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오늘 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심지어 오직 법(다르마)을 들으려는 목적으로 티베트에서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 보드가야에서 보리심의 결의를 발전에 관련한 톡메 상뽀 보살의 《보살의 37 수행법》과 쫑카파 대사의 《삼종요도》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우 성스러운 땅에 있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훨씬 힘 있는 긍정적인 힘(공덕)의 자량을 쌓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힘이 가장 효과적 이려면 우리는 좀더 크고 넓은 동기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법문을 듣기 위해 참석한 여러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라마(스승)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완전히 이루신 자비로운 부처님은 서른 두 가지의 주요한 특징(32相)과 팔십 가지의 보조적인 특징(80種好), 그리고 육십 가지의 법을 전하는 소리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은 언제나 모든 현상의 근본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계시며, 그들의 본성이 공한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모든 번뇌 망상과 장애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비로운 깨달음을 완전히 이루신 부처님은 여기 보드가야에서 2,500년 전에 그의 깨달음을 설하셨고 우리는 지금 그 한 복판에 와있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전쟁, 기근, 재난 등으로 매우 어려운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전생에 축적한 선한 공덕으로 인해 우리는 그런 때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런 시련의 상황에서도 스승과 만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우리는 여기서 들은 것을 실천하고 수행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을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직접 실천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어떤 단어들을 입으로 복창하는 것으로 안전한 방향(귀의)를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말하는 것을 매일의 행동으로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르침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하고 수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선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법은 우리가 더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수행하는 다양한 건설적인 행동의 결과로 생기는 긍정적인 힘(복덕)입니다. 이것이 단지 입으로만 하는 부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천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더 많은 행복을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드가야에 있는 동안 배우는 법, 특히 대승의 가르침으로 우리 각자가 가능한 한 많은 공덕을 축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동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넓고 매우 긍정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동기 없이 수행을 한다면, 효과적이지 않으며 결코 끝까지 실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라마 에게도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라마는 명성과 존경을 얻기 위해 아만(我慢)으로 가르쳐서는 안되며, 경쟁이나 시기로 가르쳐서도 안됩니다. 그의 유일한 동기는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이곳의 모든 중생들을 존경하며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자만하지 말고, 부처님의 소중한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라마와 제자가 올바르고 주의 깊게 행동하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이며, 우리는 더 많은 긍정적인 힘을 함께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번뇌를 가지고 있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좌절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문제들을 점차적으로 해결되고, 최종적으로 번뇌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지속적으로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 마음의 성품은 이러한 번뇌에 의해 물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정화 되도록 설정한다면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마음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다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우 거칠고 다루기 힘든 사람을 조금 평화롭고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허물이 있을지라도 천천히 개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어린 아이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지성을 갖추어 갑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집을 한 층 한 층 또한 한 계단 한 계단씩 만들어 가야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걱정하지 않고, 단계적으로 하나씩 해 나가야 합니다. 다양한 공정을 거쳐서 모든 임무가 끝날 때까지 똑바로 쭉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룰 때, 이와 같은 태도를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른 동기를 세우고,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합니다. 람림 또는 깨달음의 단계적인 길에서 설명된 단계들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나아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의 대부분이 이것을 잘 알고 있겠지만,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해 저는 그것의 중요한 점들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을 길들이다
법을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의복이나 자신의 지위 또는 부를 바꾸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태도를 바꾸고 마음을 길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누구든지 간에, 세상은 나를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지만, 내 마음이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나를 법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단순히 그들이 가진 이름 때문에, 그들이 가진 직위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정신적, 감정적인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요점은 우리의 마음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하고 아무도 고통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만약 심한 두통이 있다면, 누구나 그것을 없애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체적 고통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바라는 행복을 얻고 원하지 않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한번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물을 돌보고 조련하는 것에서 행복을 얻기 원한다면, 그 동물에 맞는 단계를 거쳐야합니다. 예를 들어, 우선 먹이를 주어야 하고 무서워하지 않도록 나무라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그와 같이 단계별로 하나씩 도움을 줄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올해, 내년에 우리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는 20년 후나 또는 다음 생에도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범위를 확장합니다. 