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분 기도"의 해석

오늘 저녁에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평소에 하던 전행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전행 중에는 이 논서에서 파생된 칠지분의 수행이 포함됩니다. 우리가 법을 듣거나 배우기 전에 이런 전행을 행하는 것은 가르침을 적절히 수용하기 위한 마음의 상태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집에서 매일의 명상이나 법 공부 전에도 같은 수행을 합니다. 

방을 깨끗이 하고 공물을 배치하다

집에서 명상의 전행으로서 이러한 수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수업 전에 하는 것처럼 미리 방을 청소하고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류나 옷이 방 곳곳에 흩어져 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는 동안 우리는 ‘방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명료하고 깨끗하게 정리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단정하고 깨끗하며 정리 정돈된 환경에서 명상하거나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터에도 해당이 됩니다. 우리가 보는 것, 심지어 주변적인 것조차 마음의 상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주변이 지저분하면, 우리 마음 또한 난잡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공부나 명상을 하는 장소는 보기에도 아름다운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보면 대개 마음이 행복해지고, 행복한 마음의 상태는 건설적인 일을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쉽게 합니다. 주위에 보이는 것이 지저분하다면, 마음의 상태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절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방에 매력적인 제단을 준비하고 - 선반이나 책상을 깨끗한 천으로 덮고 그 위에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것, 안전한 삶의 방향(귀의)을 나타내는 부처님의 상이나 그림을 놓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스스로를 청결하게 하고 방을 청소한 후 물을 그릇에 담아 공양합니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이것은 보통의 일곱 그릇과 함께 실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깨끗한 물 한 컵만 공양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원한다면, 우리는 촛불, 꽃, 향 등을 공양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선택 사항입니다. 전통적으로 설명된 것처럼, 우리의 관상에서 부처와 위대한 스승들을 초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그곳에서 자신의 공간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느끼도록 방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명상하고, 배우고, 가르침을 듣는데 도움이 되는 마음의 상태로 이끕니다. 

호흡에 초점을 맞추다

통상적인 관습은 제단에 놓인 불상에 세 번 오체투지를 하는 것입니다. 오체투지가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것이 되는 것을 피하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적절한 상태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 우리는 호흡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동기를 재확인합니다. 우리는 보통 앉아서 오체투지를 두 번 하는데, 서있는 동안 미리 그것들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우리가 이전에 했던 일과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 사이에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태도를 일으키기 전에 마음을 조용하고 중립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눈을 우리 앞에 있는 바닥 쪽에 편하게 두고 호흡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것을 합니다. 우리가 특히 긴장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눈을 감는 것이 좋을 수 있지만, 가능하면 눈을 살짝 뜬 상태가 더 좋습니다. 

우리는 코로 정상적인 호흡을 합니다. 너무 빠르지 않게, 너무 느리지 않게, 너무 깊지 않게, 너무 얕지도 않게 숨을 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참지 않지만, 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숨을 들이쉬기 전에 약간 사이를 둡니다. 보통의 방법은 숨을 내쉬기, 멈추기, 들이마시기 주기를 하나로 하여 마음속으로 세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헷갈린다면, 들이마시기, 내쉬기, 멈추기를 하나로 셀 수 있습니다. 관례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11까지 세고, 이 11의 주기를 2~3회 반복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특히 초조하거나 혼란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만 호흡을 세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산란하지 않다면, 그것을 셀 필요가 없습니다. 호흡이 코에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에 그저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외에도 몇 번 호흡의 주기를 세고, 그 후에는 세지 않고 호흡을 계속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호흡에 초점을 맞추든 적어도 어느 수준에서의 내면의 고요함과 침착함을 얻을 때 까지 계속합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초조해지면, 우리는 결코 명상을 잘 할 수 없으며 주의 깊게 가르침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동기나 목표를 검토하다

