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사도, 상사도를 위한 마음 훈련

게송의 8에서 37까지

우리의 동기 재확인 및 검토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깝거나 멀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이것을 달성하는 최선의 길은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인간의 몸을 갖추었고, 윤리적인 규율, 대승, 밀교의 완벽한 가르침을 만났고, 마찬가지로 훌륭한 자격을 갖춘 스승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뇌 망상을 제거하고 모든 좋은 자질(덕)을 갖추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완전한 대승의 동기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나 궁극적으로 우리 스스로와 타인을 위한 모든 행복의 근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보리심의 근본이며, 누구에게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친절한 마음을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친절한 마음을 기르게 해주소서.”라고 단순히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실제로 훈련하고, 친절한 마음을 얻기 위한 여러 단계들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법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씀인 칸규르(Kangyur) 100권과 인도의 위대한 스승들의 주석 텐규르(Tengyur) 200권에 담겨있습니다. 티베트에 단계적 마음의 훈련과 태도의 가르침인 완전한 람림을 전하신 주요 스승은 아띠샤 존자입니다. 아띠샤 존자께서 지으신《보리도등론》(Tib. Lam-sgron, Skt. Bodhipathapradipa)은 《보살의 37 수행법》의 근본 경전입니다. 짧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외우고, 그 뜻을 생각하면서 여러 번 염송하고 그 가르침을 수행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귀한 인간의 몸을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 신체를 잃을 것이 확실하므로, 금생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마음을 바꾸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내생도 바꾸어야 합니다. 

이를 하려면, 우리는 먼저 죽음과 무상에 대해 생각하고, 우리가 죽을 때 삼악취(三惡趣, 지옥/아귀/축생)의 하나로 환생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옥(기쁨이 없는 세계) 혹은 아귀(배고픈 악령)를 볼 수 없지만, 축생(동물)과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학대 받고, 매 맞고, 노동을 위해 혹사 당하는지, 또 얼마나 잔혹하게 의료 실험에 사용되고, 먹는 고기 등으로 도살되는지 등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우리는 그들을 위한 친절한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 나무를 베거나 야채를 수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다릅니다. 우리는 실제로 동물의 고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도 얼마나 쉽게 동물 중의 하나로 환생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동물로 환생하는 것을 피하는 길을 가르쳐 주신 분이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입니다. 그는 행동의 인과관계의 길을 가르치고, 어떤 행동을 버리고, 어떤 것을 채택해야 하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완벽한 가르침을 최대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 하나 결점이 없으며 완전히 안전하고 건전한 삶의 방향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이야기 했듯이 불(佛) 법(法) 승(僧)이 안전한 방향(귀의)의 삼보입니다. 오직 이러한 세 가지만이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는 안전하고 보호받는 안정된 인생의 방향을 제공합니다. 세속적인 신들에게 친구로서 도움을 청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귀의를 그들에게 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태국이나 버마의 승원에 있는 승려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들의 사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시지 않습니다. 티베트의 사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불화 뿐 아니라 그 밖의 이국적인 모습의 여러 본존들을 모십니다. 일본에서는 세 명의 주요 스승의 불화 뿐 석가모니 부처상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부처를 스승들과 분리할 수 없고, 부처가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조금 다릅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주로 가피와 깨달음의 영향을 받으려 하는 대상은 석가모니 부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티베트인들이 부처를 잊고 수호존인 불화 앞에서 북이나 두드린다고 비판하지만 이 말에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이정도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승가의 보물에 관해, 태국이나 버마의 수행은 아주 훌륭합니다. 승려들은 큰 존경을 받고 이웃들과 보시에 의해 지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훌륭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실제 안전한 방향에는 부처와 부처님의 가르침 두 가지 보물 밖에 없어 승가가 무용하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승가를 잊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승려나 여승이 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성향을 확인해 보고 만약 적합하다면 승려 또는 여승으로 사는 삶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절대 승려나 여승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을 점검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승가는 모범을 보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여 짓는 업(카르마)을 주의해야 합니다. 

