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림(깨달음에 이르는 단계)의 개요

귀중한 인간 삶의 최선의 활용

우리 모두가 인간의 귀중한 신체(몸)를 받고, 귀중한 인간으로 윤회 환생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가장 위대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기회는 지금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을 것이 없습니다, 이는 심지어 신들의 왕 인드라로서 윤회 환생하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토대는 없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최선의 형태로 활용할지에 대한 모든 절차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발전을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우리 자신 안에 한층 더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이라는 토대 위에, 우리는 보리심의 목표라는 헌신적인 마음을 발전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바꾸어 말하면 자신의 결점을 모두 없애고, 자신의 최대한의 가능성을 발휘하여, 할 수 있는 한 모두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타인을 위해, 그리고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바칠 때, 그것이 귀중하게 인간으로서 윤회 환생한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이번 생의 성공 원인은 전생의 긍정적인 행동의 가능성

많은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내생/내세의 이익을 위해서 흥미를 가지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드물고, 하물며 깨달음을 얻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금생/현세의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는 것에 관심을 가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를 원하고 아무도 고통받거나 문제를 겪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금생에 행복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유형의 행복이 있습니다. 물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물적인 행복에만 주목합니다. 하지만 그 물적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 모두는 삶에 어느 정도 그것을 가져오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를 모릅니다. 예를 들면, 먹을 것, 입을 것, 거처와 사회적인 지위를 얻기 위해 살인하거나, 암살하거나, 무고한 생물을 도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일종의 물적인 양호한 상태를 찾기 위해 도둑질, 사기 또는 강도에 관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시도해도, 그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양호한 상태를 어떻게 적절한 방식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행복 대신 스스로에게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반면에, 비지니스, 사업, 농업, 교육, 예술 등에서 정직하게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부와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는 성공한 사람들과 성공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실패한 사람들 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실패할까요? 그것은 지금까지의 전생에 그들이 축적해 온 종자와 가능성의 이유입니다. 전생에 파괴적이었던 사람은 많은 부정적 가능성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 결과 금생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건설적으로 행동해 온 사람들은 긍정적인 가능성(공덕)을 축적해 왔고, 이것이 그들의 금생에서의 성공과 행복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실패하는지에 대한 이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왜 그런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할 이유가 없음을 생각하십시오. 만약 사람들이 동등하게 노력하고 동등의 능력으로 일한다면, 그들은 동등의 성공을 얻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금생의 생계를 위해 종사하는 일의 종류, 예를 들어 비지니스나 사업 등의 결과로 성공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공의 진짜 원인은 전생의 건설적인 행위에 의해 축적되었을 잠재력이며, 이번 생에 우리가 종사하는 일이나 활동은 그러한 원인이 무르익기 위한 상황이나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것은 원인이나 조건이 서로 발생하는 것에 의존합니다. 원인은 전생에서 유래하고, 그 전생 속에서 축적되어 왔을 가능성인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의 시간과 부과된 노력을 토대로 하여 여러 상황들이 생겨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해야 합니다. 

내생에 대한 고려 

이번 생에 얼마나 부유해지든, 얼마나 호화로운 것을 즐기든, 아무도 자신이 쌓아온 것으로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나는 충분히 가졌다. 더 이상은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들은 일에 평생을 바칩니다. 하지만 일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농민이 일년의 모든 계절 내내 파종을 하고, 밭을 갈고, 수확하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순환이 됩니다. 봄에는 다시 씨를 뿌리고, 다시 한번 순환을 거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계속 일하는 방식의 한 예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번 생의 일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실제로 끝날 때가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입니다. 그 시점에서는 행복의 상태라기보다는 비애 상태로 끝납니다. 

그래서 단지 음식, 의류, 금생에 대한 평가를 얻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물적인 쾌적함을 얻을 수 있어도, 정신적 행복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행복하지 않으면, 삶은 성취되지 않고 불행한 상태로 죽게 됩니다. 

