인들을 돕고 최대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활용하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