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명상 자리, 예불, 좌법을 갖추어 앉다

세 번째 예비 수행은 적절한 명상 자리를 두고 좌법 갖추어 앉아 긍정적인 마음으로 귀의심(안전한 방향)과 보리심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명상 자리를 마련하다

경전에서는 가능하다면 통풍이 잘 되도록 약간 들어올려진 나무 받침대 위에 명상 자리를 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합니다. 인도에 있는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침대에서 명상을 하는데 아래 쪽으로 통풍이 됩니다. 그들은 명상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나 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쿠샤 풀잎 등을 받침대 아래에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리를 교차하여 앉는다면 다리가 빨리 저리지 않도록 다리 부위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베개의 뒷부분을 약간 높여 두는 것이 좋습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를 포함한 많은 티베트인들이 평평한 바닥에 다리를 교차하고 앉아 발이 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놀랍습니다. 저는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느낍니다. 

이와 관련된 부끄러운 일을 겪은 일화가 있습니다. 저는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누군가와 알현하는 자리의 통역을 요청 받은 적이 있습니다. 평평한 바닥에 오래 앉아있어야 했고 나중에는 두 다리의 감각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알현이 끝나면 빨리 일어나 방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저는 빠르게 일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벽을 붙들고 조금씩 움직여야 했습니다. 성하께서는 웃음을 금치 못하셨습니다. 제가 완전히 넘어져 크게 망신을 당하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리가 저리지 않도록 엉덩이를 높게 올려서 앉는 것이 좋습니다. 

이곳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많은 다르마 센터에서는 선종의 자푸(zafus) 방석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매우 두껍고 딱딱합니다. 자푸는 다리를 교차하고 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무릎을 꿇는 자세를 위해 설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자리하게 됩니다. 여기에 다리를 교차하고 앉는다면 각도가 좋지 않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상 자리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적당한 두께, 높이, 경도의 방석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다리 저림을 피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예불

앉기 전에 예를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게셰 나왕 달게는 아침에 일어나서 졸린 상태로 커피부터 찾기 보다는 첫 일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처의 상징 앞에서 세 번 예불을 드리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끝을 예불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좀비처럼 반쯤 잠든 상태로 예불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이 수행의 핵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것을 하루의 의도를 세우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하께서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첫 번째로 하루의 의도를 정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알람을 끄며 “오 안돼, 하루가 시작되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잠들기 전에 ‘아침에 빨리 일어나서 수행을 이어가거나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밤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해야 합니다. 저는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 환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밤이 지났으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제 웹사이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로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빨리 다시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즐거운 정진 수행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즐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얼마나 긍정적인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이로운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는 것이 정말로 긍정적이고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앉을 수 있는 좋은 자리가 있습니다. 앉기 전에 우리는 예를 갖춰야 합니다. 어떤 명상 세션을 하기 전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합장 

예경을 올리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소위 ‘합장(合掌)’이란 손바닥을 합쳐 엄지를 가슴 중앙에 닿도록 끼우는 것인데 이는 정(定)과 혜(慧)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우리 몸의 네 부분을 접촉하게 됩니다. 불교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든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람림 경전에서 다뤄진 것입니다. 우리는 네 곳을 접촉합니다. 

1. 머리에 돌출된 부위. 이것은 부처가 가지고 있는 머리 위에 올라온 우스니샤(ushnisha)를 얻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머리 위에 올라온 것 또는 머리뼈가 튀어나온 것과 같은 신체적 상징입니다. 저는 실제로 그것을 가진 티베트 라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양과 같은 것이 아니었기에 실로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부처의 자질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2. 그리고 우리는 이마에 닿아 백호상(白毫相, urnakesha)을 얻게 됩니다.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한 터럭이 말려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한하게 긴 띠와 같다고 하는데, 그것을 당겨내 펴보면 끝없이 뻗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우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가르침은 부처의 다양한 신체적 특징과 그것들이 나타내는 원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영적 스승에게 항상 존경을 표하고, 항상 우리의 정수리에서 그를 관상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이 앉는 단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백호상은 지혜의 제 3의 눈과 같은데, 이것은 롭상 람파(Lobsang Rampa)의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니라 미간의 상단 내 중맥이 열려 칼라차크라에서 우리가 공성의 법신을 깨닫는 곳입니다. 

