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에 있는 이점을 살리다
어제 설명했듯이,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현현하고 수많은 정각자(正覺者)들이 머물렀던 특별한 땅에 있습니다. 용수 보살과 그의 정신적인 두 아들 그리고 수많은 티베트인들 또한 이곳 보드가야에서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아주 오래전에 티베트의 캄(Kham) 지방에서 이곳으로 온 상계 예쉐(Sanggye Yeshe)는 이 지역에서 승원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든 다양한 고장에서 찾아와 지혜의 가피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이 성스러운 장소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힘차고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이곳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기쁨을 수반하는) 정진과 적절한 수행으로, 우리는 보다 더 많은 긍정적인 힘(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특히 티베트에서 이곳으로 법문을 듣기 위해 오신 분들은 티베트에서의 상황이 정말 어렵겠지만 지금 이러한 성스러운 땅에 있다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더 많은 긍정적인 힘을 얻어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매우 운이 좋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번뇌 망상과 욕망, 증오가 만연한 이러한 시기에 자애와 자비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많은 부가 있어도 죽음과 늙음, 그리고 다른 근본적인 문제로부터의 자유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고통은 마음에서 오기 때문에, 부와 같은 외적인 조건으로는 고통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방법들을 따르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다양한 전통 가운데서 여러분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여기에 모인 많은 서양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불교에 대한 진실된 관심 때문에 여기에 와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명상하고, 기도를 복창하며, 수행하고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논리와 이성으로 불교에 대해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들은 먼저 그것을 분석했습니다. 이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우리는 보드가야와 같은 성스러운 땅에 있는 것이 매우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정각자들의 모든 위대한 행위와, 선한 행동, 성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건설적인 행동과 사고에 도움이 되는 이런 장소에 있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므로 가능한 한 많은 긍정적인 힘을 구축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더 많은 건설적인 일을 할 수록, 단순히 이런 특별한 장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은 긍정적인 힘(공덕)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티베트 방문에 대한 실용적인 조언
여러분이 이곳에 있는 동안에 물건을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출로 어느 정도의 이익을 얻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욕심을 부리거나 부정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탑돌이를 할 때, 잡담을 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주의와 경의를 가지고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휴지를 주변의 아무 곳에나 버리거나 함부로 용변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용변을 봐야 한다면, 그 때는 가능한 한 깨끗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티베트는 추운 땅이지만, 이곳 인도는 해발고도가 낮아 여러 상황들이 열악합니다. 그러니 아무 곳이나 더럽히지 마십시오. 책임감을 가지고 조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절을 할 때는 너무 허리를 구부리거나 펴지 않고 올바르게 해야합니다. 양손을 땅에 평평하게 유지하고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촛불 공양을 하거나 이러한 일을 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좋습니다. 훌륭합니다. 염송을 하거나, 완전히 집중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명상하십시오. 명상은 매우 좋은 본능을 만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순수한 동기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자신의 마음과 동기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우리의 번뇌 망상의 힘을 줄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의 본질입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건설적이고, 마음은 사랑으로 따뜻하고 친절하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우리가 외적인 것에 대해 교만, 경쟁, 경쟁심, 시기심으로 관여한다면, 그것은 오직 부정적인 업의 힘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과 그 일을 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항상 자신의 동기가 옳은지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동기를 설정하다
이런 성스럽고 특별한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깨달을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리심의 결의를 발전시키는 부처의 모범을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스러운 곳에서 따뜻한 마음과 큰 동기를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입보리행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코 화를 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거기서 설명되었듯이, 분노만큼 긍정적인 힘(공덕/복덕)을 파계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성을 잃고 화를 내면 안됩니다. 마음이 조잡하고 거칠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길들이고 단련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성취를 시기하는 대신에, 개개의 모두의 긍정적인 힘을 기뻐합시다. 《칠지작법》의 기도문을 염송하고 그 모든 항목에 대해 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덕/복덕을 축적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함께 공덕/복덕을 축적할 수 있다면 삶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이 가르침을 듣고자 보리심의 동기를 가지십시오. 톡메 상뽀 보살의 《보살의 37 수행법》은 처음과 실제 가르침과 끝의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실제 가르침은 람림(단계적인 길),《보리도차제론》에서 설명되었듯이 세 가지 동기 수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초급(하사)의 동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의 귀중한 삶
