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띠샤의 『보리도등론』의 특별한 특징

깨달음에 이르는 도의 단계에 관한 아띠샤의 저서가 지닌 네 가지 뛰어난 자질

다음의 자질들은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밝히는 등불)』 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 세 쪽에 불과한 짧은 논서가 이후에 나온 모든 확대된 람림 가르침의 원형이므로, 우리는 이 네 가지 자질에 대한 설명을 그 내용을 공부할 때마다 적용해야 합니다.

쫑카파는 『람림요의』에서 이러한 네 가지 뛰어난 자질(che-ba bzhi)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7)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경전에 설해진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수행의 지침으로 마음에 드러납니다. 승리자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다르마를 저버리는 중대한 악행이라는 심연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합니다. 이러한 이점 때문에, 인도와 티베트의 학식 있는 스승들 가운데 어떤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복 있는 이들이 자신을 맡겨 온 최상의 가르침인 세 가지 수행 범위에 따른 도의 단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수행 목표, 즉 더 나은 윤회, 해탈,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경지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버리거나 깨달아야 할 모든 것(spang-rtogs, 버림과 깨달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다르마에 관한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깨달은 모범을 보여 주심으로써 전달하셨습니다. 따라서 경전의 법(lung-gi bstan-pa, Skt. āgamanirdeśa)와 깨달음의 법(rtogs-pa’i bstan-pa, Skt. adhigamanirdeśa)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동일한 가르침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일 뿐이므로 언제나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경전의 법은 삼장(sDe-snod gsum, Skt. Tripiṭaka)에 모아져 있으며, 깨달음의 법은 세 가지 높은 수련으로 요약됩니다. 율장(Dul-ba’i sde-snod, Skt. Vinayapiṭaka, 율의 장), 경장(mDo-sde’i sde-snod, Skt. Sūtrapiṭaka), 아비달마장(mNgon-pa’i sde-snod, Skt. Abhidharmapiṭaka, 특별한 주제에 관한 지식의 장)은 각각 높은 윤리적 자기 절제의 수련, 높은 선정의 수련, 그리고 높은 분별지의 수련(높은 지혜)을 다룹니다.

어떤 스승들은 탄트라를 아비달마장에 포함시키는 반면, 다른 스승들은 그것을 제4장으로 봅니다. 예를 들어 잠양 켄체 최키 로되(’Jam-dbyangs mkhyen-brtse chos-kyi blo-’gros, 1893–1959)는 『법의 문을 여는 법』(Theg-pa mtha’-dag-gi snying-po mdo-tsam brjod-pa chos-kyi sgo-’byed)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밀 탄트라의 대승 가르침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아비달마의 내적 가르침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는 지식보유자장을 별도의 범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아띠샤의 도의 단계에 관한 논서는 경전의 법이든 깨달음의 법이든 이러한 모든 가르침이 서로 어떻게 모순되지 않는지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여 줍니다. 이것은 아띠샤가 특히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중요한 점입니다. 아띠샤가 티베트에 왔을 당시,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소승과 대승의 가르침이 서로 완전히 모순되며, 율장의 계율과 탄트라 수행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내용은 우리가 장기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 다른 사람을 돕는 일, 일체지의 지혜를 성취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들어맞으며, 각각의 가르침이 서로를 더욱 완전하게 해 줍니다.

의학 문헌을 보면 열이 날 때에는 고기와 술을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체온이 내려가면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특정한 신경계 질환이 생기면, 같은 고기와 술을 치료제로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두 처방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병의 단계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가르침을 주셨더라도, 도의 단계에 대한 가르침은 각각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수행 단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한 개인을 위한 것이며, 그 개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각자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실에 대해 완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먼저 성문승의 수행관에 따라 마음을을 닦습니다. 자신의 괴로움과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 등을 인식하면서, 먼저 자신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 결국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려는 동기를 키우려고 합니다. 그 힘이 더욱 강해지면, 보리심이라는 대승의 마음을 발전시켜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관심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헌신하고 가장 높은 청정한 상태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가 완전히 적합한 그릇이 되어 탄트라 수행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 수준을 가장 빠르게 성취하고 그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자신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방법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모든 중생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갖춘 깨달음으로 이끄는 도의 단계를 수행하려고 하며, 모든 사람의 삶의 상황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몇 가지 질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질병에 따라 치료법은 달라질 수 있지만, 각각 특정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불도를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우리는 도의 모든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다르마키르티(법칭, 7세기)는 『바른 인식에 관한 주석』(Pramāṇavārttika) 제2품 제132게 후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여 모호한 수행법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도의 단계는 일체지로 이끌며, 일체지는 모든 허물을 제거하고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 모든 훌륭한 자질을 갖춘 상태이므로, 그 과정에서 어떤 것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아는 수행을 하고 있는데, 어떤 것을 배우는 일이 어떻게 그 수행과 양립할 수 있겠습니까?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 제5품 제100게 전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승리자들의 영적 자손은 수행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반야바라밀다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살들은 모든 도의 마음을 닦고 알아야 한다. 즉 성문의 도의 마음과 독각불의 도의 마음, 그리고 부처님들의 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보살들은 이러한 도의 마음을 완성해야 하며, 이러한 도의 마음에 수반되는 행위들 또한 모두 수행해야 한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띠샤의 논서는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각각의 도가 어떻게 다른 모든 도를 포함하고 따라서 서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드롬톤파는 한때 아띠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라마께서는 모든 가르침을 네 면을 가진 방석과 같은 하나의 도의 마음으로 삼을 줄 아는 분이다.