파괴적인 행동을 피하는 것 

(8) 극심하게 견디기 힘든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들은 악업의 과보라고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으니, 목숨을 버려야 하는 대가를 치를지라도 결코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 그것에서 선이 생기고, 악한 일을 하면 그것에서 악이 생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결과는 원인과 같은 범주를 따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고 심지어 작은 원인으로부터 광범위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끔찍한 상황도 과거의 파괴적 행동 속에 부정적 힘이 축적되면서 생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티베트에서 때때로 가뭄이 일어나 농작물을 거의 수확하지 못하거나 전쟁이나 침략 등이 일들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과거 우리의 파괴적인 행동과 긍정적인 힘(공덕)의 결여에 의한 것입니다. 과거의 행동에 의해 축적된 긍정적인 힘이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해도 좋은 조건을 조성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야 합니다. 중국에 관해서도 우리는 그들이 잘 되기를 빌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경험하는 것들은 그들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입니다. 

파괴적인 행동은 우리의 번뇌 망상에서 오고,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는 부정적인 힘을 축적하게 됩니다. 파괴적인 행동은 신체(몸), 말(입), 마음과 관계됩니다. 신체의 예로는 살생이 있지만, 사람을 시작으로 해 곤충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은 매우 부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살생만큼은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모든 중생은 동등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그 생명을 가능한 한 소중히 할 권리가 있습니다. 손가락을 가시에 찔리면 “아야, 아파.”라고 말합니다. 모든 중생이 그와 똑같이 느낍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특히 심한 일이지만, 아직도 그것을 실시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킨노르, 스피티 지역 그리고 네팔의 일부, 심지어 티베트의 몇몇 지역에서도 이것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곳 사람들은, 저 달라이 라마에게 귀의하고 있지만, 그래도 동물을 희생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나쁜 일입니다. 자비의 만트라(진언)인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면서 제물을 바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다음은 훔치는 행위(투도) 입니다. 이 또한 매우 부정적입니다. 부적절한 성관계(사음)는 자신의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인데, 그에 대해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문헌들을 살펴보면 왕실의 대부분의 불화와 싸움은 부적절한 성행위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아주 파괴적인 것입니다. 

다음은 거짓말(망어) 입니다. 이것 또한 아주 부정적입니다. 물론, 누군가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다르지만, 우리는 항상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면 불행만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탄로날까봐 항상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렇게 거짓말은 마음을 언제나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은 타인이 이간질을 하는 원인이 되는 양설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나쁜 말을 들으면 그것을 퍼뜨리는데, 이것은 매우 파괴적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고 일할 때, 서로가 자신감을 가지고 신뢰하는 것을 기반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을 보면, 모두 서로를 동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일 뿐, 밖에서는 서로 비누 한 조각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고 서로를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간질해서는 안됩니다.

다음은 다른 사람을 ‘거지’라고 부르는 등 난폭한 말/욕설(악구)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행복을 전혀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소문은 언제나 의미 없는 것들 뿐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시간 낭비입니다. 

그리고 탐욕적인 사고가 있습니다. 누군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도 그것을 가지고 싶어지고, 걷는 동안에도 우리의 모든 집중은 온통 그 물건으로 향하여 가지고 싶어 합니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벽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다음은 악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매우 부정적이어서 우리를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악의는 보통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우리 스스로를 해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악의를 품는 것은 매우 자기 파괴적입니다. 원망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모든 문제들은 자비와 자애와 인내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코 악의를 품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은 왜곡된 대립적인 생각(사견)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진리를 부정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꾸며내거나 진리가 아닌 것을 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생부터 사견까지 이러한 열 가지 파괴적인 행동을 십악(十惡) 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불리한 점을 깨닫고 피해야 합니다. 실제 수행은 살생과 거짓말 등의 결점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 의식적으로 기꺼이 노력함으로써, 자신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삼가할 수는 없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전한 방향(귀의)을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중급의 동기를 가진 사람을 위한 가르침입니다. 

해탈을 위해 힘쓰는 일

(9) 삼계의 안락은 풀잎 끝의 이슬 같아서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니, 결코 변하지 않는 수승한 해탈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삼계의 어느 곳에서 태어나든, 그것은 불타는 건물의 다른 층에 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어느 곳이나 괴로움에 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윤회(Samsara)는 제어할 수 없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존재로 마음의 혼란(잘못된 견해)이 혼동되어 괴로워하는 집합체(5온)를 말하는데, 그것은 업과 번뇌 망상에 의해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귀한 인간의 몸을 받았지만, 업과 번뇌 망상의 힘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더 많은 고통만 따를 뿐 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반복되는 틀 속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세속적인 기쁨도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표면적이고 일시적일 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쁜 환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이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의 집합(5온)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업과 번뇌 망상의 힘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혼란과 함께 얼룩진 우리의 (몸, 마음의) 집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의 5온 그 자체가 고통의 성질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고통의 근원은 우리의 번뇌 망상이며, 그 주된 것은 혐오와 집착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무명(무지), 본래의 성품(자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지만, 이는 왜곡된 견해(사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항하는 것을 기를 수 있다면, 즉 구체적으로는 본래의 성품이 존재하지 않다(무자성)는 견해에 익숙해 짐으로써 무명이 감소해가는 것입니다. 