(1) 유가구족을 갖춘 이 얻기 어려운 큰 배(인간으로서의 환생)를 얻은 이 때 자신과 타인을 윤회의 바다에서 건지기 위해 밤낮으로 항상 게으름없이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법(부처님의 가르침)은 평안하지 않은 마음을 평안하게,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을 길들여진 마음으로 바꾸기 위한 방법론의 체계입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어떠한 고통도 원하지 않는 점에서는 같지만, 법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살펴보면, 단순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범주 또는 유전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겠지만,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유가구족을 갖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가라는 것은 여기 있는 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법을 수행할 수 있는 여유나 자유를 갖춘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올 자유가 있고 법을 수행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게 소리를 못 듣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감각 기관이 결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행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방해하는 것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팔유가(八有暇)와 십구족(十具足) 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몸을 받고 났어도 법을 수행하기 위한 자유와 독립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희귀한 기회를 얻은 우리는 아주 행운입니다. 게다가 세계에는 수많은 영적인 스승들이 있고, 부처의 모범에 따라 그 위업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유익한 영향들은 전생에 지은 비슷한 원인이 현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지금의 행운(좋은 인연)은 전생에 이룬 건설적인 원인으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회와 이러한 토대를 미래에도 다시 얻기 위해서는 지금 건설적인 원인을 축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집착, 혐오 또는 무지 없이 행동한다면, 내생에도 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현재의 기회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낙담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끼지 마십시오. 가능한 한 건설적으로 행동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건설적이고 길들여진 마음은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밭에 심는 것도 아니며, 은행에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로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에 의해 생깁니다. 우리는 명상의 체험과 안정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스승들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티베트에는 먼저 위대한 닝마파의 스승들이 있었고, 이후 아띠샤와 카담파, 샤까파 스승들과 카규파의 마르빠, 밀라레빠, 감뽀빠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 모두가 큰 어려움을 견디고 엄청난 노력을 다하여 깨달음에 이르셨습니다. 그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하고 다음과 같이 물어봐야 합니다. “지난 5년, 10년, 15년 동안 나는 마음을 길들이는 것에 관해 얼마나 진전을 이루었는가?” 실제로 약간의 개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만하지 말고 5년, 10년 동안 조금이라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단기간에 낙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제 수행은 가르침을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침을 듣거나 배울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것이 무엇이든, 즉시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문사수(聞思修)의 실천이 각각 떨어져서는 안되며, 그 중에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귀중한 삶의 활용을 위한 가장 좋은 상황
(2) 친구를 향한 집착은 물처럼 요동치고, 원수를 향한 분노는 불처럼 치솟아 취할 것과 버릴 것을 망각한 우매함은 캄캄한 어둠과 같으니, 고향을 떠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최선은 (무지와 집착의)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거나 또는 할 수 없더라도, 그 때문에 생기는 집착과 혐오를 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집착을 가지거나 혹은 적으로 증오하며 마치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있는 것처럼 “이것은 나의 조국이다. 나의 가족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착과 혐오는 파괴적인 행동을 야기하고 더 많은 부정적 힘과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들은 우리의 번뇌 망상 중에서도 최악의 것으로 모두 무명(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다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 거기에서도 집착과 혐오를 발전시킵니다.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서 집착과 혐오를 없애는 것이며, 그것들을 타인의 이익을 바라는 태도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끌리고 집착을 갖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의 행동에 사소한 변화만 생겨도 우리는 갑자기 그들을 미워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랑과 자비의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들이 나쁘게 행동하더라도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집착을 타인을 돕기 위한 자세로 전환해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의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에 크게 훌륭하거나 멋진 것도 없지만, 만약 우리가 여전히 집착과 혐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을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3) 나쁜 대상을 제거하면 번뇌는 점점 줄어들고, 산란함이 없으면 선업은 자연히 늘어나며, 우리의 마음을 맑힘으로써 법의 깨달음은 반드시 일어나니 적정처(고요한 곳)에 의지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가 번뇌로부터 멀어지고 바쁜 일로 머리를 가득 채우지 않으면, 저절로 우리는 건설적인 일(선업)로 더 쉽게 돌아설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적정처(조용하고 고요한 곳)에 사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홀로 명상을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에 대해 충분히 듣고 생각해 본적이 있어야 하고, 또 이를 집착과 혐오 없이 행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중한 인간으로의 환생을 얻었으니 지금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이 기회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삼종요도》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로 이번 생에 대한 강박적인 관심을 외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후생/내세에 중점을 두면 금생에서도 잘 풀릴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중요성을 금생에만 둔다면 훗날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생의 일에만 몰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후생을 개선하기 위해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무상(無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상