좀 더 긴 세월을 두고 행복을 얻고 고통을 받지 않는 관점으로 넓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단계를 통해서 진전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받은 지금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음식, 옷, 머무를 곳 등 몸의 편안함을 위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사실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서구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돈과 물리적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울증, 불안한 마음, 심리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등 수많은 정신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마약이나 약물 처치에 의존합니다. 비록 그들은 물리적 안락함과 부를 가지고 있지만, 이는 그들이 물리적 안락함 외에도 마음의 행복을 가장 원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부는 그것들을 모두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우 건강하고 강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불행하다면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행복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물론, 마음은 우리를 통제하기 때문에 더 중요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행복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음의 행복을 얻는 방법
그렇지만 무엇이 마음의 행복을 가져다 줄까요? 마음의 행복은 우리의 생각의 흐름을 타고 옵니다. 우리가 마음과 생각의 작용을 활용하지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양방향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분노, 탐욕, 질투 등 우리가 가장 많이 느끼는 번뇌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그것들을 더 생각할 수록 더 잦은 행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더 고통받게 됩니다. 즉, 분노가 우리의 가장 큰 번뇌라면, 우리가 화를 내면 번뇌는 커지고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더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티베트의 상황을 놓고 한탄하고 분노한다면, 그 때 우리는 행복한 것일까요, 불행한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불행해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대응하여 우리는 사랑과 자비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옵니다. 따뜻한 마음과 친절한 생각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뿌리에 해당하는 마음을 바로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집착과 분노가 클수록 우리의 고통은 더 강해집니다. 이것들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거해야 할 것들,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러워 하거나 질투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하듯이 질투의 대상 역시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질투와 시기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기 때문에, 질투와 시기가 마음에 있는 한 결코 오랫동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명예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누구도 같은 위치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젊거나, 젊음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자랑스러워 하든 결국에는 그것을 잃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존심 역시 매우 불행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당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먹고 있는 비싼 음식을 질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까요? 단지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우리의 배를 채워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티베트인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인들을 시기하고 분노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이 행복한 마음의 상태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누군가의 주요 활동이 집착과 증오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은 큰 영향력을 갖고 유명해져서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무엇을 얻은 것일까요? 그는 역사의 한 장에 자신의 이름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다 바쳐 번뇌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아무리 부유해지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더라도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보드가야에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달라이 라마와 함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이 성지에서 거지를 보고 화를 내거나, 몸이 조금 불편한 상황에서 화를 낸다면, 그때 스스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반면에, 마음을 가라 앉혀 번뇌를 줄이고 무언가 건설적인 일을 이곳에서 행한다면, 그때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이웃, 친구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화가 나서 아이를 쫓아가 손찌검을 하고, 아이가 운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화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장난치고 놀도록 둔다면,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공평과 관용이 널리 실천되고 있다면, 그 땅의 행복을 모두가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나라에게도 해당됩니다. 더 많은 번뇌와 망상은 더 많은 불행을 일으킬 뿐입니다. 반면에, 번뇌와 망상이 줄어들수록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번뇌와 망상의 불리한 점에 대해서 꽤 많이 생각하는데, 이것들이 저에게 가져오는 모든 나쁜 점과 이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의 이점에 대해서 입니다. 이것은 저의 삶에 중요성을 두고 번뇌와 망상을 줄여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그러면 덤으로 우리는 인생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음식은 더욱 맛있어 지고, 모든 것이 더 좋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번뇌 망상으로 가득하다면, 아무리 수행을 하고 염불을 해도 이들에게서 행복을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번뇌 망상의 해로움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마음이 길들여지고 번뇌 망상이 없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해집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길들이는 데서 일어나는 가장 좋은 점은 번뇌 망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생겨나도, 다음 순간 더 이상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차선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결코 화내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화가 치밀어도 마음을 길들여지면 그런 감정 상태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즉, 누군가를 손찌검하거나, 상대방에게 욕설을 하거나, 그러한 거친 반응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천천히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대항책이 점점 강해지고, 우리의 마음은 점점 길들여지고, 이 방식으로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따라서 초심자로서, 우리는 마음에 번뇌의 분노, 집착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이 생겨나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길들이면, 이것이 법의 수행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번뇌를 모두 제거하고 나면, 멸제와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법입니다.