닥포 잠펠 룹둔의 설명에 따르면, 법의 네 면 또는 네 가지 측면은 세 가지 수행 동기와 탄트라 수행입니다. 네모난 방석의 어느 한쪽을 잡아당겨도 방석 전체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것처럼, 이 네 가지 측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확고하게 붙잡게 되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의 연속체에서 도의 단계 가운데 어느 하나를 발전시키더라도, 그 맥락 안에서 다른 모든 단계에 대한 이해도 함께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상황과 사건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지금 우리의 삶의 상태뿐 아니라 미래의 삶,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탄트라 수행의 본질에 대해서도 깊이 통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아띠샤의 논서에 제시된 요점들을 수행해 나가면, 각 단계에서 모든 가르침이 어떻게 서로 들어맞는지, 그리고 경전에 설해진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통해 나타난 가르침 가운데 어느 것도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모든 경전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개인적인 수행 지침으로 마음에 드러나게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 가르침과 그에 대한 인도 논사들의 주석이 세 가지 수행 목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모든 것의 근거이듯이, 그것들은 또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 지침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쫑카파는 『경과 탄트라의 실제 수행 단계에 관한 실용적인 조언의 편지』(Lam-gyi rim-pa mdo-tsam-du bstan-pa)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이러한 도의 마음으로 이끌어 가는 간략하고 질서 정연한 수행 지침은 사실 이 위대한 논서들에서 그 내용을 요약해 낸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개인적인 조언과 수행 지침을 얻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존재 가운데 부처님보다 더 뛰어난 스승은 없습니다. 일체지의 지혜를 갖추신 부처님은 어떤 다른 안내자보다 자격이 뛰어납니다. 오직 우리를 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을 막고 영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한 84,000가지 수행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우리의 실제 수행과 이익을 위한 개인적인 지침이므로, 요가 수행자 장춥 린첸(1015–1077)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수행 지침을 안다는 것은 송아지 같은 제자들을 위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쓴 소책자의 내용을 확실히 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처님의 모든 경전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실제로 방대한 경전을 다루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띠샤의 논서는 경전의 말씀을 수행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쉽게 해 줍니다. 도의 단계 자체가 수행 지침을 체계적으로 모아 놓은 것이며, 그 개요의 각각의 범주가 방대한 논서를 공부할 때 내용을 정리할 수 있는 편리한 체계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쌀, 밀가루, 설탕, 차 등을 각각 담아 둘 통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주방이 없다면, 장을 본 뒤 물건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고 나중에 음식을 만들 때에도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반면 필요한 용기를 모두 갖추어 놓았다면 무엇을 사더라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알고, 필요한 것을 즉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닥포 잠펠 룬둡이 제시한 것으로, 파봉카의 『손바닥 안의 해탈』에도 인용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의 단계라는 범주를 알고 있다면, 영적 스승에게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나 보리심 등에 관한 내용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그것이 개요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즉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전에 제시된 모든 수행법을 이 개요 안에 넣을 수 있고, 그 개요가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도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러한 도를 우리 자신의 마음의 연속체에서 실제로 이루어 자신을 정화하고 최고의 성취에 이르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경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개인적인 수행 지침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경전의 내용 자체가 우리가 수행해야 할 것이므로 드롬톤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법에 관한 많은 위대한 논서를 공부한 뒤 실제 수행법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경주로를 준비해 놓고 정작 경마는 자갈길에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유는 카말라실라(8세기)의 『수행 단계』(Bhāvanākrama)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는 집에 가장 좋은 차를 종류별로 가득 준비해 놓고, 목이 마르면 정작 밖의 식당에 가서 마실 것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게셰 청가와 같은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무엇을 읽든 즉시 수행에 옮겼습니다. 예를 들어 운파라의 『율장경』에서 출가자는 가죽 방석 위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읽자마자 자신이 앉아 있던 가죽 방석을 곧바로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후 추운 외딴 지역에서는 예외적으로 가죽 방석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보자 곧바로 밖으로 달려나가 버린 방석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요컨대, 쫑카파는『경과 탄트라의 실제 수행 단계에 관한 실용적인 조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대한 논서는 법을 강의하기 위한 것으로만 여기고, 짧은 개인적 수행 지침은 수행을 위한 것으로만 여겨 이 둘을 서로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가르침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의 경전 말씀과 그 의도를 설명하는 인도 논사들의 주석은 모두 실제 수행을 열심히 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한 수행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을 개인적인 수행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세 단계가 있으며,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먼저 경전에 제시된 수행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다음에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숙고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심이 없어지면, 그 수행법을 실제로 자신의 삶에 받아들여 현실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는 몸과 말과 마음의 습관으로 그것을 길러 가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명상입니다.