무명의 얼룩이 마음에 감도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없앨 수 있습니다. 본질적인 성품이 있다고 이해하는 것과 본질적인 성품이 없다고 이해하는 무명은 모두 같은 대상을 향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다른 하나를 가질 수 없습니다. 무명의 대항하는 역할로써 분별지(分別智, 분별적 지각)와 공성의 지혜가 작용합니다. 이 분별지로 우리는 자신의 집착과 혐오를 제거하고 고통으로부터 해방(해탈)을 얻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착과 혐오 또는 적대감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느낌을 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을 살아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마음의 본성의 일부라면, 우리가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집착이나 적의의 느낌은 언제나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깐이라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들을 삶의 일부로, 집착과 혐오를 가지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진리를 보는 분별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본래의 성품은 독립적으로 있지 않은 것이지만(공하지만), 세속적으로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여 발생하는 것 또한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별의 지혜를 고도로 훈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그 토대로서 선정(고도의 집중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출가나 혹은 재가자로서 모두 고도의 윤리 계율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재가자의 오계(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등이 있는데 최소한 이것만 이라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도의 삼학(三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우리가 상급의 동기를 가졌을 때의 가르침입니다. 

보리심의 목표를 발전시키는 일 

(10) 시작도 없는 때부터 언제나 우리에게 자애로웠던 어머니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나만의 행복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수한 유정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허공에 두루 퍼져있는 모든 중생들이 우리와 똑같이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므로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물론 감정적인 것이고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쪽에 자기 자신을, 다른 한쪽에 다른 사람들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지만, 유일한 차이는 나는 혼자이고 다른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한 사람을 다른 사람 우위에 두는 것이 공평하거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보살들은 오직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고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은 것 이외에도, 남들을 위해 일하면서 행복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 조차 없습니다. 보살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더 행복해지는데, 그것이 또 그들을 더욱 노력하도록 격려합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불행, 불만족, 낙담 뿐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이기심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한편으로는 더욱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해서만 힘쓴다면,《입보리행론》에서도 설명되었듯이,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무엇으로 윤회 전생할 것인가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로 환생하든, 거기에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힘쓰는 것입니다. 용수 보살의《보행왕정론》에서도 똑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목적을 외면하는 것이 부처의 성품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대승불교도라고 하지만, 쫑까파 대사가 말했듯이, 대승불교도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대승불교도의 특성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위에서 도움이 될 방법을 찾고 보리심을 발전시키면 자연스럽게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는 대승의 수행과 훈련을 따라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보살이란 무엇일까요? ‘부처’라는 말에 대해 설명하였듯이, 티베트어 ‘보디(bodhi)’의 첫 음절은 티베트어 ‘장(jang)’(byang)에 해당하며 결점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음절인 ‘춥(chub)’은 모든 공덕을 성취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보디(bodhis)’ 또는 정화된 상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좀 더 낮은 단계의 아라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고차원의 부처님의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산스크리트어의 ‘사뜨바(sattva)’는 모든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고도의 정화 상태인 보디, 즉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목표가 함께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유정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는 것의 두 가지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보리심이며 우리는 이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해야하겠습니까?

자타의 교환

(11) (모든) 고통은 예외 없이 자기만의 행복을 원하는 데서 생겨나지만 원만하신 부처님은 남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셨으니,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참으로 바꾸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어떻게 모든 고통이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데서 생기는 걸까요?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소망은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여러가지 파괴적인 행동을 하도록 이끕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반면에, 부처님의 상태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서 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바라는 태도를 자신에게 관심을 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태도로 교환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통렌(tonglen, 주고 받기)으로 알려진 수행을 훈련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아 들여 그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주 유용한 관상 수행 방법으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돕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오른쪽에 두고 일반적의 형태의 이기적이고 오직 자신만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왼쪽에는 무수한 행복을 원하는 모든 유정 중생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누가 더 중요한가? 여기 있는 이기적인 사람인가 아니면 모든 중생들인가?”라고 생각하며 관찰자와 판단자로서 한 걸음 물러나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쪽이 좋은지, 어느 편에 함께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기적인 사람 쪽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모든 중생들인지, 누가 공평하게 행복할 가치가 있을까요? 이런 방법을 수행하고,《입보리행론》에서 언급된 다른 방법들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보살의 행동: 해에 대처하다