우리의 마음이 어느 정도 차분해지면, 왜 우리가 명상하거나 공부할 것인지, 혹은 왜 우리가 다르마 수업을 왔는지를 검토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동기를 살펴보는 것인데, 불교에서 동기란 무엇을 할 때의 목표나 목적을 뜻합니다. 오늘 밤 우리는 특별한 목적없이 기계적인 습관으로 이곳에 왔습니까? 혹은 친구들과 만나서 즐거운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사교 모임으로 온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정말 무엇을 배우러 온 것입니까? 우리는 단지 지적인 호기심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은지, 아니면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온 것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왜 우리는 그것을 적용하기를 원합니까? 목표는 무엇입니까? 삶을 조금 더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입니까? 혹은 그것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를 낳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입니까? 경우에 따라 동기는 이러한 몇 가지를 조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기 위한 더 나은 기회를 얻고, 선취로 윤회를 가져오는 습관을 확립하기 위해 샨티데바의 논서를 배우기 위해서 입니까? 이와 더불어 제어없이 반복되는 모든 형태의 윤회전생으로부터 해탈을 얻기 위해서 입니까? 혹은 그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이 윤회전생을 피하고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돕기 위해 《입보리행론》에서 이것을 배우고 싶은 것입니까? 그것이 이 마지막 세 가지 동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인생에서 그 방향으로 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집에서 샨티데바의 논서를 공부하거나 그것에 대해 명상하기 전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자기 검증 절차를 따릅니다. 만약 우리의 동기나 목표가 습관에 의해 명상을 하거나, 그것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그다지 훌륭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동기를 더 건전한 것으로 바로잡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미 건설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재확인합니다. 이 절차를 따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에 참여하거나 기계적으로 명상하는 것은 쉽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얻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귀의와 보리심으로 오체투지를 하다(예배)

다음으로 우리는 ‘귀의하여 보리심’을 일으킵니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안전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목표와 소망을 재확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귀의하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문제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방향으로 가고 싶다. 나는 그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어려운 상황에 계속 있는 것이 두렵다.’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를 피하기 위해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혼란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모든 긍정적이고 좋은 자질로 채워진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정화와 성장이 법입니다. 그런 상태를 완전히 이루고 그 방향을 가르친 자들이 바로 부처입니다. 어느 정도 그런 상태를 달성한 자들 또한 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이 승가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서 가고 싶은 방향입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인생의 이 방향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는 단지 나에게 이익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 이 안전하고 긍정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간에서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이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귀의와 보리심을 재확인할 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안전한 방향으로 가는 태도나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능한 한 잘 돕기 위해 그 방향으로 완전히 갈 때, 우리는 오체투지를 합니다. 이미 앉아 있고 일어나서 실제로 오체투지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고 단순히 상상해도 됩니다. 어떤 면에서 오체투지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 방향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 이 방향으로 이미 간 자들에 대한 경의, 자기 자신에 대한 경의, 그리고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경의입니다. 그래서 오체투지는 자기 비하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즉,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귀의와 보리심으로 오체투지를 실시하는 것이 칠지분의 첫 번째 수행입니다. 우리가 수업에서 수행한다면,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앉습니다.

공양

다음은 공양입니다. 공양할 때 우리가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의 상태는 이 문맥에서는 ‘저는 이 방향으로 갑니다. 저는 제 자신을 완전히 내던질 뿐만 아니라,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제 자신을, 제 삶을, 제 에너지를 바치고 싶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 더 돕기 위해 이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정성을 바치고 싶습니다.’ 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공양을 합니다. 

비록 우리는 보통 이것을 관상으로 행하지만, 우리가 집의 명상실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는 실제로 물리적인 방법으로 공양을 드려도 좋을 것입니다. 오체투지를 한 후 앉기 전에 제단에 가서 우리의 왼손 약지를 물 공양 그릇에 담그고 물을 세 방울 튀깁니다. 이것은 공양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있지만 우리를 도와 달라고 선물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부처님이 우리를 무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생에서 우리가 지금 취하고 있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의 상태로 이것을 하려고 노력하고, 우리 자신을 바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샨티데바의 논서에 쓰여져 있는 것처럼 정성스러운 공양을 드려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우리가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물건들을 상상할 수는 있더라도, 긴 목록의 공물을 공양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주고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행의 두 번째인 공양입니다. 이 단계를 제단에서 마치고 우리는 자리에 앉습니다. 

