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불교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라면 ‘사성제’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가장 먼저 사성제를 말씀하셨고, 불교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가르침이 사성제입니다. 과거, 부처님께서 계셨을 당시 인도에는 이미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주 광범위한 영적 가르침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자로서 불교를 공부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종교와 사상, 불교의 특별함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사랑과 배려, 비폭력 등 타 종교들에서 전하는 공통된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사랑과 배려를 키우는 다양한 방법들이 불교에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배우기 위해 불교를 반드시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불교에서 가르치는 사랑과 배려의 방법들을 통해 내면의 사랑과 배려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이가 “불교의 특징은 뭔가요?”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네 가지 진리’에 대해 살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에도 다른 종교와 유사한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사성제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라고 번역합니다. ‘성스러운’이라는 단어가 ‘중세 귀족’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성스럽다는 것은 고도로 깨달은 분들을 의미합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실상을 직접 본 분들에게 진실로 여겨지는 네 가지 사실입니다. 네 가지 진리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며, 그 중 대다수는 그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고성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통(고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삶은 고통 뿐이며, 평범한 행복이라고 여겼던 것마저 일련의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통”은 “둑카”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쑤카-행복”과 “둑카-불행”이 있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카”는 공간을 의미하고, “두”는 접두사로써 이 단어는 불만, 불쾌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는 “나쁘다.” 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편협된 방향성을 지니게 합니다. “둑카”라는 의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우리의 마음 또는 일반적으로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과 삶이 불편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편한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유형의 고통은 아픔, 불행, 슬픔과 같은 ‘감각적인 고통(고고)’입니다. 우리 모두 감각적인 고통이 고통임은 알고 있고, 동물들도 알고 있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매우 불편한 상태입니다. 우리 모두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불교와 타종교는 말합니다. 두 번째 유형의 고통은 ‘변하는 고통(괴고)’입니다. 변하는 고통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행복이 고통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상의 행복이 왜 고통일까요? 왜냐하면 일상의 행복은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변합니다. 만일 오늘 경험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초콜릿을 먹어서 행복하다면, 더 오래 먹을 수록 행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러분의 손을 몇 시간째 쓰다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좋았던 감각은 사라지고 손은 불편해지고,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행복은 영원하지 않고 변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행복조차 충분히 누려 본 적이 없고, 절대 만족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순간은 아니더라도 조금 지나면 우리는 더 많은 초콜릿을 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식을 얼마나 먹어야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까요? 매우 흥미롭지 않나요? 정작 한입만 먹어도 충분하지만, 우리는 더 많이 먹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평범한 행복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불교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들이 세속적인 만족을 초월한 영원한 행복이 있는 낙원을 찾으라고 가르치지만 그것도 불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세 번째 유형의 고통은 불교에서만 언급하는 고통으로 ‘모든 곳에 만연한 고통(행고)’이라고 합니다. “모든 곳에 만연한 문제”라고도 합니다. 이 고통은 우리의 삶 곳곳에 만연해 있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윤회하게 하며, 우리가 매순간 경험하는 모든 행불행의 근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고는 여러 형태의 몸과 정신으로 끊임없이 태어나게 하여 생로병사를 경험하게 하며, 첫 번째와 두 번째 고통을 겪게 하는 바탕입니다. 이는 내생과 관련이 있으므로 다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물론 윤회에 대한 언급은 인도의 다른 철학에도 있었고, 부처님께서 새롭게 언급한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의 그 어떤 철학보다도 윤회의 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셨고, 심오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의 원리와, 생로병사로 인해 우리가 어떤 행불행을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집제)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모든 고통의 ‘원인(집제)’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알기 위해 환생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부처님께서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말씀하신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야기 한 고통과 평범한 행복은 전부 원인으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부처님께서는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셨습니다. 행복과 아픔이 마치 보상과 처벌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의 진정한 원인은 자기 자신이 행한 선하고 악한 행동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행동이란 어떤 것일까요? 단지 해를 입히는 것일까요? 해를 입힌다는 것은 남을 해치는 것과 나를 해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하는 행동이 해가 될지, 도움이 될지는 사실 알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에게 큰 액수의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알고 그 돈을 훔치고자 그를 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를 돕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도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런 행동은 자신을 망가지게 하는 악한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은 전부 부정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부정적인 감정, 즉 번뇌는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고, 자제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성냄, 탐욕, 애착, 질투, 교만과 어리석음 등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이와 같은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의 행동과 말은 거칠어지고, 결과적으로 불행해집니다. 즉시 불행해지지는 않을지라도 장기적인 불행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감정은 부정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우리에게 있습니다. 선한 행동은 사랑, 자비, 인욕 등의 마음이 동기가 된 행동들입니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행복해집니다. 마음은 차분해지고 온화해집니다. 자제력이 강해져서 어리석은 행동과 말을 하지 않고, 그로 인해 악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즉각적인 효과가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장기적인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긍정적인 결과가 즉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실상을 알지 못하고, 나와 다른 이들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누군가가 부여해 준 보상과 처벌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법칙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원인과 결과의 바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지함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지함입니다. 우리는 ‘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라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슈퍼마켓에 가서도 ‘내가 맨 앞에 서야 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줄을 설 때도 맨 앞에 서려고 욕심을 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이 계산하는데 너무 느리고 지체되면 그들에 대한 좋지 못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더라도 그 밑에는 “나”라는 무지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면서, 또는 어떤 대가를 위해 다른 이들을 돕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적어도 나에게 고마워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다른 이들을 돕는다면 스스로 행복할지는 몰라도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복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불편한 감정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관점에서 이생의 이러한 모습과 태도는 그대로 내생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내면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 무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너무 사랑할 때는 그의 장점을 너무 과장해서 생각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할 때는 그의 단점을 너무 과장해서 생각합니다. 어떠한 장점도 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조사하면 할수록 우리의 경험 아래에는 끊임없는 어리석음과 혼동이 있습니다.