사성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四聖諦)에는 고제, 집제, 멸제, 도제가 있습니다. 도제를 통하여, 우리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불행에 대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고통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고통의 근본은 길들여지지 않은 거친 마음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번뇌 망상입니다. 그래서 번뇌 망상은 고통의 실제 근원이자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번뇌의 힘 아래 일어나는 강한 업의 충동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뇌 망상과 업은 고통의 실제 원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어떠한 고통도 원치 않고 다만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고통의 원인이 우리의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진정한 소멸(정지)을 원하기 때문에, 번뇌 망상의 원인을 소멸하는 법계나 공성의 상태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열반 또는 진정한 소멸(멸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번뇌 망상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거하거나 그것이 생기는 원인을 멈추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이 과정은 성자의 마음의 길, 도성제라고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동안, 우리는 더 좋은 성품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번뇌와 허물을 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성품을 얻는 것이 마음의 참된 길(도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하면, 진정한 고통이 있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소멸(멸제)을 원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마음의 참된 길을 실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완전한 소멸과 평안 또는 ‘슬픔의 고통을 넘어선 상태’인 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영속되는 행복을 얻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설하신 후에 이곳 보드가야에서 그에 대한 예를 들어 설명하신 내용입니다. 사성제 중 처음의 두 가지는 실제 고통과 그 원인인 탁하고 부정한 번뇌를 말하며, 마지막 두 가지는 진정한 소멸과 진정한 마음의 길로 해방된 정화의 길을 말합니다.
법의 수행의 동기는, 예를 들어,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고 부모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단순히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을 수행하는 것은 순종적인 자녀처럼 부모의 말을 단순히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제거하기를 바라고, 그 이유에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삼보
고통을 제거하는 것에는 많은 요인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고픔이나 추위 등과 같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방법들에 의존해야 합니다. 농업이나 상업 등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배고픔이나 추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우리는 의사를 찾거나 약에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일시적인 도움일 뿐, 궁극적인 치유가 아닙니다. 아프면 좀 더 강력한 약으로 잠시 고통을 제거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늙음이나 죽음까지 없애지는 못합니다. 요컨대, 비록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는 방법은 있을 수 있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힌두교의 여러 종파나,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많은 종교가 행복과 고통을 창조하는 신의 존재를 믿습니다. 우리가 신에게 기도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처님이 설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고통과 행복은 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이라는 유일한 보물에 의지하는 것만을 인정하는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우리(불교도)는 세 가지 보물(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승가)을 인정합니다. 부처님은 인정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들에 대한 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따라서, 부처는 창조자의 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알려주신 스승과 같습니다. 우리의 업과 행동은 자신의 행복과 고통을 만듭니다. 행복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행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반면에, 불행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위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가능한 한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원인과 결과의 길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신이 아닌 우리 자신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귀의처/안전한 방향은 법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상속을 발전시켜 줄 가르침인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마음에서 번뇌 망상과 고통을 제거하여 행복을 얻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마음 상속에 이 법의 보물들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대한 예를 들어주고 이끌어 줄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승가(僧伽)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요약하면, 부처님은 우리의 삶에 두어야 할 안전한 방향을 제시하고, 법은 실제 안전한 방향으로, 승가 공동체는 법을 실천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헹복을 주고 고통을 제거해주는 유일한 신 또는 귀의한 보물은 없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
