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요도(三要道) 대한 검토
쫑카파 대사께서는 삼요도(三要道), 즉 세 가지 근본 수행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곧 마음의 세 가지 주요한 길, 다시 말해 수행자가 사유하고 이해하는 세 가지 핵심 방식으로 람림의 정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출리심, 곧 해탈에 대한 결단, 보리심의 지향, 그리고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출리심이란 두 방향을 동시에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한쪽으로는 괴로움과 그 원인을 향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해탈, 곧 자유를 향합니다. 괴로움과 그 원인을 향한 방향에서는 그것들을 버리고 놓아주며 제거하려는 의지를 지니는데 이는 단지 일시적으로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근절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해탈의 경지를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확고한 결단이 있습니다.
출리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서, 우리가 버리고자 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대상은 우선 자기 자신의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타인의 괴로움을 대상으로 할 때에는 자비심이라 불립니다. 출리심의 표준적이거나 일반적인 설명은 윤회 전반의 괴로움과 그 원인, 그리고 특히 자기 자신의 윤회적 경험을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윤회란 통제되지 않은 반복적 재생을 의미하며, 그에 수반되는 온갖 문제와 괴로움, 어려움 전체를 포함합니다.
불행의 고(苦苦)와 변화의 고(壞苦)
불교에서 고를 설명할 때는 삼고(三苦)를 말합니다. 첫째는 불행의 고, 즉 고고입니다. 이는 슬픔, 불만족, 괴로움, 불쾌함 등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바람은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므로 인간에게 그것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성취는 아닙니다. 불교가 특별히 초점을 맞추는 지점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항상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도 자주 말씀하시듯이, 불교 가르침에서 보편적인 요소와 불교 고유의 요소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배고프지 않으려는 것, 춥지 않으려는 것,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해지고자 하는 바람은 불교적인 특징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 고는 변화의 고, 즉 괴고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속적 행복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분명 즐겁고 쾌적하지만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지속되지 않습니다. 둘째, 그것은 결코 완전한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은 애정,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쾌락을 원합니다. 만일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면 왜 늘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잃게 될 때 우리는 깊은 고통에 빠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평범한 행복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다음 순간에 무엇을 경험하게 될지, 어떤 감정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행복하더라도 다음 순간 깊은 우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출리심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행복에 대해 근본적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류의 행복에 머물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지속되며, 완전한 만족을 주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 자체가 특별히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생각은 많은 종교 전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고통에 대해서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불행의 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궁극적인 수행은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우리는 먹습니다. 또한 세속적 행복을 출리한다고 해서 즐거운 일을 전혀 하지 않거나, 웃지 않거나, 삶을 누리지 말라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핵심은 그것을 궁극적 목표로 여기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며, 결코 완전한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내가 비교적 더 좋은 상황에 있다면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다.”
이는 귀한 인간의 몸과 특별히 귀한 삶의 여덞 가지 조건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비교적 편안하게 살고, 먹을 것이 있으며,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법문을 들을 수 있고, 공부할 수 있으며, 수행과 은둔을 할 수도 있고, 고통과 문제에 압도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을 도울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대단할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에너지와 여유를 주어, 다시금 수행의 길과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더 깊이 헌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만약 거친 고통, 즉 중대한 고통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키고 수행의 길 위에서 활용하려 합니다. 물론 우선적으로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질병과 같이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면, 약을 먹는 등의 현실적인 조치를 취하면서도 그 상황을 수행에 유익한 조건으로 전환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자비와 이해를 더욱 깊이 기를 수 있습니다.
저는 휠체어를 사용해야 할 정도의 병을 앓게 된 한 친구를 기억합니다. 그는 그 경험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유익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온갖 일을 마다 않고 했지만, 그 병으로 인해 멈추어 서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명상하며, 영적인 길을 따를 수 있는 조건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세속적 행복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그것을 타인을 이롭게 하는 조건으로 활용합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고통이든 평범한 행복이든 과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풀리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출리의 두 수준을 구분하기
우리가 보통 겪는 고통, 즉 불행에서 오는 고통과, 더 나아가 평범한 행복조차 만족스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을 두 가지 시간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리에 대한 보다 넓은 범위의 이해, 즉 일반적으로 설명되는 출리란 통제되지 않게 반복되는 모든 윤회적 삶 속에서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돌아서고자 하는 결의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어떤 형태의 삶에서든 경험할 수 있는 불행뿐만 아니라, 그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까지도 모두 포함되며, 그러한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결단이 포함됩니다.
쫑카파 대사께서는 그의 짦은 경전인『도에 대한 세 가지 핵심』에서 출리를 두 가지 수준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훨씬 더 방대한 람림 저술들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고, 출리를 하나의 수준으로만 설명합니다. 이 짧은 글에서는 두 단계를 구분하는데, 더 높은 단계는 모든 미래의 삶에서 고통과 그 원인으로부터 벗어나 열반, 즉 해탈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단계로 그가 설명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이번 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집착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불행이나 일시적인 행복이라는 유형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생 자체와 이번 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집착 전체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신, 바로 다음에 이어질 삶이나, 더 일반적으로 미래의 삶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갖는 데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출리에서 우리가 갖는 목표는 특별히 불교적인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많은 종교들에서도 이번 생에 집착하지 말고, 예를 들어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전혀 불교만의 특징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형태의 태어남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동시에 해탈을 이루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의 임시적인 단계로서 비교적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수행의 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를 갖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와 재생이 전제로 깔려 있지만, 서구인들에게는 이것이 전제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삶에서도 해탈을 향해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유리한 조건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매번 더 나은 삶을 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년 더 좋은 새 자동차를 원하듯이 점점 더 나은 삶을 원해서 결국 가장 좋은 삶이 열반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해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일 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너무 많은 세속적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너무 많으면 사람은 매우 게을러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삶이 너무 편안하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는 동기가 사라집니다. 그런 상태를 출리하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상황을 아주 깊이 들여다 보며 그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실제로 매우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정신적, 정서적 문제를 많이 겪는 경우는 흔하므로 이는 비교적 분명한 예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적당한 정도의 행복입니다. 몸을 유지시켜 주는 좋은 음식을 적당히 먹는 것과 같습니다. 즉, 수행에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에너지와 시간을 온전히 쏟을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조건,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조건입니다.