좀더 자세히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리석음의 바탕은 자기 자신의 한계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몸과 마음에는 허물이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나 외에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머리 속에서 들리는 소리가 ‘나’ 인 것 같습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내 자신의 실체라고 느껴집니다. 매우 이상합니다. ‘언제나 나는 선두에 서야해. 이걸 해야 해.’ 라고 항상 불평하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걱정 근심 고통의 주체입니다.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좀더 특별하고, 유일하며, 독립적인 존재로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감으면 아무도 없고, 오직 ‘나’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매우 몽매한 생각입니다. 분명히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이들과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동일한 인간입니다. 추위로 얼어붙은 남극에서 수십만 마리의 펭귄들이 함께 모여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무리 중에 뭔가 특별한 한 마리가 있을까요? 사실 모두 같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펭귄들에게 인간은 아마도 다 똑같아 보일 것입니다. “나는 매우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하고 유일하다.” 라는 생각이 바탕이 되면, 본인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을 때마다 화를 내게 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의 하드웨어는 기본적으로 ‘무지함’이라는 부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머리 앞쪽에 달린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합니다. 눈 앞에 있는 것만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무엇이 있었고, 이후에 무엇이 발생할지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잘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나이로 인해 청력이 떨어지고,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잘 듣지 못해 놓고는 상대방이 말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되려 화를 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도처에 만연한 고통, 즉 윤회하는 고통으로 인해 생로병사의 몸과 마음을 받아 매번 태어나고 태어나기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무지함으로 인해 윤회합니다. 그리고 무지함으로 인해 우리는 부정적으로 행동하고, 긍정적인 행동을 해도 늘 세속적이며 계산적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또다른 불행과 세속적 행복을 만들어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면 더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무지함으로 인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해서 태어나 고통을 겪습니다. ‘무지함’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진정한 원인입니다. 무지함을 영어로 “ignorance - 어리석음” 이라고 번역합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보통 ‘어리석다’라고 하면 ‘바보같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어리석음은 그런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무지’ 즉 ‘알지 못함’이란 나와 모든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진정한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상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주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모순입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함께 있고, 우리 모두 고통을 원치 않고 행복을 원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바보 같아서 모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끔 유도합니다.
진리를 직접 깨달은 성인이 보는 “네 가지 성스런 진리”와,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이 보는 “네 가지 성스런 진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지함으로 인해 분별하고, 그로 인해 대상을 차별합니다. 분별망상으로 대상을 왜곡되게 보고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능에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난 뭐든 할 수 있어야 해, 모든 이가 나를 좋아해.’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반대로 ‘나는 나쁜 사람이라서 모든 이가 싫어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고 믿기도 합니다. 이런 점들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차이가 없습니다. 무지함이 고통의 진정한 원인입니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멸제)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소멸(멸제)’입니다. “끊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무지함을 멈추고 끊어서 다시는 무지함이 생겨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무지함을 제거한다면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고통, 행불행,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복해서 태어나는 윤회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무지를 끊으면 해탈이라는 경지를 성취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samsara-삼사라”는 윤회입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업과 번뇌로 인해 반복적으로 태어나 생로병사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nirvana-니르바나”는 고통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 계셨을 당시, 인도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윤회는 당시 인도 철학의 일반적 논의 주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른 인도 학파에서 윤회의 진정한 원인을 깊이 파악하지 못하였음을 보셨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상에 태어나고, 무수한 겁을 천상에 머물렀다고 해도 업이 다하면 다시 하계로 떨어져 고통을 겪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윤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다한 ‘진정한 소멸’에 대해서 일러주셨습니다. 내면의 무지함을 제거하면 다시는 분별망상이 생겨나지 않고, 그로 인해 업과 번뇌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함은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해와 확신이 없으면 계속 의문을 갖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무지함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에 의문이 없으시다면 그냥 아무 말 말고 상황을 받아들이고는 최선을 다하십시오. 많은 의사들이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자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약을 드시라.” 라고 권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도제)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깨달음의 길(도제)’입니다. 도제는 세 번째 진리인 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깨달음의 길(도제)이란, 우리의 내면이 성숙되어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pathway mind-마음의 길”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무의미한 것들을 떠올립니다. 무의미한 것을 떠올리는 것에는 여러 수준이 있습니다. 정신분열이나 편집증과 같은 극도로 심각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고 망상합니다. 미미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 보는 초콜릿 케익을 보고는 ‘너무 먹고 싶다. 이건 얼마나 맛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엔나를 경유해서 부쿠레슈티로 갈 때였는데, ‘비엔나 사과로 만든 슈트루델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공항에서 한 조각을 샀습니다. 기대했던 것처럼 맛있지 않았고,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사과 슈트루델은 맛있다는 생각은 제 생각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슈트루델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는 것은 저의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입니다.