영어로 ‘religion(종교)’는 종종 티베트어로 ‘Dharma(법)’을 번역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 종교라는 단어는 창조주의 신을 받아들이라는 체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무신론이며 실제 종교가 아니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무신론자라고 말하면서도 불교는 종교이며 불교도는 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위의 개념에서 보면 실제로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맹신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탐구한 후에만 수용합니다. 가르침이 합당하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환생과 같은 현상에 대한 많은 논리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잘 검증한 후에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만약 무언가가 논리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냥 “나는 믿는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통해 분석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언가가 논리와 실제와 관련이 없다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바탕은 이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는 온전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가 말씀하신 것을 고치거나 덧붙이고 개선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약의 비유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사들은 개별적으로 환자들을 진찰하고 그에 맞는 약을 각각 처방합니다. 만약 치료에 효과가 없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잘못이 약에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약이 듣지 않는 이유가 약 그 자체가 아니라 의사의 처방이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모아놓은 삼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전의 내용을 검토할 때 출처 자체에는 혼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들 다양한 경전에 기술된 대로 하나씩 적절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승 동기를 재확인할 것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마음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가르침을 잘 듣고 그것을 적절히 하려는 동기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소승과 대승의 가르침을 모두 주셨습니다. 대승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소승에서는, 만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어도, 최소한 그들을 해롭지 않게 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들을 결코 해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경전의) 어디에도 누군가에게 화를 내야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렇죠?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우리가 자신만의 이기적인 목적을 버리고 대다수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교도의 본래 목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순수하고, 따뜻하며, 친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로서 보리심의 결의를 우리의 동기로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리심의 결의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동기와 함께, 여기 톡메 상뽀 보살께서 지으신《승리자의 아들, 보살의 37 수행법》을 들어보겠습니다.
저자의 현저한 특징
톡메 상뽀 보살은 쫑카파 대사보다 두 세대가 빠른 부똔 린포체와 같은 시기에 사신 분입니다. 그는 사캬파에서 대부분을 수행한 라마(스승)로,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타인을 돕지 않으면 그는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승려가 되어 여러 라마에 헌신해 배웠는데, 주로 두 분의 스승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현교와 밀교를 둘 다 수행하였으며, 뛰어난 학식과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였습니다.
그는 특히 보리심을 발전시킨 것으로 가장 유명하고, 이를 주로 자신과 타자를 평등하게 하여 교환하는 (자타의 교환) 가르침을 통해 시행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살을 생각하려고 할 때, 톡메 상뽀 보살은 바로 생각나는 전형적인 예 중에 한 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그만큼 위대한 분이며 특별한 분입니다. 예를 들어, 그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을 때는 누구나 조복(調伏)하고, 조용하며,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가 우리 모두를 돕기 위해 37 수행법을 지으셨으니, 우리는 이 가르침을 계속 반복해서 검토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승 수행자라고 말하면서, 실제의 대승 수행을 언제나 점검하지 않는다면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37 수행법의 관점에서 우리 스스로를 점검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실제로 취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들 속에는, 단계적인 람림의 길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동기 부여의 세 가지 다른 범위의 개인을 위한 가르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이제 이 본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가르침을 뀐누 라마 린포체 뗀진 걀짼께 전수 받았고, 그는 이것을 캄(Kham) 지방의 바로 전생의 족첸 린포체에게 받았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역사적 배경이고, 제가 가지고 있는 이 본은 제가 실제로 라사(Lhasa)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이들 가르침의 출처는 샨티데바의《입보리행론》(티베트어 sPyod-’jug,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charya-avatara), 미륵 보살의 《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티베트어 mDo-sde rgyan, 산스크리트어 Mahayanasutra-alamkara), 용수 보살의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티베트어Rin-chen ’phreng-ba, 산스크리트어 Ratnavali) 등에서 참고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첫째, 긍정적인 힘(복덕이나 공덕)을 축적하는 것
- 실제 가르침
- 결론(회향)
먼저, 긍정적인 힘을 비축하는 것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첫 인사(귀경계)
- 책을 짓고 만든 동기(편찬발서)
첫 인사
이 첫 게송은 이 두 부분의 첫 번째 부분인 귀경계(가르침의 대상께 귀의 예경하는 것)를 제시합니다.