따라서 파드마삼바바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위대한 수행자들이 가르침을 폭넓게 듣고 배웠다면 수행에서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자 파트룰 또한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가르침을 듣는 일을 경멸하는 사람은 실제 성취를 얻을 몫이 없게 된다.

닝마 전통의 족첸 스승이었던 자 파트룰은 람림에 해당하는 수행 지침서인 『나의 완벽한 스승의 가르침』의 저자입니다.

사캬 판디타는 『명언보배집』(Legs-bshad rin-po-che’i gter) 제9품 제43게에서 다음과 같이 이 문제를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명상을 위해서는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 좁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입니다.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않고 명상만 하면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어리석은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을 실현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사캬 전통을 세운 세 명의 백색 사캬 스승과 두 명의 적색 사캬 스승(Sa-skya dkar-po rnam-gsum dmar-po rnam-gnyis) 가운데 사캬 판디타는 후자의 두 명 중 한 분입니다. 그는 조카 초걀 팍파(1235–1280)와 함께 몽골에 불교를 전했습니다.

미친 성자로 알려진 드룩파 쿤레는 드룩파 까규 전통의 스승으로, 이 점을 더욱 신랄하고 풍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열심히 명상하려 하지만 가르침은 거의 듣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예전에 내게는 세 가지가 있었다. 성냄, 집착, 어리석음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잃어버렸는데, 이제 보니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을 주워간 모양이다. 

반면에, 배운 것을 전혀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많이 듣고 공부하기만 하는 것은 돈을 모아 놓고 한 번도 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드제 파트룰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디 제 가르침을 종이에 적어서 접어 둔채 다시는 꺼내 보지 않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배우든 그것을 단순히 흥미로운 정보로 남겨 두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이 점을 매우 뼈아프게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외적인 폭력으로 가르침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놀랄일이 아나다. 호랑이가 사람을 죽이고 살점을 먹는다고 해서 호랑이를 탓할 수는 없다. 진정 끔찍한 일은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가르침을 파괴하는 일이다.

수행의 단계적인 길을 공부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경전의 말씀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개인적인 조언으로 와닿게 되면, 우리는 모든 가르침을 자신의 수행에 직접 적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렇게 한다면, 먼저 가르침을 듣고, 그다음 숙고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명상함으로써 마음속에 방어적인 힘을 유익한 습관으로 길러,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 통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쫑카파의 훌륭한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쫑카파는 『나의 수행의 전개』(rTogs-brjod mdun-legs-ma) 제2게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광범위한 가르침을 널리 듣고자 했고, 중간에는 위대한 논서의 모든 가르침이 마음속 수행의 지침으로 와닿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밤낮으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수행에 적용하고자 정진했다.

부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처님과 그분의 본보기를 따라 가르침을 전한 인도 논사들의 위대한 논서들은 어떤 영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의 지침을 얻는 데 근본이 되는 원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은 종종 이해하기 어렵고, 그 가르침을 어떤 순서로 수행해야 하는지도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위대한 스승들이 남긴 문헌상의 지침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지침에 의지해야 보다 쉽게 그 의미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은 하나의 경전 구절뿐 아니라 여러 경전과 논서에 담긴 의미를 열어 주는 만능 열쇠와 같아서, 더욱 깊은 수준의 통찰과 깨달음에 이르게 해 줍니다.