따라서 정신적인 행복을 기반으로 한, 보다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에서 이룰 수 있는 물적인 행복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지속되는 행복을 원한다면, 내생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고려할 때 진정으로 오래 지속되는 행복을 위해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생에서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법(다르마)의 수행에 참여하는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 인가의 정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번 생의 관심사가 사라져버릴 것들 에만 국한된다면, 우리는 단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사람입니다. 만약 내생의 삶에 대한 고민을 다루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사람이 됩니다. 

파괴적인 행동을 피해 내생에서의 행복을 가져오다.

내생/내세에 있어서의 행복을 확실히 하려면, 법의 특정한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의 셋, 입의 넷, 뜻의 셋을 포함하는 열 가지 파괴적인 행위(십불선업)이 있습니다. 파괴적인 행위(십선계)를 피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내생에서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건설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면 금생과 내생에서 잘될 일들을 가져올 영적인 수행의 시작을 갖게 되었음을 이제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건설적인 행동은 예를 들어 동물이나 곤충을 고의적으로 죽이거나 고의적으로 훔치는 행위를 보고 그에 따른 모든 결점과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아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도둑질이나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의 아래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올바르고 건설적으로 행동하기 위한 군대나 경찰의 힘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도덕심과 윤리관으로 파괴적인 행동을 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윤리를 지키면, 그것이 우리가 행복한 상태로 죽기 위해 취해야할 예방책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애와 불안 속에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사람으로서의 이러한 예방책을 취했다면, 죽을 때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인드라 등 천계의 신으로 윤회 환생하는 것이 보증 됩니다. 

모든 생에서 제어 불가로 반복되는 문제

우리가 인간으로 윤회 환생해도, 혹은 신들 중의 왕으로 윤회 환생해도, 우리는 항상 문제들을 갖습니다. 어디로 윤회 환생하든, 누구로 태어나든, 제어할 수 없는 계속 반복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파괴적인 행위를 삼가하는 윤리를 따르는 것이 단지 스스로가 더 나쁜 상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 무엇으로 다시 윤회 환생해도, 문제는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산스크리트어에서는 “샤마타”, 티베트어에서는 “시네”라고 부르는,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 상태(멈춤)를 발전시키면, 우리는 선취 중의 고차의 존재로서, 천계의 존재의 하나로서, 즉 색계나 무색계의 신으로 윤회 환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윤회 환생의 화려함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차적인 존재 중의 하나로 환생해도,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층빌딩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확신 얻기

그러므로 어디로 윤회 환생을 하든 문제를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나 괴로움의 근본에 도달해 올바르게 판별하는 인식(지혜)으로 그것을 없애 버림으로써 현실과 환상을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방식으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것(공성, 무자성)을 깨닫게 됩니다. 현실에 대한 이 분명한 이해가 우리의 거짓 투영을 제거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생에서 겪을지 모르는 모든 문제와 괴로움을 영구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을 가져다 주고,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는 고전적인 경전에서 공성(공)에 대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쓰여진 내용의 유효성/타당성에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공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부처가 이야기한 모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들의 유효성에 대한 확신은 논리와 분석을 바탕으로 달성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성을 예로 들어봅시다. 논리적인 추론으로 공성의 유효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심화된 집중력,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실제로 수행해 보고 자기 자신이 실제로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유효하다고 입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집중력을 얻었을 때의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고양된 초감각적 지각을 스스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부처님이 설파하신 이러한 다양한 요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논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주제에 대해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을 실현하려는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부처님의 말씀의 일반적인 유효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안정감으로, 부처님이 설파하신 다른 모호한 것들의 유효성을 깊이 확신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건설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면 그 결과로서 인간과 신으로서 선취의 하나로 윤회 환생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파괴적으로 행동하면, 그 결과는 지옥의 생물이나, 아귀라고 불리는 것, 또는 동물(축생)에게 윤회 환생 하는 것입니다. 이는 행동에 있어서의 인과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순수한 논리만으로는 그 언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경전의 권위라는 맹신적인 토대 위에서 그들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와 체험이 부처의 가르침 – 선정이나 공성에 관한 올바른 견해(정견)의 유효성을 증명하면,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전적으로 타당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공성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나 자성이 없다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매우 주의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옳다고 인식한 후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또 다른 언설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건설적으로 행동하는 것의 결과는 행복이며, 파괴적이고 부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의 결과는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인과응보). 그리고 우리는 이 언설 또한 옳다는 확고한 신념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자신의 행동을 적절히 바꾸어 가기로 확고한 결정을 내립니다. 만약 행복을 원한다면, 우리는 행복을 가져다 주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즉, 건설적이고 긍정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출리심: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결의 