관음보살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모든 현상은 가고 옴이 없음을 보고서도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념으로 정진하시는 최상의 스승과 보호주인 관세음보살님께 언제나 삼문(三門)을 다해 공경히 정례합니다.
여기서 예경하는 대상은 로케쉬바라(Lokeshvara) 라고 하는 관음보살(Avalokiteshvara) 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깨달음의 근본은 자비이기에,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 님께 예경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장래 산스크리어(범어)를 공부하고 만나 배울 수 있는 종자와 인연을 심기 위해서, 저자는 산스크리트어의 이름인 로케쉬바라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오체투지는 스승과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신 관음보살에 올리며, 그것은 신체, 말, 마음의 삼문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오체투지를 하는 이유는 관음보살과 같은 훌륭한 존경의 대상이 지닌 좋은 자질(공덕) 때문입니다.
이 좋은 자질이란 무엇일까요? 대승불교의 근본은 보리심의 목표(발보리심) 입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마음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섯 개의 피안에 도달하려는 태도(육바라밀)를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몸과 마음의 깨달음, 즉 색신과 법신(혹은 모든 것을 망라하는 심심한 인식신, 부처의 일체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두가지 경지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결과와 같은 종류의 범주의 원인을 축적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몸인 색신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힘(공덕의 자량)을 쌓아야 하며, 부처의 마음인 법신을 얻으려면 깊은 인식의 체계(지혜의 자량)를 쌓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두 가지 토대(속제, 진제)가 이제(二諦)입니다.
로케쉬바라는 실제로 오고 감이 없는 모든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적 진리의 속제를 검토해보면, 실제로 사물은 오기도 가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절대적 궁극적 진리인 진제를 검토해보면, 가고 오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원인은 본질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기(공하기) 때문에 - 그것들은 본질적인 존재(자성)를 결여하고 있습니다(무자성) – 그 결과도 역시 그러한 불가능한 존재 방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원인도 결과도 자성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들(인과)은 각각에 의존하여 확립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현상은 서로 의지해서 발생하는 연기법(緣起法)에 의존하기 때문에 무자성으로 확립됩니다.
용수 보살께서는 사물은 오고 가는 것도 아니며 머무는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은 오고 감이 없음을 보고서도” 구절은 공성을 의미하고, 사실 여기서 예경의 대상은 공성을 직관적이고 비개념적으로 직관하고, 이해한 사람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공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여 생기며 원인과 결과라는 과정을 반복할 뿐입니다.
번뇌 망상이라는 원인에서 고통이라는 결과가 생기며, 건설적인 행동이라는 원인에서 행복이라는 결과가 옵니다. 고통이 생기는 것은 번뇌 망상에 의존하여 비롯되고, 여기서의 예경의 대상은 이것이 모든 중생에게 해당됨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자비심을 오로지 그들의 고통을 없애고 물리칠 길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만 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방편이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함께 필요하기 때문에 이 게송에서는 지혜와 방편의 양 측면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귀경구를 통해 우리는 이 두 측면을 알 수 있습니다. 로케쉬바라는 모든 것의 자성이 공한 것을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이 무자성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이 그들의 번뇌 망상에 의해 일어나거나 생기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그들의 고통을 없애거나 사라지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십니다. 따라서, 지혜와 방편의 두 측면은 모두를 갖추신 관음보살님을 찬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공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단지 인과관계(연기) 임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을 고통에서 끌어내려 하려는 자비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책을 짓고 만든 동기 (편찬발서)
다음 게송은 책을 짓고 만든 동기입니다.