3. 그리고 나서 목에 손을 대어 부처의 가르침의 자질을 얻습니다. 

4. 그런 다음 부처의 마음의 자질을 얻습니다. 

그리고 두 손, 두 무릎, 두 발, 이마를 땅에 닿게 합니다. 반드시 이마를 땅에 두어야 합니다.  

또한 그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습관을 축척하여 일종의 낮은 차원으로의 환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빨리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똑바로 서야합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똑바로 서지 않으면 등이 굽어질 거야.”라고 말하시는 것이 들립니다. 우리 모두 등이 굽는 것을 원하지 않기때문에 똑바로 섭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존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해탈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똑바로 서려고 노력합니다.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예불을 세 번 한 후에는 다시 이 부분들을 만집니다. 

일곱가지 부분과 칠성재 

우리는 땅의 일곱 부분에 닿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칠성재(七聖財)에 관해 듣습니다. 즉, 사성제에 대한 비개념적인 깨달음을 가진 성인(聖人)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7종의 재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무엇이 가장 값진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매우 흥미로운 목록입니다. 

1. 신재(信財) –  때때로 ‘신뢰’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용어의 정의를 보면 그것은 특정 사실을 인정하고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환상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토끼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주식 시장이 오르거나 내일 비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의 수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현실이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물론, 우리는 무엇이 현실인지 매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무엇이 진실인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 보아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것들 중 하나는 행동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결국 불행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구루가 그렇게 이야기 했거나, 경전에 쓰여진 내용만을 수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정말로 이것이 사실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원인과 결과 뿐만 아니라 사성제(四聖諦)에 관한 비개념적인 인식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진리를 단지 일반적인 범주의 틀과 그 범주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개념적 사고)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비개념적으로 인과법칙을 지각하는 것입니다. 인과법은 사성제의 전체 구조입니다.  

2. 계재(戒財) – 만약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행위의 인과를 진실로 믿는다면 자연히 윤리적 계율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으로, 파괴적으로, 번뇌나 무지의 영향을 받아 행동하지 않습니다.

3. 사재(捨財) – 보시, 우리가 배운 것, 가진 것 등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합니다. 

4. 문재(聞財) –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공부하고 광범위한 교육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참재(慙財) –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부끄러워하는 수치심입니다. 즉, 우리가 부정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불교, 우리가 속한 그룹, 가족 등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이것과 다음 성인의 재물은 도덕 행위의 기초가 됩니다. 

비록 이것이 아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우리 가족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술집에 가서 술에 취해 부적절한 행동을 한다면 불교에 굉장히 나쁜 평판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불교도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6. 괴재(愧財) – ‘나는 나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이런 파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기자신에 대한 존중입니다. 베를린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과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왜 우리가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지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왜 당신은 속이지 않습니까? 왜 거짓말하거나 훔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히 옳지 않은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민법이나 도덕적인 법이 있어 우리가 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자신을 아주 존중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느끼는 일종의 의식적인 자아에 대한 존중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거나, 나쁜 사람이 되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어로 자아 존중, 자존감이라고 불리는 아주 건강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형태의 자아 존중이 불교의 가르침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불성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에서 비롯됩니다. ‘나는 죄인이고.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자아상은 우리가 함양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과 능력에 대한 존중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지고 있는 단점에 대해 자비심을 가지고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나쁘거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7. 혜재(慧財) – 성하께서 항상 말씀하시듯이, 이 놀라운 인간의 지혜를 이용하여 무엇이 유용하고, 무엇이 해로운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정말로 이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이 도움이 되고 무엇이 해로운지 알려주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스스로 이 능력을 발전시키고 증진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분별의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체투지(대배)

