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입문하기 전에 참고해야 할 조언

불교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겪는 문제를 대처하는 실질적인 해결 방법을 알려줍니다. 불교는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강박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혼란스런 생각과 비현실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문제의 원인을 직시하게 합니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오랜 기간 길들여진 잘못된 사고와 행동을 고쳐나가고,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아 일상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불교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불교 가르침과 수행을 의미하는 ‘다르마-법’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다르마’는 ‘예방하다’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 단어입니다. 문제를 피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르마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의도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 예방법에 관심이 생겨납니다. 실제로 많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퇴근 후에는 피로감에 게임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설령 문제를 보았더라도 대부분의 삶이 너무 우울하기 때문에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확인하고,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만족스러운 상황과 원인

물론, 불만에도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기분이 우울해지지만 때로는 상황이 좋아져 기분이 좋아지기도 해. 괜찮아. 인생이 다 그렇지.’라고 이 상황에 만족한다면 괜찮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그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찾으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너 때문에 내 입장이 난처해져! 내가 원하는 데로 네가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야.’ 또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정치와 경제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일부 심리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어린 시절 우리가 겪은 트라우마가 오늘날 우리가 지닌 문제를 야기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불행을 다른 이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쉽습니다. 다른 이들이나 사회, 경제적 요인 탓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 해결책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개념적 틀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인내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유익함을 얻게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법만으로는 심리적 불안과 불행을 해소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문제의 근원은 다른 이들과 사회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삶이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황에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마다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나 자신만을 봐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문제의 원인이 오롯이 외부에 있다면 우리의 반응 역시 늘 한결 같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 직장에서 즐거웠다면 우리의 기분도 한결 편안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근본 문제와 원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외부 상황으로 인해 심적인 부담감을 더 느낄 수는 있지만 우리가 겪는 고통의 근본 원인과 조건은 아닙니다.

나 자신을 살펴보면 나와 나의 삶, 나의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가짐이 자신의 감정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즐거운 하루를 보낸 날에는 나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좋지 못한 하루를 보내면 자신을 연민하기 시작합니다. 삶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 하나로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좀더 깊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태도는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무지함(어리석음)입니다 

내면의 어리석음을 조사하면, ‘원인과 결과에 대한 어리석음’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그리고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지합니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고, 결혼은 또 어떻게 해야 하며, 자녀는 가져야 하는지 등 많은 것에 혼란스러워 합니다. 부부가 된 후의 결과를 우리는 예측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상하고 선택한 결과는 희망이나 두려움 그리고 편집증 때문에 생겨난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마치 동화 속 이야기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또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외면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감정적으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불쾌한 상황에서는 소리를 지르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나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할 지에 대해 무지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생각한 데로 전부 말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점을 보러 점집을 찾아갑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통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좀더 깊은 수준의 어리석음을 설명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세상의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지 못함을 ‘어리석음’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문제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소장한 컴퓨터를 다른 이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면 절대 남들과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발생하게 되고 우리는 화가 납니다. 항상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현실은 아주 복잡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다른 많은 일들이 전부 원인이 되어 결과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완전히 통제할 수 없거나 외부에 의해 조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결과를 발생하게 하고 영향을 입히지만 그렇다고 결과가 발생시키는 유일한 요소도 아닙니다. 

우리의 무지와 불안감으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러한 감정들이 부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부정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는 우리가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 그리고 강박관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입힐 뿐더러 자기 자신을 학대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만일 우리가 문제가 줄이고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한계의 원인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방법

우리가 문제의 원인이 무지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난 정말 혼란스럽다. 엉망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뭘 해야 할까요? 강좌나 센터에 들어가서 돈을 쓰기 전, 마음의 혼란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혼란을 제거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혼란을 없앨 수 있다는 확신은 없고 희망만 가지고 있다면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그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얻는 여러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할 존재가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전능한 분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고 의지하고 신자가 됩니다. 또는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적 스승, 파트너, 또다른 누군가를 찾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미성숙한 행동을 하기 쉽습니다. 종종 우리는 의지할 존재를 찾기 위해 너무 필사적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무지함에서조차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의지할 존재로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는 부정적인 감정과 마음가짐으로 인해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하기 때문입니다. 절대 안정적인 길이 아닙니다. 단지 영적 스승을 찾는 것으로 자신의 무지함이 사라질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만이 나 자신의 무지함을 알고 무지함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가 건전한 경우에만 스승과의 관계에서 유익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스승과의 관계가 건전하지 못하다면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스승과 벗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스승과 인연이 생기면 우리의 어리석음을 서서히 줄어듭니다. 반대로 스승의 허물을 보고, 스승이 나를 혼란에서 구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신뢰가 무너집니다. 우리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깨졌습니다. 끔찍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전에 예방해야 합니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영적 스승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고 무엇을 해 줄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뢰를 잃지 않도록 처음부터 조심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무지함을 대처하는 방법은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이 알지 못함-무지함이 생겨나는 것을 방지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마음, 불안, 충동, 강박, 짜증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자신의 모습도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과 문제의 증상을 발견하면 그와 반대가 되는 대처법을 적용하여 문제를 극복하도록 합니다. 모든 대처법은 공부와 명상을 토대로 알아집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과 마음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식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명상