우리는 또한 영적 진보를 위한 모든 부수적인 기회와 함께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훌륭한 인간으로의 윤회 환생이라는 기반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전생에 축적해 온 방대한 긍정적인 가능성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매우 건설적이고 긍정적으로 행동해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윤회 환생과 기회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기회를 헛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식과 의복, 명성과 평판을 얻는 등 이번 생의 일에만 전적으로 관여하면 금생이 헛일이 됩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면, 이 집착으로, 이번 생에만 전적으로 사로 잡히는 것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우리가 모든 노력을 인드라와 같은 신으로서 윤회 환생하여 내생의 행복을 얻는 데에만 쏟는다면 이것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한 신이 가지고 있는 삶의 유형을 보십시오. 이 신은 엄청난 행복을 가지며 표면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 그러한 신은 엄청난 후회를 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에 찬 그 모든 인생이 그저 꿈과 같았기에 죽음과 직면할 때에는 엄청난 괴로움과 불행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윤회 환생이 자신의 목표라고 하는 것으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간의 귀중한 신체의 토대를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젠가는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한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옵니다. 단지 시간 문제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있고 건강할 때, 우리가 가진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는 바람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애 동안만 무언가를 얻으려는 완전한 집착에서 돌아설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의 다양한 사라질 것들이 어떻게 지속되는 본질을 갖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금생을 위한 것에 대한 집착에서 돌아서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 일어나는 문제로부터 벗어나기를 결심하게 됩니다.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런 종류의 결심을 “출리심”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생과 윤회전생 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생에 인간이나 신으로 윤회 환생하는 화려함이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이것들 역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잘 되든 간에, 모든 문제가 제어 없이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따라서 그런 내생에 집착하고 사로잡히는 일에서도 돌아설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종류의 결심을 갖고자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즉, 내생의 이러한 강박 관념과 함께 오는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 지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고자 하는 결심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금생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결심과 향후의 모든 내생에서의 여러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무상

영적인 수행자는 삶의 어떤 상황도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사람입니다. 즉, 무상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문제와 삶의 모든 문제를 염두에 두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러한 수행자가 모든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예방책을 취하려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만약 무상이나 문제들에 대해 그저 잊음으로써, 죽음에 대해 잊음으로써 그것들을 없앨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우리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마주하고, 문제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취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이것이 영적 수행과 관련된 것입니다.  

부처님 스스로 이러한 방법을 전할 다양한 기회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 무상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모든 영적인 탐구는 무상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삶이 끝나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것 또한 모두에게 무상의 사실을 증명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성제(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게다가 문제는 난데없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진정한 문제와 불행은 진정한 원인에 의해 발생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충동적인 행동과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과 태도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업과 번뇌를 말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과 태도에 의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우리 문제의 모든 원인인 두 가지 원인 중에서, 충동적인 행동의 그 근본에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과 태도(번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불교 경전에 설명된 84,000가지 다양한 종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과 태도를 살펴보면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실로 고정된 실체가 있다든가, 실로 확립된 독자적인 자성이 있다고 우리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무지(무명)입니다. 