그리고 오체투지(五體投地)가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합장때와 같습니다. 다만 일곱 군데가 땅에 닿을 때 두 손을 앞으로 뻗어 살짝 떨어뜨리고 손바닥은 땅을 닿습니다. 이런 형태의 예불은 우리가 십만배를 할 때와 같이 일련의 절을 할 때 수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자세를 취할 때 양손을 모아 엄지를 넣어 정수리에 올리고 다시 손을 바닥에 내립니다. 경전과 성하께서는 이것이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되도록 빨리 일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우리가 절을 할 때 땅에 부딪히는 원자나 입자의 수에 엄청난 수를 곱한 것이 우리가 축적한 선업과 공덕이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키가 크다면, 왜소한 사람보다 복덕이 훨씬 더 선업이 축적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여기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축적한 엄청난 양의 선업의 힘은 종종 갠지스 강변의 모래 알갱이의 수보다 많다고 비유됩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양을 형상화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나 경전은 항상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는데, 저는 사람들이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본존에게 절을 한다면, 그 양에 곱해지는 긍정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본존과 그에 따른 또 다른 특정한 양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많은 양의 소위 ‘복덕’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 저는 ‘merit’의 영어 번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점수를 쌓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어떤 특정한 불상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것을 더 좋아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35불 중 이 불상에게는 절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주는 공덕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얻는 이익이 비교적 큰 이 불상을 고르겠다. 이렇게 하면 오체투지를 덜해도 더 많은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거래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확실히 이 수행의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일을 분석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경전의 내용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방식은 먼저 특정한 가설을 세우고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모든 경전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로 시작되어, 가설이 세워지고, 그 다음에 “하지만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저런 터무니 없는 결론이 따를 것이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분석입니다. 이 방법은 불교 변론에서 사용됩니다. 한 사람이 가설을 세우고 상대는 이 가설에 모순이 있는지 찾거나 이의를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대승 경전들은 부처의 몸의 각 모공이 부처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는 무한한 세계체계(소우주)가 있고, 이 세계체계의 부처의 모공에는 체계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승의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의 마음을 확장하는 엄청난 광경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실 그렇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크기나, 우리가 고해상도 망원경 없이는 볼 수 없는 작고 멀리 보이는 별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수십억 개의 별, 더 많은 행성을 가진 은하계가 있습니다. 우주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옛 불교 문헌에서도 같은 사상을 볼 수 있는데, 부처의 각 모공에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우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교에서 가지고 있는 매우 강력한 상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우리가 오체투지를 할 때 몸이 닿는 흙의 입자의 양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흙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특히 보드가야와 같이 거대한 법회가 열리고 땅이 매우 더럽고 진흙 투성이인 곳에서 오체투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이 더러워질 까봐 예를 갖추기를 꺼리는 것입니다. 만약 땅에 닿는 것이 매우 긍정적이고 몸이 흙에 닿는 만큼의 공덕을 쌓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는 내 옷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내 손을 땅에 대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손을 씻고 흙을 털어내면 됩니다. 제 접근법이 평범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 모든 것을 매우 실용적인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에서 수천 킬로를 삼보일배, 오체투지를 동시에 하면서 걷는 순례자들이 얼마나 지저분해 질지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이 긴 여정을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수행이 가져다 주는 혜택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와, 나는 이 모든 흙만큼의 많은 선업을 쌓아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태도를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무드라 예불

무드라(수인) 예불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양손을 합장하여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하여 가슴 중앙(심장)에 연결합니다.
  • 또는 오른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안쪽으로 굽히고 네 손가락을 코 앞에 뻗어 고개를 숙여 절을 합니다. 
  • 세 번째 방법은 한 손가락을 펼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수행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닥에서 큰 절을 하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보이는 상황, 예를 들어 밤기차나 비행기 등에 타고 있다면 특정 손동작을 합니다. 또는 우리가 정말 아파서 제대로 된 오체투지를 할 수 없다면, 침대에 누워있더라도 손동작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다양한 방법들이 있고 그것은 매우 도움이 됩니다. 

유연하고 상황에 맞는 융통성이 중요합니다. 융통성 없고 완고한 수행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우리는 매우 유연하고 느긋할 필요가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든 수행을 올바르고 적절하게 수행하는 동시에 이 상황에 편안하게 적응합니다. 