명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다양한 방법을 수행하여 실생활에서도 익숙해지도록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이 나의 의도와 달리 행동하면 바로 화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명상은 이와 같은 상황을 배려하고 또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예로, 누군가 상반된 근거를 지니고 내 의견을 반대합니다. 평소 우리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명상을 하면 서운한 감정들이 녹습니다.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서운함이 줄어듭니다. 

자신의 내면이 평안하고, 이해심이 있으며, 인내력이 있다면 이런 유형의 상황들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단지 일주일간 전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상시처럼 크게 화내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매우 바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도 전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낸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기 중심적 착각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라는 것을 이해하면 화가 나는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수행은 매순간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스포츠나 휴식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매순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자 한다면 우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의 방에 앉아 사랑을 명상한다고 하는 많은 이들 중에는 자신의 부모님이나 배우자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슬픈 일입니다. 

어느 한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실질적으로 적용하려면 치우침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치우친 생각입니다.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도 치우친 생각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우 복잡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과, 양쪽 모두로 인해 비롯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동과 마음가짐을 바꾸도록 도와줄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내가 의롭고 거룩한 길로 들어섰다고 다른 이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려면 차라리 자기 자신이 변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비록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조언은 해 줄 수 있지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일을 할 때 자신의 감정에만 심취해 있거나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첫째는 자아 도취에 빠진 것으로, 자기중심적 생각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다른 이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노보카인 총에 맞은 것처럼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극단적인 치우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양극단에 치우치지는 않았는지를 스스로 관찰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과 행동에만 신경 쓰다 보면 다른 이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목표를 위해 올바른 동기와 마음을 가지고 자연스럽고 성실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심지어 다른 이들이 옆에 없어도 부정적인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동기와 감정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인연이 있다면 때로는 그 사람에게 알리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말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 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내 감정을 알고 싶어한다고 착각하는 것은 자신을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행동을 하려는 자신을 알아차렸다면 즉시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꼭 다른 이들에게 알릴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긍정적인 면을 너무 부각시키는 치우침을 삼가야 합니다. ‘나는 너무 완벽하다. 우리 모두 부처이며 모든 것이 훌륭하다.’라는 이같은 생각은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면들을 제거하지 않고도 선한 성품만을 보면 된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훌륭해. 난 완벽해. 난 부정적인 행동을 삼가야 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이미 나 자신이 부처니까!’ 균형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너무 우울해지면 모든 허물을 제거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내게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또다시 너무 들뜨게 되면 자신의 허물을 떠올려야 합니다. 

책임감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개발하고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책임감을 지녀야 합니다. 물론,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오롯이 혼자서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고 문제에 대해 서로를 탓하지 않는 영적 스승과 영적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관계 속에서 동일한 마음을 공유하고, 문제가 발생해도 함께 노력하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유대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비난하면 일이 성사되지않습니다. 상대방이 비난하고 탓을 하는데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관계는 끊어지지는 않지만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나는 이 모든 일을 참고 견딘다! 너무 힘들어!’라고 하면서 자발적 희생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매사에 짜증을 내게 됩니다.  

감화 

불교의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행은 삶의 추악함을 다루는 것입니다. 수행을 계속하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수행을 지속하고자 하는 견고한 자극의 원천이 필요합니다. 만일 마음을 움직이는 원천이 자신과 다른 스승들의 환상과 기적을 이야기하는 스승들이라면 수행을 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심어줄 수 없습니다. 상상과 기적은 확실히 흥미로울 수는 있지만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조사해야 합니다. 기적을 통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환상세계를 강화시킵니다. 우리는 위대한 마술사가 그의 기적의 힘을 발휘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상상하거나 또는 우리가 갑자기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에 관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믿음을 향상시키고 도움도 되지만 수행을 하게끔 하는 안정적인 자극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안정적인 기반이 필요합니다. 