그와 같이, 저도 존재하고 여러분도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실재하는 것은 없다.’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생각대로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실제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이 각각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형성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물들은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발생하고 매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다른 이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시간 맞춰 나갔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한 친구들이 시간 내로 도착하지 않았고, 나는 슬슬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 험담하며, 실망하고,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교통체증이나 회사의 갑작스런 업무, 그 밖의 다른 일은 나와 약속한 이들에게는 해당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착각합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왜곡된 분별 망상을 신뢰하고, 다른 이들에게 화를 내고 악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후에 지인을 만나도 선입견으로 인해 화를 내거나, 욕을 하거나, 짜증을 내면서 늦게 온 이유를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정말로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일하고, 독자적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현실에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같이 실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공성” 또는 “공”이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공성은 “제로” 즉 “없다”는 것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새로 사귄 남자, 여자 친구를 동화에서 나오는 백마를 탄 왕자님과 공주님처럼 상상하지만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런 사람을 꿈꾸며 상상합니다. 그리고 사귀는 사람이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금방 실망해서 헤어지고, 또다른 사람을 만나다가 결국엔 전혀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길은 이 모든 것이 전부 무익하고 의미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실제 존재하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왜곡된 분별 망상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고통을 겪습니다. 진정한 길, 즉 도제는 모든 것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별로써 보고 생각하는 현실과, 실제 현실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지함으로 인해 분별 망상이 생기고, 분별망상으로 보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올바른 사유란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실제 현실과 일치하거나 달라야 합니다. 두 가지 모두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 또는 “아니오” 라는 대답 중에 뭐가 더 강하게 끌리는지 분석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예” 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으므로 명백하게 “아니오”입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다른 이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나요? 물론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건 어이가 없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조사하면 할수록 머리 속에 떠오르는 “나”에 대해서 의문이 드실 겁니다. 여러분의 뇌를 분석한다면, 뇌의 어느 부분에 “나”가 있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까? 무슨 상황이지? 수많은 분석을 해도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나”는 기능을 하고, 나는 일도 하고 말도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인하는 것은 뚜렷하게 고정되어 존재하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와 분석을 통해 이러한 “나”는 존재할 수 없고, 무지함이 모든 것을 실재한다고 보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어떠한 논리로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실제 존재한다는 생각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의 결과는 어떨까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내 생각처럼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어떤 것은 실제 존재한다.’라는 생각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바른 이해는 잘못된 이해를 제거하고, 대처합니다. 우리가 늘 바른 이해에 집중한다면, 무지함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실상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잘못된 이해가 제거되고,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가르침은 인도의 다른 철학에서도 언급된 것으로, 불교만의 유일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지의 가장 미세한 습기마저 완전히 제거하는 특별한 깨달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내면에 올바른 사유가 구축되고, 무지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의 올바른 집중력을 얻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인도의 모든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수행법을 전부 경험해 보셨습니다. 이 모든 수행법을 통해서 고통의 씨앗을 제거하는 멸제를 성취할 수 있고, 고통을 뿌리째 제거하게 됩니다.
실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거하게 하는 힘은 내면의 바른 동기입니다. 바른 동기로부터 사랑, 자비심과 같은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모든 이들이 상호 의존해서 존재하고, 내가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듯이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같이 고통 받는 이들을 온전히 돕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무지함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사성제를 좀더 자세하게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과 업을 어느정도 이해해야 합니다.
요약
불교는 다른 주요 종교 및 철학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우리의 존재 방식과 우리가 겪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의사로 비유합니다. 의사가 환자가 아프다는 것을 알듯이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가 온갖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가 환자의 병의 원인을 추적하듯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실상을 바르게 알지 못한 무지함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의사는 환자에게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치료가 가능하면 약을 처방해 줍니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고통을 제거하는 멸제를 성취하는 방법을 바르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약을 먹고 안 먹고를 결정하는 것은 환자 본인에게 달려있듯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길로 나아가는 것도 개개인에게 달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