제가 멋진 예를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 역할 모델은 언제나 텐자브 세르콩 린포체입니다. 저는 그와 9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탄트라(금강승)관정이나 차크라삼바라(승락금강) 관정을 받을 때 우리는 공양의 형태로 촉싱(tsog)에 예불하고 공양을 하는데, 한 달에 두 번 티베트력 10일과 25일에 이루어집니다. 어떤 서양인이 린포체에게 “우리가 티베트 장력에 접근이 어려워 언제가 정확히 음력 10일과 25일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린포체는 “서양의 달력에는 10일과 25일이 없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확한 날에 수행을 하지 않았으니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매우 유연한 융통성을 갖췄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린포체는 관정을 하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된 꽃병 대신에 우유병을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매우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스타워즈의 요다는 그의 얼굴을 모델로 하였는데 이는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느낌을 줄 것입니다. 

몸, 말, 뜻으로 예불하다

오체투지를 할 때 우리는 몸, 말, 뜻을 모두 기울여서 해야 합니다. 

몸으로 예경하다

몸으로 예경하는 것은 제가 앞에서 말한 것뿐만 아니라 법본이나 불상에 정수리를 대는 것과 같이 삼보에 대한 공경을 표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티베트인들이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을 봅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 하지 않는 경우, 그들의 스승이 경전을 자신의 정수리에 닿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1971년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비밀집회 탄트라에 대한 복합적인 의견을 전하시는 것에 참석했습니다. 당시 성하께서 얼마나 어렸는지를 감안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 심오한 논평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대략 5천~8천명의 승려들이 참석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가르침이 끝나갈 무렵, 성하께서는 높은 법좌 위에 다리를 포개 앉으시어 아주 불편한 자세로 몸을 앞으로 숙인 채로 무거운 법본을 들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 위에 법본을 닿으며 행진하는 동안 성하께서는 전혀 움직이거나 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경이로운 광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달라이 라마 성하의 자질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은 단지 언어적, 정신적 자질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체적 자질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세르콩 린포체는 그가 성하와 함께 인도의 여러 지역을 차로 다닐 때, 때로는 히말라야 산맥의 매우 험준하고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따라 12~13시간동안 이동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 성하께서 차에 내리실 때는 여전히 활력이 가득 넘치셨지만, 세르콩 린포체는 거의 걸을 수 없었고 고된 여행에 완전히 지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몸으로 예경하는 것(법본과 불상을 만지는 것)을 과시하거나 과장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가족이나 부모님과 함께 있고 그들이 당신을 이상하게 여긴다면 그들 앞에서 그것을 수행하지 마십시오. 지계의 핵심은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우려입니다. 부모님께 우리가 이상한 종파를 믿는 듯한 불교에 대한 이상한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탄트라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주 ‘비밀’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하지만, 제 생각은 ‘개인적/사적인 것’이 훨씬 더 좋은 단어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도록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손님이나 아이들 혹은 손님의 자녀들이 방문하는 방에 벌거벗은 남녀 본존의 사진이나 그림을 전시하거나, 모든 것이 보이도록 두는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상한 야한 사진’을 생각하거나 뿔이 달린 황소 머리, 화염 등이 있는 야만타카(분노존상)을 보면 악마를 숭배한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상한 생각을 하도록 벽에 이것들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수행을 개인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티베트 탕카에는 보통 수행을 하지 않을 때 내릴 수 있는 커튼이 있습니다. 만약 부처나, 중생을 제도하는 존재인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타라 등의 탕카를 걸어 둔다면 그것을 욕실에 두지 마십시오. 이는 아주 무례한 것입니다. 

말로 예경하다 

다음은 말로 예경하는 것입니다. 경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 몸에 아주 많은 머리가 있고, 각 얼굴에는 많은 입이 있고, 모든 입이 삼보를 찬탄하는 것을 관상합니다. 