쫑카파는 『경과 탄트라의 실제 수행 단계에 관한 실용적인 조언의 편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지침’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자체로도 매우 방대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극히 어려우며, 가르침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이유로 이해와 수행의 단계적인 순서를 뒤섞어 놓은 위대한 논서들을 우리가 보다 쉽게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는 데 있다.

가장 뛰어난 수행의 지침은 바로 수행의 단계적인 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이를 공부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의도된 핵심 주제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는 수행 동기의 세 가지 범위이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도의 세 가지 주된 요점’, 즉 다음과 같습니다.

  1. 출리심, 즉 괴로움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의
  2. 온전히 헌신하는 보리심
  3. 실재에 대한 올바른 견해

부처님의 경전 말씀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세 가지 도의 주된 마음은 그 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아띠샤의 지침서는 이 보물을 모으기 위한 배와 같고, 우리의 영적 스승은 그 배의 선장과 같습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그것을 우리의 수행을 위한 개인적인 조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는 수행의 단계적인 길이라는 체계에 따라 공부한다면, 어떤 경전이나 논서를 접하더라도 그 핵심을 쉽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누구도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도록 자동으로 막아 줍니다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이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제한적이고 종파적인 견해를 내세워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버리거나 낮추는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됩니다. 다시 말해, 경전에 설해진 가르침과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이 전한 가르침 전체에 서로 맞지 않거나 모순되는 것이 없음을 보게 되면, 그 어느 가르침도 비난하거나 배제하지 않게 됩니다. 한 사람이 수행의 서로 다른 단계에서 배워야 할 가르침들이 모두 그 사람 자신의 수행을 위한 개인적인 조언으로 마음에 와닿게 되면, 그 가르침의 어떤 측면도 소홀히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어떤 경전이나 논서의 핵심 요지를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일도 없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히나야나와 대승, 경과 밀교가 모두 서로를 보완하는 가르침임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법을 버리거나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엮은 경』(Sarva-vaidalya-saṃgraha Sūtra)에서는 이러한 중대한 과오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문수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에 이르는 말씀들 가운데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여기는 것은 법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거나.. 이것은 오직 보살들을 위해 설해졌고 저것은 성문들을 위해 설해졌다고 말하거나.. 이것은 보살들이 수행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을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거나 말할 때 따르는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는 『삼매왕경』(Samādhirāja Sūtra) 제18품 제31~32게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경전의 어느 한 부류에 속하는 가르침을 버림으로써 어떤 사람이 쌓은 부정적인 업력은 염부제의 모든 사리탑을 파괴한 사람이 쌓은 부정적인 업력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아라한을 살해한 사람이 쌓은 부정적인 업력보다도 훨씬 크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법의 어떤 측면도 배척하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티베트나 그 밖의 지역에서 번성해 온 어떠한 전통이나 전승 계보도 결코 배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제5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었던 제1대 판첸 라마는 『마하무드라의 근본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별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전통이 있다. 그럼에도 경전과 논리에 정통하고 명상 수행의 경험을 갖춘 요기가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궁극적인 의미가 모두 동일한 의도된 지점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잠양 켄체 최키 로되(1893–1959) 역시 『법의 문을 여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모든 티베트 전통은 이름만 다를 뿐이다. 본질적으로는 모두 하나의 지점으로 모인다. 그 하나하나는 모두 동일한 궁극의 목표, 즉 완전한 불성을 이루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친다. 가르침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꾸며 내지 말고, 그 어느 것도 얕보지 말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다처럼 넓고 깊다. 그 모든 가르침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주어진 것임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수행하라.

잠양 켄체 최키 로되는 사캬 전통의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선대 스승인 잠양 켄체 왕포(1820–1892)는 동부 티베트 캄(Khams) 지역에서 리메(비종파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아띠샤의 논서를 다른 위대한 논서들과 구별하는 세 가지 특징

위에서 설명한 네 가지 뛰어난 자질에 더하여, 아띠샤의 『보리도등론』에는 세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핵심적인 요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포함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모든 말씀이 아띠샤의 세 쪽짜리 짧은 논서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가르침의 의미 전체가 그 안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는 경과 밀교의 방대한 가르침 전체에서 핵심적인 요점을 모두 세 가지 수행 범위의 영적 목표를 지닌 사람들이 취해야 할 방어적 수행법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의 단계적인 길을 완전한 과정으로 공부하는 것은 모든 경전의 핵심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톨룽파(1032–1116)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깨달음의 길의 단계를 가르치면, 여러분은 모든 경전과 그 주석서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얻게 된다. 이 모든 책들은 이렇게 느끼며 떨게 됩니다. ‘저 백발의 늙은 승려가 우리의 심장을 몽땅 뽑아 가 버렸구나!’