모든 복덕과 행복의 근원이신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들께서 신성한 불법을 (스스로) 성취하고 나오셨으니, 이분들의 불법의 수행법을 알고 의지해야 보살행을 할 수 있기에 이제 보살의 수행법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은 먼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보리심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깨달음을 얻으셨을 때, 그의 유일한 목표는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번뇌 망상을 제거할 필요를 깨달았고 그의 마음을 길들이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가르치셨고, 우리도 그가 하신 그대로 수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하신 그대로 수행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부처님을 복덕과 행복의 근원으로서 설명합니다.
부처님 자신도 처음부터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의 스승들에게 의존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수행하며, 그의 마음을 길들여야 했습니다. 그의 모든 번뇌 망상을 없애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그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수행함으로써, 신성한 불법을 (스스로) 성취함으로써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몸과 마음을 모두 가질 수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눈의 인식 작용(안식)이 무언가를 볼 때, 우리는 안식이 그것을 본다고 하지 않고 내 자신이 본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이 병들었을 때, 우리는 내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들이 암시하는 것은 나는 마음이거나 나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먼저 어머니의 자궁에서 형성되어 죽음과 함께 부패합니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마음이다 라고 할 때도 그것은 아마 우리의 몸에 근거해서 쓰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형태도 모양도 색깔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떠한 몸을 멀리서 볼 때, 그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오, 내 친구가 보인다.”라고 말하며 매우 행복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엄밀히 살펴보면, 그 사람은 단순히 그의 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 의사는 “몸은 괜찮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단순히 몸이 아닙니다. 미국의 몇몇 유명한 병원에서는 사람들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해 의사들이 명상 수행까지도 처방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들이 그런 종류의 비물질적인 처방전을 주는 데에는 몸과 마음 사이에 분명히 어떤 관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 ‘나’를 단순히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본성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거나 확실히 의식(인식)하고 있을 때, 우리는 “나는 그것을 알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언인지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마음의 정의는 오직 명료한 의식입니다. 그것은 어떤 색이나 모양이 있는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해보면, 어떤 맑은 공간과 같습니다. 아주 텅 빈 공간에서는 모든 현상이 사라지고, 그렇게 맑은 공간에서 어떤 것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생각이 생겨나는 첫 순간에 동시에 일어나는 기(바람)와 명점(밝은 점)들과 같은 극히 미세한 몸으로, 오직 명료한 의식의 성질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이 발생하려면,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서, 그 자체와 동일한 성질 또는 동일한 범주에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에 명료함과 의식의 원인이 되는 순간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현상이 생겨나기 이전의 순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우리는 여러 전생의 존재를 확립 또는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생/과거생이 존재한다면, 내세/후생 또한 존재하게 됩니다.
이 명료한 의식은 연속성을 가지고 내세까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양한 번뇌 망상과 고통을 만드는 원인이 되는 어둠이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분명하고 명확한 의식의 본질적인 토대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온전히 깨달으신 부처님의 일체지의 마음(완전한 마음의 상태)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마음의 토대는 깨달은 분의 마음 혹은 일체 지성의 마음의 토대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후자의 종류의 마음을 확실히 얻고 싶습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깨달으신 분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여러가지 원인에 의존하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버려야 할 것을 제거하고 (버리고) 얻어야 할 것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것을 하면, 우리는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모든 복덕과 행복의 근원이신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들께서 신성한 불법을 (스스로) 성취하고 나오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경전은 “수행법을 알고 의지해야 한다.”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법을 수행에 옮기는 것, 그리고 법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모든 것을 잘 이해하셨습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것은 출리심, 보리심, 공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매우 주의 깊고 솔직하게 살펴보고, 자신의 기질, 성향, 경향이 무엇인지 안 후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 스스로를 훈련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