단점을 인정하다(참회)

세 번째는 우리의 약점, 문제, 어려움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후회합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최선의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며, 자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위해 인생에서 취하고자 하는 안전하고 긍정적인 방향을 재확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샨티데바의 논서를 공부하고 그것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자신의 과실에 대항하기 위해 취하고 있는 긍정적인 행위라고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지분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문제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들을 배우고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기뻐하다(수희)

네 번째 지분은 기뻐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문제, 실수, 어려움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날 수 있는 낮은 자존감에 대항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단점을 깨닫는 것과 자신의 좋은 자질을 재확인하는 것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합니다. 우리 누구나 어떤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 해낸 어떤 긍정적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도움이 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다’ 혹은 어떤 것이든 하려 노력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기뻐합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불성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부처로) 성장할 가능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훌륭한 토대를 가지고 있고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타인의 좋은 자질과 긍정적인 행위의 다양한 예를 보며 질투심 없이 기뻐합니다. 진정으로 긍정적이고 도움이 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중에서도 특히 위대한 스승들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현존하는 영적 스승들 뿐만 아니라 부처와 샨티데바도 포함됩니다. 샨티데바가 실제로 이 논서를 쓴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적천보살님(샨티데바), 감사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가르침을 청하다(권청)

위대한 스승들의 자질에 기뻐하며 샨티데바가 이 논서를 쓴 것에 감사한 후 다섯 번째 지분의 가르침을 청할 준비가 됩니다. 우리는 ‘샨티데바여, 당신이 이 논서를 쓴 것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것에서 제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책에서 무언가를 읽거나 들을 때, 인내의 가르침에 관해 히틀러의 잔학 행위의 경우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의 오직 예외적인 것만 생각하는 태도에 대항합니다. 가르침이 타당성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을 때서야 우리는 예외가 있는지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인 예에 인욕의 가르침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지 혹은 고도의 수준에서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 때, 즉각적으로 ‘하지만’으로 대답하는 것은 무언가를 배우려는 열린 태도에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서에 대해 ‘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세요.’라는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태도로 우리는 읽거나 들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샨티데바의 본문에 있는 모든 것을 집, 사무실, 가족,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지침으로 봅니다.  

만약 우리가 명상 세션 전에 칠지분 수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명상을 통해 더욱 향상되고 싶다는 측면에서 스승과 논서에 더 많이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은 통찰과, 더 많은 이해와, 더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영감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스승에게 떠나지 말아 달라고 탄원하다(기원)

그리고 우리는 여섯 번째 지분에서 스승에게 돌아가시지 말라고 탄원할 준비가 됩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멈추지 말아 주십시오. 계속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스승에 대한 집착에서 이렇게 탄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수행에 대해 진지하고 성실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모두를 도울 수 있도록 깨달음에 끝까지 이르고 싶습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저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가르침 자체에 의지합니다 - ‘샨티데바여, 당신의 논서를 저에게 계속 가르쳐 주십시오! 저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저는 이 가르침에서 더 많은 이해를 얻고 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모두가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결코 멈추지 말아 주십시오.’

회향

마지막 일곱 번째 지분은 회향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엇을 배우든, 내가 무엇을 이해하든, 그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원인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이해가 점점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스며들어 깊은 인상을 남기고, 천천히 내가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내가 배운 것을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여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비로소 그들에게 천천히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샨티데바의 칠지분 기도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이 일곱가지 부분을 포함하는 샨티데바의 시를 동기를 설정하기 전의 절과 그 후 만다라 공양절과 함께 복창합니다.  

완전한 청정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법, 승가께 귀의합니다. 보시 등의 공덕의 축적에 의해 부처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체 모든 대지가 조약돌 한 점 없이 청정하고 어린아이 손바닥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광이 나는 주옥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계와 인간계의 공물을 실제로 나열하고, 또 마음에 그려 비할 데 없는 보현보살의 공물의 구름처럼 허공계에 널리 퍼지기를 바랍니다.

