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삼악도에 환생을 면하고, 삼선취의 환생을 얻는 하사도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우리는 수행을 개선함으로써 소중한 유가구족(有暇具足)의 몸을 갖춘 환생을 원합니다.
중사도의 수행은 우리가 더 불행한 환생 뿐 아니라 생사 세계를 그치지 않고 돌고 도는 윤회전생을 함께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는 것 입니다.
상사도의 수행은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롭게 할 수 있는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 동안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일체 중생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중사도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 고통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우리가 삼선취의 천상계나 인간계의 하나로서 환생해도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을 사유하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하사도에서 우리의 목표는 삼악도에서 보여지는 끔찍한 고통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통상적인 행복이 고통의 또 다른 형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의 삶에서 경험하는 행복과 신들이 그들의 삶에서 경험하는 행복은 믿을 수 없고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결코 지속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음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느낄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지만 그것을 얻으면 우리의 경험은 불행으로 바뀝니다. 이는 마치 초콜릿과 같습니다. 약간의 초콜릿은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가 아프기 전까지 점점 더 많은 초콜릿을 원합니다. 불행히도 일반적인 행복은 항상 고통과 불행으로 바뀝니다.
각각의 탄트라 사다나(sadhana, 매일의 영적 수행) 수행에는 공양을 바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공양을 하여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거나, 우리 자신에게 특정 본존의 모습을 관상하여 행복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상상을 합니다. 이것은 모든 번뇌와 정신적 장애물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행복이며, 변화하고 불만족스러운 우리의 통상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불행의 원인이 영원히 제거되면, 우리가 경험하는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며 감소하지 않습니다. 행복이 맛있는 음식을 얻는 것과 같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조건에 기반한다면, 물론 그 행복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탄트라 수행으로 통상적인 행복을 목표로 한다면, 불행에서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탈출만이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앉아서 명상을 하며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불행해질 것입니다.
탄트라의 최상위의 수행에서 우리는 또한 지복의 감각과 함께 공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노력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말하자면, 이것을 단순히 좋은 음식이나 마사지를 받는 통상적인 행복과 같은 수준에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와 방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지복의 상태와 합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대상이나 다른 것에 강하게 집착하는 우리의 통상적인 행복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집착이 없는 느낌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의 형상을 “특별한 신” 또는 성자의 의미로서 오해할 수 있으므로, 천계의 신들 에게도 고통이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본존의 형상에 집중할 때, 우리는 그들이 신이 되는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긴 사다나 수행에는 다양한 신에 대한 수많은 찬미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혼동하기 쉽습니다. 찬미의 실제 요점은 그들의 긍정적인 자질들을 기억하고 그들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부처는 완전히 평정의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의 도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가 공양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 번뇌와 무명
일단 우리가 육도의 괴로움을 생각하고 나면, 우리는 번뇌를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의 관점에서 그 원인으로 살펴봅니다.
번뇌는 우리로 하여금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하고, 부정적인 잠재력을 형성하게 하여 더 나쁜 환생을 가져오기 때문에 고통을 유발합니다. 반대로, 건설적인 행동에서 나오는 긍정적인 업력은 윤회에서 더 나은 환생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현실과 인과관계의 무명에 기초한 번뇌로 인해 파괴적으로 행동합니다. 우리가 윤회라는 맥락에서 건설적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르고 있으며, 이것은 번뇌와 섞일 수도 있고 섞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때 우리의 무의식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업력을 활성화시켜 윤회 안에서 환생의 결과가 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번뇌의 단점과 그 기저에 깔려있는 무명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탄트라 수행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의 번뇌의 힘을 완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분노 또는 집착에서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정에 대해 어느정도 노력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망, 분노, 무지, 교만 등의 번뇌를 경로의 일부로 사용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극복하는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감정에 휩쓸려 마음이 흐트러지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며, 부정적인 업력을 더욱 구축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는 욕망입니다. 본질적으로 성적으로 보이는 탄트라 이미지가 많이 있으며, 우리는 종종 수행 중에 결합된 커플로서 자신을 상상합니다. 여기서, 커플은 일반적인 남녀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이미지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나타냅니다. 어머니는 공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아버지는 방편(方便)을 나타냅니다. 어머니(지혜)와 아버지(방편)의 결합은 성불을 나타내는 아이를 낳습니다. 탄트라 경전들은 우리가 욕망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해 욕망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욕망에 휩쓸릴 위험이 없다면, 이것을 사용하여 공성을 이해하고 모든 욕망을 완전히 제거할 지복의 상태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세합니다 - 확고한 본래적 존재가 있다는 생각(아집我執과 법집法執)에 대한 약간의 집착 조차도 공성을 이해할 기회를 막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는 분노입니다. 많은 탄트라 수행에서 우리는 자신의 분노를 부정적인 태도를 파괴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강력한 본존으로 스스로를 관상합니다. 그것은 특히 자신에게 너무 온화한 태도나 성불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극복하는 데 특히 유용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분노를 극복하는 데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번뇌에 대한 인내심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 출리심
우리가 괴로움과 그 원인을 이해했다면,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를 멈추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괴로움에서 해방되려는 결의와,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확신에 기초한 출리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리심이 없으면, 모든 것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이 비닐에 쌓여 다른 것과 분리되어 고정불변한 실체로 존재한다고 믿는 우리의 현상을 내려놓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현상과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관련됩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는 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혐오감을 느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러한 현상들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겠다는 결의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대상을 잘못 인식하는 일반적인 방식 때문에 현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허무주의는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이 전혀 실재하지 않는다고 왜곡된 관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 세 가지 실천
출리심을 우리의 동기로 삼아, 우리는 삼학(三學, 세 가지 실천)을 수행합니다.