저는 항상 찬탄의 개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 “오, 부처여. 당신은 정말 위대합니다. 당신은 훌륭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찬탄으로 가득한 다른 종교들을 봅니다. 말로 예경하는 것은 “오, 위대하고 심원한 부처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함의하고 있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간팔법(여덟 가지 세속적인 일들, 世間八法)에는 칭찬과 비난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완전한 평등심을 가지면 모든 것이 다 똑같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님을 칭찬할 필요가 없고, 부처님께서는 “오, 네가 나를 칭찬해주니 기쁘다. 난 훌륭하다.”라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의 이익이 아닌 우리의 이익을 위해 찬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덕을 기억하고 진정으로 큰 공경, 감사, 경모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우리 자신 속에서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탄의 요지입니다. 

뜻(마음)으로 예경하다

마음의 의미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부처, 법, 승가의 좋은 자질을 되짚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입과 얼굴 등을 관상하는 것은 그 자질에 대한 감사를 높이고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상념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또한 찬탄하여 올립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이 놀라운 자질들을 우러러 찬탄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앉는 자세: 비로자나불의 칠지좌법

다음은 자세에 관한 내용입니다. 앉은 후에 우리는 비로자나불(법신불)의 칠지좌법(七支坐法)을 취합니다. 카말라실라(연화계, 蓮華戒)의 《수습차제(修習次第)》 중편과 후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 다리 – 두 다리를 교차하여 결가부좌를 취합니다. 인도 요가에서는 이것을 연화좌라고 부르며, 불교 전통에서는 금강좌라고 부릅니다. 두 다리를 허벅지에 올려 발로 누르는 자세인데, 이것은 일종의 금강저를 형성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자세를 취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릴수록 유연성이 좋기 때문에 일찍 훈련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필요한 유일한 시간은 몸의 에너지로 원만차제 수행을 할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앉아야 합니다. 다른 경우에는 이런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고 ‘반가부좌(한쪽 발만 허벅지로 올리는 것)’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양다리를 겹쳐 앉아 평생을 보내는 라마들을 보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만약 한쪽 다리를 올려놓을 수 없다면, 간단히 책상 다리를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삶의 대부분을 이렇게 앉아서 보내온 사람들을 보면 다리가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이 다리를 내려놓으면 발은 열린 자세로 바깥쪽으로 향합니다. 일본인들은 발을 밑에 깔고 앉아 안쪽으로 향하게 합니다. 일본인들은 서 있을 때 발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변형되었기 때문에 그 자세를 보면 일본인들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자세, 걸을 때 어려움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 발은 바깥쪽으로 향해 있어 똑바로 걷기가 매우 어렵고 불편합니다. 사실, 이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제를 일으키는데 많은 노인들이 무릎에 이상을 겪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이런 자세를 취합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도 무릎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상당 부분을 이 자세를 취했던 노인들, 연륜이 있는 명상가들, 교사들은 나이가 들어 다리를 포개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강의를 듣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저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따라서 티베트인들은 이 점을 전혀 강조하지 않지만, 많은 명상을 하고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면 신체 운동으로 함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자세가 있는 반면 일본인들은 그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리를 깔고 앉고, 태국인들은 다리를 옆으로 해서 앉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다른 자세들이 있습니다.  

2. 손  – 좌우 두 손을 허벅지에 포개어 왼쪽 손바닥은 아래, 그리고 오른쪽 손바닥은 위로 보도록 하고 두 엄지손가락을 자연스럽게 맞댑니다. 어떤 사람들은 손바닥을 허벅지에서 들어올리기도 하는데 이는 어깨 근육을 팽팽하게 해서 시간이 지나면 굉장히 뻐근해 집니다. 손을 허벅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3. 척추  – 척추는 곧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히 결가부좌 자세를 취한다면, 우리의 척추는 자연히 곧게 펴질 것입니다. 우리가 평평하게 앉으면 등을 똑바로 펴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치아, 입술, 혀 –  네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신 것처럼 이를 꽉 물어서는 안됩니다. 입술도 오므리지 않고 편안하게 둡니다. 혀는 위쪽 두 앞니의 잇몸 뒤에 입천장에 가볍게 붙입니다. 이는 침 분비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침이 계속 흘러 보기 좋지 않습니다. 계속 침이 분비되면 계속 삼켜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산란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침의 분비를 최소화하여 우리가 삼키는 양을 줄일 것입니다. 