(4) 오랜 시간 함께한 친지들과 헤어져야 하고, 애써 일군 재물을 뒤로 한 채 몸이라는 숙소에서 의식의 손님이 떠나가야 하기에 이 생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가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강박적인 환생의 삼계(색계, 욕계, 무색계)에서 영원히 산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장소들을 살펴 보십시오. 위대한 아띠샤 존자와 다른 자들이 번창했던 나란다 승원은 지금은 그 폐허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것은 무상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티베트의 과거의 문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상황은 과거의 것으로, 그것들은 모두 무상하게 끝났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지나면 여기에 있는 우리들 중 아무도 살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심상속에 있는 명료함(분명한 인식)만 이어질 것입니다. 과거와 후생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것 – 부, 자산 등 여러 과거 생의 원인에서 비롯된 이 모든 것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족 등과 얼마나 가까웠던 가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와 헤어져 홀로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긍정적인 힘을 쌓은 사람은 행복을 경험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험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나”라고 하는 미세한 에너지와 의식의 연속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모두 홀로 떠나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도 죽음이 찾아오면 혼자 떠나야 합니다. 마오쩌둥이 죽었을 때 그도 홀로 갔습니다. 그의 아내였던 장칭도 그의 혁명의 동지들도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의 모든 명성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위대한 사람들조차 혼자 떠났습니다. 그는 그의 동료, 샌들, 둥근 테 안경을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간디의 기념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물질적 소유물, 친구들, 친척들 모두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모님이 주신 몸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궁탕 린포체께서 설명하신 것처럼 우리는 모두 혼자 떠나야 합니다.
티베트인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비록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때에도 우리는 아직 인간이지만, 죽을 때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지금 인간인 동안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발전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다른 생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사무색정(四無色定)을 이룬 위대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모두는 고형의 음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음식을 먹기 위해 우리는 이 생에서 무언가를 해야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완전한 강박관념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기 시간의 30% 정도를 이번 생을 위해, 70%를 후생을 위해 할애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반씩 할애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번 생에만 완전히 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절한 친구 사귐의 중요성
(5) 누군가와 함부로 친구가 되면 삼독(三毒, 탐욕, 화냄, 어리석음)이 늘어나고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는 삶이 줄어들어 사랑과 자비심이 사라지게 되니 나쁜 친구들 멀리 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후생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스스로 가르침을 듣는 것이나 가르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실로 빈약한 것이라도, 좋은 친구들의 예는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향과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일까요? 위의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쁜 친구는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여 우리를 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물론 그들에 대한 애정을 계속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그 부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6) 누군가와 가까이 하면 우리의 잘못이 줄어들고 달이 차오르듯 덕성이 증가하니 이런 훌륭한 선지식(참된 스승)을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나 좋은 구루 또는 영적 스승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그들은 우리에게 최선의 영향을 줍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에게 맞는 스승이 필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도 완전히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 티베트인들 에게는 저명한 툴쿠/환생 라마가 있지만 그들도 완전히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툴쿠로서의 칭호는 제쳐두고, 그 사람의 개인적 자격을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그때야 비로서 그 사람은 구루 또는 라마(스승)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툴쿠들이 라마가 아닙니다. 그들이 매우 광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거나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있어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돈, 유명한 이름, 명성이 누군가를 라마도 만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실제적인 자격, 그들의 공부, 수행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게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강조하셨고, 쫑카파 대사도 그러하셨습니다.