(12) 설령 어떤 이가 엄청난 탐욕에 이끌려 우리의 재물을 모두 빼앗거나 다른 이로 하여금 빼앗게 할지라도, 우리의 몸과 재물 삼세(三世) 의 미덕들을 그들에게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자, 우리는 보리심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무언가를 훔쳐간다고 화를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고 있다면, 모든 것을 타인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둑이 훔치려고 했던 것들은 이미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지금 얻었지만 실제 그것들은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서 훔쳤다고 생각하는 모든 물건과, 심지어는 삼세에 걸친 자신의 신체도, 건설적인 행위(미덕)도 모두 바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3) 우리에게 티끌만큼의 잘못이 없는데 누군가 우리의 머리를 벤다 할지라도, 자비의 힘으로 도리어 그들의 죄업을 우리가 대신 받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우리를 해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자비심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해롭게 하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14) 비록 누군가가 우리를 비방하는 말을 모든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퍼뜨려도,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답해 그들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비난하거나, 우리에 대해 나쁜 말로 험담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 대가로 어떠한 말을 돌려주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결코 심한 말로 대꾸하지 말고, 샨티데바가《입보리행론》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15) 많은 중생이 모여있는 가운데서 누군가가 우리의 감춰진 잘못을 들추어내고 나쁜 말로 (우리에 대해) 욕할지라도, 그에게 선지식을 대하듯이 존경심으로 절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타인이 우리를 모욕하거나 수치스럽게 해도, 마음의 훈련으로 배우는 태도를 정화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잘못을 들춰내고 허물을 지적해도, 그들은 사실 우리의 스승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결점을 깨닫게 한 그들에게 감사하고 경의를 표할 필요가 있습니다. 

(16) 우리의 아들처럼 귀하게 돌보던 사람이 우리를 원수처럼 여기더라도, 어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운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더욱 큰 자애를 베푸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만약 아이가 아플 때 장난을 쳐도, 아무리 나쁘게 굴어도, 어머니는 여전히 아이를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중생을 볼 때 필요한 관점입니다. 

(17) 자신과 비슷하거나 부족한 사람이 자만으로 (우리를) 멸시한다 하더라도, 스승처럼 여기어 존경심으로 우리의 정수리에 모시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 경쟁을 하려고 할 때 같은 것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인내를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입보리행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적이 없다면, 우리는 인내를 기를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가신 존재가 필요하며, 그 사람을 대상으로 인내의 태도를 기를 수 있습니다. 스승이나 부처를 대상으로 우리의 마음에 인내를 기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내를 기를 수 있는 적과 같은 대상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신문에 달라이 라마를 약한 망명자 등으로 기사를 쓰거나 부르지만 만약 제가 진지하게 수행을 하고 있다면, 그 또는 그녀에게 인내를 기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내심을 훈련하기 위해 도와주는 스승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이나 누군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은 이 스승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 적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대승불교를 수행하고 있다면, 인내심을 기르고 어려운 상황을 견디는 것이 필요합니다. 적이 없이 어떻게 대승불교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해서, 자타를 교환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많은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적이나,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법을 실천해야 하는 두 가지 중대한 상황

(18) 비록 생활이 빈곤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받으며, 혹독한 질병을 앓고, 귀신들이 괴롭혀도, 모든 중생의 악업과 고통을 우리가 받아들이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법의 수행에는 두 가지 중대한(어려운)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하나는 우리가 빈곤과 같은 매우 어려운 난국에 처해 용기를 잃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우리가 매우 편안하고 풍족하면 교만하고 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우 아플 때, 우리가 자타의 교환(주고 받기)을 훈련하면, 자신이 아픈 것이 행복이 됩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대신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19) 명성을 얻어 많은 중생이 공경하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재물이나 다름없는 부를 쌓는다 하더라도, 세속의 영광은 본질이 없음을 알고 결코 자만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극히 위험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존경받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는 매우 그것에 거만하고 게으르며 자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수행을 막기 때문에, 이런 세속적인 행운에는 아무런 본질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노와 집착을 극복하는 것