하지만, 실로 확립된 자성 – 그것이 우리든 무엇이든 –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물이 진정으로 확립된 자성이나 존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믿어 버립니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확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판별할 수 있으면 어떤 사물이 그러한 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하는 것을 소거하는 해독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확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견해 혹은 어떠한 것도 스스로 확립된 자성을 가지지 않는다(무자성)라고 이해할 수 있으면, 이 견해는 사성제 중 하나인 “깨달음의 길”, “도제”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고도로 깨달은 자들 “성자”가 참되고 올바르게 간주한 해탈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도(道)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도제를 가지면 – 즉, 구체적으로 자성을 가진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무자성)는 올바르게 판별하는 인식(지혜/반야)을 가지면 – 우리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이나 번뇌를 더 이상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번뇌는 불가능한 것을 투영하고 믿는 데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이나 태도가 사라지면, 우리는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더 이상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되는 상황은 “괴로움의 소멸”, “멸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도로 터득한 자, 성자에 의해 사실로 간주되는 네 가지 사실의 제시입니다. 이것이 사성제 입니다. 처음의 두 가지 진리는, 무엇이 마음을 어지럽히는가에 대해서, 즉 진정한 괴로움(고제)와 그 진정한 원인(집제), 충동적인 행동이나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이나 태도에 의해 다룹니다. 우리가 마지막 두 가지 진리에 주목하면, 그것은 해탈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인데, 그 원인을 영구히 제거해서 모든 문제의 진정한 소멸을 달성하는 것입니다(멸제). 그리고 그 방법은 진정한 도제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도로 터득한 사람들이 사실로 간주했던 이러한 네 가지 사실들을 인식하고 이해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귀중한 인간으로서의 윤회 환생으로 우리가 가진 훌륭한 토대 위에, 이제 이 사성제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환생과 함께 우리가 가진 기회를 적절하게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유익한 마음의 습관으로 스스로 확립된 존재가 없다는 인식을 항상 안정적으로 구축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문제를 영원히, 완전히 제거하게 됩니다. 

자비심의 개발

모든 문제를 나 자신에게서 만이라도 제거하는 일은 아주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셀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가 있는지 결코 셀 수 없으며, 그들 모두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불공평합니다. 모두를 위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상기해 보면, 한정된 마음을 가지는 모든 다른 생물(유정)이 우리에게 아주 친절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보다 친절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의 친절에 대해서, 그리고 유정의 친절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 양자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꿀을 좋아한다면 그 꿀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꿀은 많은 벌에게서 온 것이고, 벌은 꿀을 만들기 위해 많은 일을 해야합니다. 더 많은 꽃 주위를 날아서 꽃가루를 모으고 둥지에 꿀을 분비해서 저장합니다. 만일 꿀을 먹고 싶은 마음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이 작은 곤충들의 일과 친절에 의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 일부 사람들이 고기를 먹으려고 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아프고 약해져 몸에 기력을 주는 음식이 필요할 때 등에, 그 고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힘과 영양을 위한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포기해야 하는 동물들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강한 결심을 가지면, 우리는 그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또한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지기를 바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비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문제와 그리고 얼마나 그런 문제를 갖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또한 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진지하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결심 없이는 다른 사람이 그 문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진실한 자비심을 키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관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경력을 쌓기 위해서 굉장히 힘들어하다가 높은 자리에 이르렀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오면서 고통받는 일의 의미조차 모른 채 관리가 된 사람보다 다른 사람을 돕는데 훨씬 잘 대응할 것입니다. 