(1)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거하시는 모든 부처님들과 가르침인 법과 승가, 즉 불·법·승 삼보(三寶)께 온 우주의 원자의 수만큼의 몸을 엎드려 오체투지 올립니다.
(2) 문수보살과 다른 보살들이 승리자 부처님께 행하신 대로 저도 그와 똑같이 모든 수호자 여래와 보살님들께 공양 올립니다.
(3)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 속에서 이번 금생과 또 다른 생에서 저지른 죄업이나 타인에게 범하게 한 죄업을 무지와 미망에 지배당하여 기뻐한 일, 그 모든 행실의 과실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보호자이신 불보살께 깊이 참회합니다. 
(4) 일체 유정을 행복하게 하시려고 마음을 일으키신(발심) 공덕의 바다와 유정들을 이롭게 하시는 것들을 기쁨으로 찬탄합니다.
(5) 시방 삼세 모든 쪽의 부처님께 합장하여 기원합니다. 고뇌하고 어둠을 헤매는 유정에게 법의 등불을 밝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6) 열반에 드시려는 승자 부처님께 합장하여 기원합니다. 눈 먼 중생을 내버리지 마시고 무량겁(無量劫) 동안 머물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7) 그와 같이 이것들, 행했던 모든 것, 그것들을 통해 제가 쌓은 공덕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들을 통해 일체 유정의 모든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대지에 향수를 뿌리고, 꽃을 흩뿌리고, 수미산(四洲)과 사주와 달과 태양으로 장엄하여 불계로서 마음에 담아 공양하고 모십니다. 방황하는 자 모두 정토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옴 이담 구루 라트나 만달라깜 니르야 타야미. 귀한 상사들에게 이 만다라를 공양해 올립니다.

집중을 위한 최종 조정

우리가 발전시킨 수용적인 마음의 상태로, 우리는 수업이나 명상 세션을 시작할 준비가 거의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집중해서 듣고, 배우고, 명상하려고 의식적으로 결심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자신의 주의가 산만해지면, 우리는 그것을 되돌리고, 졸음이 오기 시작하면, 자신을 깨우려는 노력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런 결심을 한다면, 더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신의 집중과 기(에너지)를 미세하게 조정합니다. 우리가 약간 졸리거나 멍하니 있는 경우, 우리는 기를 북돋아 깨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칼라차크라의 가르침에 따라, 머리는 수평을 유지하고 눈을 위를 향하여 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다소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우리의 마음이 산란할 경우에는, 에너지가 차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머리를 곧게 유지하면서 시선을 아래로 향해 배꼽의 중간 지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평소처럼 숨을 들이마시고 가능한 한 잠시 동안 멈춘 후에 다시 내뱉습니다. 

이것으로 수업, 명상, 개인적인 불법 공부를 위한 전행의 과정이 완결되었습니다. 샨티데바 그 자신이 칠지분 수행의 이익과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제가 만난 모든 티베트 불교 스승들 또한 일상 수행의 기초로서 그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지분만으로도 충분히 일상의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행을 행할 때, 샨티데바 논서의 절을 독송할 수도 있고, 혹은 독송 없이 우리 자신의 말이나 감각만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칠지분의 감각을 느끼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느끼는 것은 마음을 명상이나 공부를 위한 유익한 상태로 만듭니다.

이러한 전행의 뒤를 잇는 실제 명상 세션을 위해, 우리는 호흡에 초점을 맞추거나 깨달음으로 가는 단계적 길(람림)의 한 주제에, 혹은 샨티데바 논서의 한 구절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전행은 우리가 실제 세션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우리의 마음이 적절히 받아들이는 상태를 가져옵니다. 전행만 실시하는 선택을 해도 좋습니다. 그 자체가 뛰어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행에 쏟는 시간은 개인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빨리 하든 느리게 하든, 그것이 의미 없는 빈 의식이 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그 의미를 유지하고 각각의 단계를 성실하게 하도록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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