(20) 우리 스스로의 분노라는 적을 다스리지 못하면 외부의 적을 제압하더라도 다시 늘어만 가리니, 사랑과 자비를 군대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 상속을 다스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분노 이상으로 나쁜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보면 모든 것이 분노와 증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서구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는 동맹국 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적대심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그 여파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우리는 구소련이 서구 세계와 적대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전쟁이 훗날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다시 한번 분노와 증오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면,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를 제거하지 않고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발전시킬 때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과 자비의 무도를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21) 욕망의 대상은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갈망)은 늘어만 가리니, 우리의 집착과 애착을 일으키는 대상을 지금 바로 끊은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어떤 것에 애착을 가지던 간에 우리는 그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금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보행왕정론》에 나와 있듯이 결코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한 예를 생각해 봅시다. 뾰루지가 났을 때 그것을 긁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좋은 기분에 집착한다면, 우리가 계속 긁을 수록 그것은 더 악화될 뿐입니다. 결국 쓰라리고, 피가 흐르기 시작하고 감염이 되고 더 심해지게 됩니다. 최선책은 처음 뾰루지가 났을 때 제대로 치료를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면 우리는 긁고 싶은 욕구가 전혀 생겨나지 않습니다. 

가장 깊은 보리심과 공성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 

(22) 모든 현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일 뿐, 마음의 성품은 처음부터 심적 조작(희론, 戱論)을 떠난 것이니, 이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구별을 마음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는 관례적으로는 본질적인 성질(실체성)은 존재하지만, 가장 궁극적인 승의(勝義)의 시점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립논증 중관학파의 표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현현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일 뿐” 이라고 말하는데, 모든 현상은 우리 마음을 통해 축적된 업으로 생긴 것이며 이것은 마음의 장난에서 생기는 유희라는 의미입니다. 마음 본래 성품은 처음부터 극단적인 것들에서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이것’이 공성/무자성을 이해하는 의식이고, ‘저것’은 이 의식의 대상, 즉 공성이라고 따로 구분하여 마음에 적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마음을 (자성의 본질이) 절대적으로 부정되는 (무자성) 공성의 청정한 상태인 삼매를 이루는데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서 요약된 수행입니다. 

(23)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경계(대상)를 만났을 때 여름날의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진실을 볼 수 없나니, 집착과 애착을 끊어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현상이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나타나더라도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자립해 존재하지 않는 것(무자성)을 알고 집착하지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24) 갖가지 고통이란 꿈속에서 우리 자식이 죽는 것과 같은 환영을 진실로 여겨 지치는 것이니, 역경에 부딪혔을 때, 진실이 아닌 미혹하는 환영으로 보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환영으로 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세속과 승의(가장 심오한) 보리심을 개발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다음은 피안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태도의 (육바라밀)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참조: 달라이 라마 성하의 “보살의 37 수행법”에서의 가장 심오한 (승의) 보리심을 개발하는 것: Deepest Bodhichitta in "37 Bodhisattva Practices" – The Dalai Lama]

육바라밀 

(25) 보시바라밀: 깨달음을 원하는 자는 그들의 몸까지도 버려야 한다면 하물며 외부의 재물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보답과 과보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보시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보시 수행에 대한 내용입니다.

(26) 지계바라밀: 지계(윤리적인 계율)없이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니,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소망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즐거움을 열망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적인 계율을 가지는 것으로, 특히 파괴적인 행위를 피하는 계율이 그렇습니다. 그것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27) 인욕바라밀: 공덕을 쌓으려는 보살에게 갖가지 해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오히려 고귀한 보물과 같으니, 모든 이에게 분노나 악의를 품지 않고 인욕을 익히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긍정적인 힘(공덕)을 쌓고자 하는 보살에게 자신을 해롭게 하는 적은 고귀한 보물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덕분에 인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적되어 긍정적인 힘의 체계를 굳건히 하고 그것이 깨달음의 성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28) 정진바라밀: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는 성문이나 연각조차 자신의 머리에 난 불을 끄는 것처럼 애쓰는 것을 본다면, 일체 중생을 위하는 공덕의 근원인 정진에 힘쓰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건설적인 행동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기꺼이 정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소승 수행자들이 그들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면, 대승불교도인 우리는 모든 중생을 위해 더욱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29) 선정바라밀: 완전히 온화하고 침착한 상태(사마타, 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관)를 수행하여 번뇌를 완전히 극복하나니, 사무색계(四無色界)를 초월하는 선정을 기르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현교의 맥락에서의 선정바라밀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직관적인 마음의 상태(관)를 실현시키려면, 우리는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해 먼저 온화하고 침착한 상태(사마타, 지)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두 가지가 함께 하는 상태인 지관(지와 관의 합일)을 얻게 됩니다. 