- 계율(계), 자발적인 도덕 규법들이 없이는 수행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 선정(정), 집중의 수행이 없이는 우리는 복잡한 관상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 지혜(혜),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우리는 현실과 환상의 차이를 이해합니다.
계율은 우리의 행동과 말,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선정은 산란한 마음, 동요된 마음, 정신적 게으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탄트라 수행을 통해 개발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없이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상적으로, 우리는 이미 ‘사마타(shamatha)’ 라고 불리는 특별하고 완전히 집중된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중단이나 감소 없이 4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생기자체는 우리의 상상력을 이용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양의 세부적인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만다라의 모든 형태와 특징을 우주의 크기로 관상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코 끝의 작은 방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4시간 동안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완전히 숙달하면, 우리는 미묘한 에너지(기, 氣)체계를 이용하여 원만차제 단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다라의 각 부분에 대한 뚜렷한 세부 사항을 명료하게 관상할 수 없다면, 실제로 맥 속의 풍기(風氣)들을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레이저를 쏘는 것과 같이 집중하지 않고 에너지를 조절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방해하여 신경계와 마음에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며, 누구나 이것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혜는 현실과 환상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는 완전히 정신이 혼란해지고 우리 자신을 실재적인 본존으로 식별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형태의 악귀로 환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상사도: 평정심, 자애, 보리심
상사도의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모든 중생에 대한 평정심을 발전시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사다나에서, 우리가 모든 중생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방출되는 빛의 광선을 상상할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개개의 일체 중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편애 없이 모두를 비추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평정심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든 중생이 행복하고 행복의 원인을 가지기를 바라는 자애와, 그들이 고통과 그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자비심을 발전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고 그들에게 모든 행복을 주는 빛의 광선을 상상합니다. 빛을 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우리의 에너지를 나타내고, 되돌아오는 광선은 풍기가 중맥(中脈)으로 들어가서 용해되는 것을 나타내는 매우 심오한 수행입니다. 그러나 자애와 자비심의 마음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빛이 나가고 되돌아와 용해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량 중생을 최대한 이롭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보리심을 계발합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탄트라 수행은 우리가 목표로 하는 깨달음의 경지를 나타내는 본존의 형상으로 우리 자신을 관상할 수 있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을 그러한 형태로 관상하는 요점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관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단련하고 우리의 미묘한 기와 마음을 더욱 수행하면 결국 자연스럽게 성불한 부처의 형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약
탄트라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기술된 3단계의 람림의 기반을 필요로 합니다. 하사도에서 우리는 신심과 공경심으로 영적 스승을 의지하여 섬기고, 탄트라 수행의 기반인 유가구족의 몸을 받고 환생한 것에 대해 중히 여겨야 합니다.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는 탄트라 수행 내에서 죽음, 중음, 환생의 과정의 기초가 되며 우리가 지금 가진 기회를 최대한 사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우리가 윤회를 벗어나 청정한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중사도는 사성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번뇌를 약화시키고, 우리의 탄트라 수행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과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출리심으로, 우리는 삼학(세 가지 실천)의 계학(계율), 정학(집중), 지혜(혜학)를 수행합니다. 우리는 수행 내내 우리가 관상하는 것의 실제 현실에 집중할 수 있고,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상사도에서 우리는 모든 중생에 대한 평정심을 계발합니다. 둘째, 모두가 행복하고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자애와 자비심을, 셋째, 모두를 위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보리심을 기릅니다. 우리는 이미 부처로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 모든 것을 관상에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