5. 머리 – 약간 턱을 당겨 아래로 기울이지만, 완전히 아래로 기울이거나 위로 향하게 하지 않습니다. 너무 머리를 내리면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6.   – 항상 두 눈을 반쯤 감고 코끝을 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을 모아 교차하여 코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눈은 앞을 향해 바닥으로 눈을 내려 한 점을 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을 감고 명상하지 않는 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물론 눈을 감으면 외부의 방해를 차단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만, 졸리거나 잠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우리가 눈을 감으면 내적 방해가 생겨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만약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우리가 눈을 감을 때 약간의 섬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내면의 산만함으로, 특히 집중력을 높이려고 할 때 명상을 하는 동안 눈을 감고 있지 않음으로써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더 일반적인 요지는 만약 우리가 진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눈을 감아야 한다면, 일상 생활에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누군가를 위해 자비심을 느끼기 위해 눈을 감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경전에서 이 주장을 본 적은 없지만, 저는 이것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7. 어깨 – 어깨를 구부리지 않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어깨는 바짝 당겨져 올라가고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만약 낮 동안이나 대화 중에 양 어깨가 움츠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편안히 내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얼굴 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표정에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데,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화를 함께 하고 있지 않더라도 얼굴을 찡그리고 이마와 눈, 입이 늘 긴장해 있습니다. 이 근육들을 풀어보십시오. 근육이 이완될수록 우리의 마음도 이완됩니다. 어깨를 펴십시오. 만약 우리가 표정이 없는 사람 중 하나라면, 그것이 마치 서커스처럼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흉내를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 인간적인 면을 보이도록 노력해 봅시다.    

또한 저는 여러분을 잘 모르지만, 만약 컴퓨터 마우스를 이용하고 이렇게 팔이 높이 들려 있고, 특히 자리가 낮고 책상이 높다면, 그것은 어깨와 목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줄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의자를 조금 높여 마우스를 사용할 때 팔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8. 호흡 – 과호흡을 하지 않고 코로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데, 너무 빠르게도 너무 느리게도 하지 않습니다. 

그 후 호흡 운동을 합니다. 호흡에 집중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 코에 집중하고, 만약 조금 답답하다면 숨을 쉬는 것에 조금 더 집중합니다. 
  • 또는 배꼽 아래쪽으로 복부에 안과 밖의 호흡에 집중할 수 있는데, 특히 스트레스를 받을 때 더욱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또한 호흡을 세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세는 연습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11, 7, 21까지 셀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 숫자를 사용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9번의 호흡 주기가 있는데 이 수행은 매우 복잡한 관상을 동반합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많은 대중에게 이것을 설명하실 때, 관상 부분을 완전히 제외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관상에 너무 집중한다면 이 목적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아, 관상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 맥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지?” 등으로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긴장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밀교 관상에서 죽음의 과정을 관상하는데(본존으로 시작하여 다른 것 등으로 이어지는), 성하께서는 우리가 대단한 수행자가 아니라면, 죽을 때 이것을 잊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긴장하여 화가 날 수도 있고, 관상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어떻게 관상을 해야 할까? 그것은 이러한 모습일까?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매우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성하께서는 우리가 죽을 때 보리심에 집중하여 ‘내가 법도에 계속 머무르기를. 내가 일체중생을 돕고, 영적 스승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라고 바라는 것이 더욱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관상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단지 그것에만 큰 의미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관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주된 초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9번의 주기의 호흡에 대해 성하께서 어떻게 설명하시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손을 무릎 위로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해 주먹을 쥐어 겨드랑이를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쪽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막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서 다른 콧구멍으로 숨을 내쉽니다. 같은 손으로 이를 세 번 반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손을 번갈아 가면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 산만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합니다. 그리고 양손은 다리에 주먹을 쥐고 양 콧구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며 복잡한 관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수행의 요점은 중립적이고 명시되지 않은 상태로 마음을 이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발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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