(30) 반야바라밀: 지혜가 없는 다섯 가지 바라밀로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나니, 방편을 갖추어 삼륜(세 경계, 주체/객체/행)을 개념화하지 않는 지혜(무분별지)를 수행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처음 다섯 항목의 피안에 도달하려는 태도인 방편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지혜 역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지혜와 방편을 길러야 합니다. 이러한 피안에 도달하려고 하는 태도(바라밀)를 토대로 한 건설적인 행위의 삼륜, 즉 행위자, 대상, 행위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립해 존재할 수 없다(무자성)는 것을 알고 판별하는 인식(지혜)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보살의 일상 수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보살의 매일의 실천(수행)

(31) 우리의 허물을 스스로가 구별하지 못하면 수행자의 (겉)모습을 하고도 비법(非法)을 행할 수도 있나니, 그러므로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고 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의 번뇌 망상을 매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겉으로는 비교적 적절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결코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2) 번뇌에 찬 마음으로 다른 보살들의 잘못을 말한다면 도리어 우리 스스로만 퇴보할 뿐이니, 대승의 길에 들어선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이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성취했는지 등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특히 대승 불교의 수행자로서, 다른 사람의 결점이 아닌,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33) 재물이나 명예를 탐하는 것은 세간의 다툼을 일으키며 법을 듣고, 사유하고, 명상하는 수행을 기울게 하나니, 사랑하는 사람과 시주 집들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보시를 하는 시주나, 친척들 등 집에 언제나 머무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언쟁, 논쟁 등과 같은 복잡한 상황에 엮이게 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장소들에 집착 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34) 거친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보살의 행을 퇴행하는 원인이 되니, 타인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거친 말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분노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노가 거친 말로 이어질 때 특히 그 자체로 강조됩니다. 그러한 험한 말들은 우리의 공덕을 파계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며, 스스로에게 해를 초래합니다. 

(35) 번뇌에 습관이 들면 대처하여 없애기 힘드니 깨어있는 수행자들은 대처의 검인 마음챙김(억념, 憶念)과 분명한 앎(정지, 正知)을 쥐고서 집착 등의 번뇌가 생기자마자 잘라버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집착이나 증오가 생기자마자, 우리는 그 순간 바로 억념과 정지를 사용하여 그것에 대처해야 합니다. 

(36) 요약하면, 어디서 어떠한 행동을 하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잘 살피고 매 순간 억념과 정지로 남을 이롭게 함(이타, 利他)을 완성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그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번뇌 망상이 있다면 억념을 사용하여 곧바로 다양한 대항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카라반을 타고 티베트의 북쪽의 고원으로 간다면,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하며, 아무 곳이나 가지 않을 것입니다. 신중하게 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길을 잃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아무데나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37) 이와 같이 정진하여 이룬 모든 공덕은 한량없는 중생의 고통을 멸하기 위한 것이니, 삼륜이 청정한 지혜로 깨달음을 위해 회향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마지막 보살의 수행은 깨달음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이 모든 행위의 공덕을 회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문의 실제 내용을 마쳤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결론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결론

현교와 밀교의 경전과 그 밖의 논서에서 설하신 뜻을 존귀하신 분들의 말씀하긴 바에 따라서 보살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들을 이롭게 하고자 보살의 37 수행법을 엮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다양한 출처에서 발췌하고 농축하여《보살의 37 수행법》안에 담았습니다. 

저의 지성은 떨어지고 배움은 부족하여 현자들이 좋아할 만한 시가는 아닐 수도 있지만, 경전과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지하였기에 이 보살의 수행법이 실수 없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저자는 내용에 어떠한 허물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살의 위대한 수행들은 우매한 저로서는 헤아리기 어렵기에 혹여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모든 과실은 존귀하신 분들께서 너그러이 인내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회향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공덕과 승의(절대)와 세속(상대)의 수승한 보리심을 지니어, 모든 중생들이 세속과 열반의 극단에 결코 안주하지 않는 보호주 관세음보살과 같아지기를 회향합니다.
이상은 비구 톡메 상뽀께서 응윌추의 린첸 동굴에서 자기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지었습니다. 

이로써 비구 톡메 상뽀의《보살의 37 수행법》은 완결되었습니다.

톡메 상뽀의 보살의 37 수행법 원문 "37 Bodhisattva Practices" 을 듣고 읽으십시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