완벽한 예는 부처님 자신입니다. 부처님은 환상을 보여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교화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은 태양과 같은 분이라고 경전에서 묘사합니다. 태양은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주려고 일부러 애쓰지 않습니다. 태양의 존재만으로도 모든 중생에게 온기를 제공합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를 듣고, 불상에 머리를 갖다 대고, 목에 붉은색으로 된 수호끈을 묶는 행위로 나 자신이 성스러워졌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단지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법을 수행하고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부처님의 좋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올바른 스승의 행동은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수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합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신비로운 전설처럼 흥미진진하지는 않아도 우리에게 수행을 하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나게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면 할수록 기적을 바라지 않고 서서히 변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더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항상 자신의 긍정적인 행동에서 얻는 기쁨을 강조합니다. 발전은 결코 선형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 좋아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매번 반복되는 모든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기분은 늘 좋고 나쁘기를 반복합니다.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불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때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행동을 하겠지만 때로는 오랜 습관에 휘둘려서 행동하기도 할 것입니다. 좋고 나쁨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보통 기적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영원하고 고정된 것이 없는 세속팔법 가운데 불편함을 극복하려면 일이 잘 풀릴 때면 너무 기뻐하지 않고 반대로 잘 풀리지 않아도 너무 낙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단기적인 효과가 아닌 장기적인 효과를 살펴봐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오 년간 수행을 꾸준히 해 왔다면 지난 오 년 전과 비교해 많은 발전이 있습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과거에 비해 침착하고 이성적인 마음으로 상황을 직시하고 상황을 대처하려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고무적입니다. 우리가 드라마틱한 상황을 좋아하고 이러한 상황을 꿈꾼다 해도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수행은 확고한 의지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수행은 실용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수행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금강살타 관상법과 같은 악업을 정화하는 수행을 할 때는 금강살타를 위대한 성인으로 여기고 자신이 그간 지은 악업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우리를 구원하고 죄를 대신해 주는 성인이 없습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이런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어리석음이 더럽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은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본성을 이해하고 노력을 통해 죄책감과 내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악업을 정화하는 과정이자 방법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수행을 실천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일상 생활에 적용하려면 우리의 현재 수준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식적이거나 자신의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할 수 있는 불교 수행 

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 중에는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불교 공부를 하기 위해 천주교를 포기하고 불교로 반드시 개종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수행을 혼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당에서는 기도를 드리기 전에 삼배를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할 때 성모마리아를 관상하지 않고 부처님을 관상합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각각 분리해서 관상해야 합니다. 성당에 갈 때는 성당에 가고, 불교 명상을 할 때는 명상을 하도록 합니다. 

불교와 천주교에는 사랑과 관용, 봉사 등 많은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두 종교의 근본 바탕은 서로 배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며 돕는다면 우리는 훌륭한 천주교 신자이자 불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엄청난 영적 성장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비유하자면 계단 하나하나를 딛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한번에 두 세개의 계단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옥상에 올라가려면 가장 먼저 1층에 들어서야 하는 것처럼 현재 천주교와 불교를 다 접해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쪽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일으키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수행할 때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토착 신앙을 부정하거나 험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매우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성을 잃고 무작정 불교를 믿는 불자 또는 천주교 신자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두고 광신적이곤 합니다. 자신이 믿는 신념만이 옳다는 심리로 인해 발생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배경 등에 충성해야 한다는 심리적 길들여짐으로 인해 어떤 종교를 믿게 되든지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려고 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배경에 충실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을 무의식정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극도로 불편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충성을 내보일 수 있는 배경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습관은 우리를 해롭게 합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를 믿고 싶진 않지만 지옥이 너무 무서워서 불교에 입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가 불자가 된 제 친구는 “내가 천주교를 믿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나는 천주교 지옥에 갈 거야. 그러나 내가 불교를 포기하고 천주교로 돌아가면 불교 지옥에 떨어질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천주교에서 배운 마음가짐을 불교 수행에 접목시키곤 합니다. 가장 흔히들 하는 행동이 희생정신을 지니고, 기적을 접하고, 다른 이가 우리를 구원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하고, 수행을 하지 못했을 때는 자책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같은 행동과 마음가짐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천주교를 믿어왔다면 천주교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을 이해하고 부정적인 부분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에 더 충실하도록 합니다. ‘나는 희생정신을 지니고 기적을 추구하는 것을 천주교에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천주교의 사랑, 자선, 불행한 이들을 돕는 정신을 물려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족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가족을 거부합니다. 가족의 좋은 전통보다는 악습에 더 길들여져 충실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가족으로 인해 천주교를 믿게 된 성장 배경에 감사함을 느끼고 인정한다면 자신의 과거에 대한 갈등을 해소하고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데 부정적인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과거, 가족, 조상대대로 믿어온 종교 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자신의 배경과 과거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면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이는 우리를 영적인 길에서 훨씬 더 안정되게 합니다. 

요약 

우리는 단계별로 천천히 진행해야 합니다. 과거, 위대한 스승들은 “법을 듣자마자 즉시 실천으로 옮겨라.”라고 하셨지만 매우 수준 놓은 법을 듣고 읽을 때는 이 가르침이 나에게 너무 빠른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당장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만일 너무 수준이 높은 법일 경우 그 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 위해 단계별로 기초부터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요약하면, 게세 아왕 달게는 “우리가 환상 속의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환상 속의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반대로 실용적인 방법으로 수행한다면 실질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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