제자와 그 영적인 스승의 사이의 건전한 사제 관계는 지극히 중대한 것입니다. 스승에게 완전한 자격이 있으면, 나로빠와 띨로빠의 경우처럼 스승이 무슨 말씀을 하더라도 완전히 스승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띨로빠가 뛰라고 하면, 나로빠는 망설임없이 그것을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스승이 띨로빠 같은 수준에 없다면, 우리는 뛰거나 스승이 어떤 말을 한다 하더라도 함부로 따라서는 안됩니다. 누군가 어리석은 사람이 밖으로 나가 이 불탑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단순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중요한 점은 우리 초급의 사람들이 윤리적인 자기 규율의 튼튼한 토대/기반을 가짐으로써 그 위에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 티베트인들이 수행하는 방식은 훌륭합니다. 우리는 윤리적인 자기 규율의 토대를 가지고 그 위에 자애와 자비의 대승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정점에서 우리는 탄트라(밀교) 수행을 하는데, 여기에는 탄트라의 모든 네 가지 부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티베트인들 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모든 길을 수행하는 불교도인데, 이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수행한다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국, 버마, 스리랑카에서는 오직 계율에 의지하는 수행을 하고, 대승과 밀교의 전통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일본, 한국, 기타 지역에서는 밀교가 행해지는데 사부(事部, kriya tantra), 행부(行部, charya tantra), 유가부(瑜伽部, yoga tantra) 뿐입니다. 네 번째 부파인 무상유가부(無上瑜伽部, anuttarayoga tantra) 체계는 없습니다. 몇몇의 지역에서 공성에 대한 견해가 있지만, 유식이나 자립논증(自立論證, Svatantrika) 중관학파의 체계 뿐이고, 귀류논증(歸謬論證, Prasangika) 중관학파의 견해는 공부하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규율의 토대 없이 대승(의 가르침)이 있거나, 그 외의 곳에서는 다른 두 가지 없이 밀교의 행법만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완전한 길과 수행을 통합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만 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한 방향(귀의)
(7) 그 자신 또한 윤회의 감옥에 갇혀있는 세속의 신이 누구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곳에 의지하면 흔들리지 않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여기에서는 안전한 방향을 택하는 것 또는 귀의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럴 때는 삼보(불,법,승)의 좋은 자질(덕)에 대해서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티베트어로 부처님은 상게(sangs-rgyas) 입니다. ‘상(sangs)’은 제거되어야 할 모든 것이 제거되는 것, 모든 결함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하며, ‘게(gye)’는 모든 좋은 자질이 실현되어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 ‘Dharma(다르마)’는 유지하는 것,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누군가를 붙잡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법(다르마)을 따르는 것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법의 보물은 진정한 정지/멸지(멸제)와 참된 길(도제)의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감도는 얼룩을 멸하고, 그것을 청정한 공성의 영역으로 녹이는 것이 진정한 멸제(정지)입니다. 공성의 비개념적인 인식(직관)을 가진 마음의 길이 해탈과 깨달음으로 이끄는 참된 마음의 길입니다. 이 두가지가 바로 법의 보물들(법귀의, 法歸依)입니다.
승가의 보물은 성자를 나타내며, 이들은 공성의 비개념적인 직관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안전한 방향의 삼보(삼귀의)입니다. 부처님은 의사와 같고, 법은 약과 같은 것 혹은 더 자세하게 치유의 길과 멸제와 도제를 통해 치유된 상태이며, 승가는 도움을 주는 간호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주 작은 불쾌감 조차 싫어하며 그것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고통이 제거된 상태와 그것을 영원히 제거하는 방법이 법귀의 입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스승이 필요한데, 이것이 부처의 보물(부처님에 대한 귀의) 입니다. 그리고 도와줄 친구인 승가의 보물(승가에 대한 귀의)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를 수호해 주는, 안전한 방향을 나타내는 대상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고통에 대해 두려워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욕구도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안전한 방향 또는 귀의를 위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부처님이 고통이 진정으로 정지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그는 안전한 방향으로의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분입니다. 우리는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났으니 부처가 가리키는 삶의 안전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모든 고통이 진정으로 소멸된 미래의 결과를 얻기 위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결과적 안전한 방향(귀의)을 잡습니다. 우리는 또한 이 상태를 가져오는 삼보를 통해 지금 제공되는 원인적 안전한 방향(귀의)을 잡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인생에서 안전한 방향을 꼭 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