보리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태도는 “자비심”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태도는 “사랑”의 정의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고 문제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모두가 자신에게 아주 친절했기 때문에, 표면적이 아닌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며 문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지는 것은 “비범한 결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기적인 관심사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부처의 좋은 자질에 대한 어떠한 깨달음을 얻을 수도 그것을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기적인 것을 외면하고 다른 사람의 곤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것이 내 자신이 깨달은 부처가 되기 위한 토대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인 관심사로 자신을 위해 재산을 모으려고 살인, 절도 등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한 서투른 방법은 단지 또 다른 문제만을 초래할 뿐이고, 그 모든 것의 근본에 있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자기본위)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른 사람의 복리에만 관심을 기울인 결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고, 전적인 명료한 마음으로 온전히 진화한 경지를 얻으셨습니다. 사실 모든 때(현재, 과거, 미래의 3세)에 걸친 모든 부처는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최선의 가능성을 모두 깨닫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이라면, 우리가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고, 모두가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하겠다.”라는 비범한 결의를 갖는다 하더라도, 아무리 그렇게 바라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할 능력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나 그 문제에서 벗어나서 행복을 얻도록 도와주는 그런 능력은 오직 부처만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부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리심의 목표”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리심의 목표를 가진 헌신적인 마음으로 꽃을 바치는 등의 간단한 공양을 했다고 해도 그 공양의 의도가 곧 모두를 이익하기 위한 것이고, 가능한 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의도라면 그와 같은 간소한 행동 으로부터의 긍정적 가능성의 축적은 방대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목표가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효험은 그 목표에 비례합니다. 그것은 살아 숨쉬는 것의 수만큼이나 광대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마음을 순수하고 성실하게 바치는 이익은 부처님께 황금과 보석으로 가득한 온 세계를 공양하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생과 생물에 먹을 것을 주려는 행위보다 보리심의 목표를 가진 그런 헌신적인 마음을 한 순간만이라도 가질 수 있는 이익이 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의 만인에게 주는 식사는 단 한번 사람들의 배고픔을 만족시킬 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논리는 확립됩니다. 그들은 곧 다시 배가 고파질 것이고, 그 배고픈 문제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리심의 목표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영원히 경감시키기를 원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헌신한다면 이것은 모든 사람의 배고픔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제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능력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끝 맺는 말

따라서 보리심의 목표를 발전시키는 것으로 향하는 것의 첫 걸음으로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해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맹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이 누구이든 다른 사람들을 해하는 것의 불리한 점이나 결점을 알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맹세할 때, 이것은 큰 유익을 가지고 옵니다. 따라서 매우 칭찬할만한 행동 유형입니다.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는 우리 모두가 지금 취할 수 있는 영적인 조치입니다. 우리는 영적 수행은 뭔가 매우 고상하고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컨대 영적 수행자가 된다는 것은 색다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 훌륭한 영적 수행자였던 재가(在家)들의 예가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 인도에서 84명의 고도에 도달한 대성취자들의 전기를 보면, 그 중에는 재가였던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늙었어도 낙심할 필요가 없고, 나이든 사람은 영적 수행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거 기록을 보면, 재가 슈리저티(Shrijati)는 80세에 영적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생애 해탈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나이든 게 아닙니다. 

반면에 우리가 젊다면 그저 경솔 해서는 안 되며, 영적인 수행에서 결정적인 데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언제 죽음이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을 미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게다가 노년은 한순간에 우리 모두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다가오면, 갑자기 우리의 인생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나라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많은 노력과 돈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집 밖에 사료 공급기를 두고 매일 먹이를 두기 위해 수천 달러를 소비합니다. 실제로 새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휴가도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훌륭한 실천이고, 그것을 보는 것은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실제로 보살의 수행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순례자로서 인도에 와서, 비둘기에게 빵을 주거나 여러 종류의 새들에게 밥을 주거나 하는 티베트인의 예도 많이 있습니다. 이는 장수를 불러오기 위한 훌륭한 수행 중 하나입니다. 

요약

여기서 우리의 토론을 정리해 봅시다. 주요한 점은:

  • 모두의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기르는 것.
  • 누구도 해치지 않을 것; 해롭거나 문제의 원인을 결코 만들지 말 것. 

이것들이 훌륭한 영적 수행을 위한 요점 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인간으로서의 윤회 환생 속에서 가지고 있는 이 토대를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리심의 목표와 함께 타인에게 마음을 순수하게 바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전적으로 명료한 마음과 완전히 진화한 상태를, 즉 완전히 깨달은 부처의 경지를 달성하는 것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