스물다섯 가지 재료로 만든 약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병이 걸렸다고 해서 각 재료를 한 자루씩 가득 담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양에 모든 재료가 빠짐없이 들어 있기만 하다면, 소량만 복용해도 병을 치료하기에 충분합니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약은 효과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행의 단계적인 길에는 모든 가르침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전체 과정을 공부하고 수행해 나가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에서 핵심적인 요점을 소량씩 모두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이 반복되는 모든 문제에서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데에도 충분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의 단계적인 길을 제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체계화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수행에 쉽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람살라에서 런던으로 가려고 한다면, 먼저 버스를 타고 파탄코트로 간 다음 기차를 타고 델리로,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가야합니다. 이처럼 여행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으면 이동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최종 목적지를 염두에 둔 채 다람살라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여 각 단계를 하나씩 거치면 됩니다. 어느 하나도 생략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띠샤의 논서에서는 영적인 여정을 수행의 단계적인 길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어느 단계도 건너뛰지 않고 하나씩 차례로 거쳐 나가기만 하면 우리는 쉽게 마음을 다스리고, 우리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경전 말씀은 가공되지 않은 솜과 같고, 인도 논사들의 주석서는 그것을 짜서 만든 천과 같으며, 수행의 단계적인 길은 이미 만들어진 셔츠와 같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입기만 하면 됩니다.

위대한 두 선구자의 전통에 정통했던 두 명의 뛰어난 스승의 지침으로 장엄되어 있습니다

아띠샤는 여러 지침의 전승을 하나로 결합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는 아바두티파로부터 용수의 심오한 전승을, 세를링파로부터 무착의 광대한 전승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두 전승을 자신의 짧은 논서 안에서 샨티데바가 문수보살에게서 전해 받은 보살행에 관한 전승들과 결합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여러 스승들에게서 전해 받은 다양한 탄트라 수행의 전승들도 이 모든 전승과 함께 하나로 결합했습니다.

다른 어떤 지침서나 위대한 논서에서도 이러한 세 가지 추가적인 독특한 특징을 모두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미륵의 『현관장엄론』이나 『비밀집회 탄트라』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위대하고 완전히 타당한 논서들조차 이러한 특별한 자질을 모두 갖추지 못했다면, 하물며 다른 허위의 문헌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누구나 책에 무슨 내용이든 써서 출판할 수 있습니다. 아띠샤 시대만큼 출판 과정이 엄격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인쇄되어 책으로 나왔다고 해서 우리가 읽는 모든 것을 그대로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법을 선택할 때에는 그 수행법이 지닌 자질과 특징을 사전에 철저히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캬 판디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말이나 보석처럼 사소한 물건을 사고팔 때에도 우리는 여기저기 물어보고 꼼꼼히 살펴보며 사전에 확인한다. 우리는 이 생의 사소한 일에는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모습을 스스로 보인다. 그런데 법에 의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계속되는 윤회에서의 삶의 질 자체가 달려있는 데도, 우리는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가르침이든 공손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전혀 살펴보지도 않고 던져 주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꿀꺽 삼켜버리는 개와도 같다.

믿을 만한 다르마의 가르침을 수행한다면 실제적인 체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유를 휘저으면 버터를 얻을 수 있지만 물에서는 버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 개인의 수행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려면 다음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 학식 있는 스승들이 해설과 주석을 통해 그 가르침의 타당성을 확인했어야 합니다.
  • 그 가르침을 마음 깊이 받아들여 명상한 마하싯다들의 마음의 연속체에서 명상 체험과 안정된 깨달음이 실제로 생겨났어야 합니다.

람림의 가르침은 이러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습니다. 이는 아띠샤의 현재는 유명해진 논서에 대해 인도의 전문가 위원회가 보인 반응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이 논서의 각각의 요점은 부처님의 말씀과 인도 논사들의 저술에 근거한 경전 인용을 통해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인도에서 널리 행해졌고 티베트에서도 계속 이어진 이러한 출처 인용의 관행은 저자의 박식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스승들과 옛 주석가들의 말을 인용하고, 어떤 가르침의 근원을 부처님 자신의 말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출처를 밝힘으로써, 그 가르침이 진정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지어낸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요소를 잘 살펴본다면,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이러한 타당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공부하고 수행할 때 우리가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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