앞서 가볍게 수행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안했듯이, 이런 수준의 출리조차도 윤회라는 개념 자체에 어려움을 느끼는 서구인들에게는 사실 매우 높은 단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 수행에 접근하기 전에 그보다 앞선 예비 단계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빠르게 달리고 있는 기차에 올라타려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 수행의 길은 이미 매우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서 그대로는 쉽게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더 이른 단계에서 그 기차에 올라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차가 충분히 속도를 늦춰야 우리가 탈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더 이른 단계를 추가할 때는 “이것은 기존의 가르침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추가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도 위반하거나 훼손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보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점은, 정통 법 전체를 결코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우리가 하는 어떤 준비 단계든 단지 준비 단계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직한 접근 속에서, 우리는 서구 수행자들이 처음에 보통 갖는 목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법의 방법을 통해 이번 생의 윤회적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쫑카파 대사가 이 글에서 정식화한 방식과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쫑카파 대사는 두 단계를 이번 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미래의 삶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 그리고 미래의 태어남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목표로 삼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이와 관련해 늘 “반/반이 가장 건강한 접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극단적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생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생 또한 돌봐야 합니다. 두 번째이자 더 높은 단계는 미래의 태어남,우리가 미래의 삶을 대비하는 이유는 만약 이번 생에서 해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다음 삶이 이미 잘 준비되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 그 부산물로서 더 낮은 목표들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건강한 가볍게 수행하는 법의 단계는, 지금 이 순간의 즉각적인 만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삶의 장기적인 결과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후반부에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고려하고, 젊은 시절에 약물이나 난폭한 행동으로 몸을 혹사하거나 나쁜 자세로 생활하면서 “이것이 나중에 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무 살에 컴퓨터 앞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가 나중에 관절염에 걸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대승의 관점을 약간 가미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서구적 사고에도 수용 가능한 방식으로 내생에 대한 관점을 조금 덧붙일 수도 있는데, 이는 미래생을 사고하는 데 있어 매우 좋은 중간 단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상황에만 집착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우리의 행동이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데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원을 무분별하게 착취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대신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녀와 손주들, 그리고 우리 생애 이후의 미래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저는 이것이 매우 타당한 중간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쫑카파 대사께서 출리심이라는 유효한 중간 단계를 제시한 것과 유사합니다. 출리심이란 오직 현생에만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며,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현재만을 중심으로 한 집착에서 돌아서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유형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두 가지, 즐 불행에서 오는 고통과 변화 속에 있는 평범한 행복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 자체는 특별히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불교적으로 핵심이 되는 것은 세 번째 유형의 고통, 즉 이른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 다시 말해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결의입니다. 이것은 불행과 평범한 행복이라는 앞의 두 가지 고통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몸과 마음을 지닌 채 반복해서 이어지는 윤회적 삶 자체를 가리킵니다. 이 근본적인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모든 윤회적 삶에서 우리가 겪는 문제와 고통의 진정한 근원, 참된 원인은 우리가 흔히 ‘알지 못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무지’라고 번역되지만, 적어도 영어에서처럼 어리석다는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는 전혀 어리석거나 멍청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뜻도 아니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도덕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알지 못함을 두 가지 수준으로 구분합니다. 그 중 하나는 업, 즉 행위와 그 결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과는 물리 법칙이 아닙니다. 공을 차면 힘과 각도에 따라 일정한 거리로 날아간다는 식의 인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행동과 그 결과, 그리고 반드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만이 아니라, 지금의 행동이 미래에 우리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에 대한 인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무지하고 순진합니다. 정말로 알지 못하거나, 아예 그 결과를 생각하지 않기도 합니다. 혹은 “아무 영향도 없을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내 몸을 혹사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약물을 사용하고, 밤을 지새우며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을거야”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혹은 잘못된 믿음으로, “늘 술에 취하고 약물을 사용하면 행복해질 거야. 그러면 내 문제들이 사라질거야”라고 믿기도 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만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다루어야 할 핵심은 바로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알지 못함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에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게 될지를 생각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지금의 행동이 낳는 결과를 이번 생에서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나 즉각적인 결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강간하고 순간적인 쾌감이나 오르가즘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거나 누군가를 때리고 나서 잠시 기분이 나아지는 것처럼 바로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경험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성숙하는 결과’입니다. 이것이 기술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행동과 습관을 통해 우리 안에 축적되는 경향성들이며 이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상황과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포함해, 미래의 행동과 미래의 경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또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은 상태인지 나쁜 상태인지에도 영향을 미치며,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어떤 유형의 삶의 조건이나 태어남의 방향으로 끌려가게 되는가에도 영향을 줍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성숙하는 결과들이며, 이러한 결과들은 대부분 미래의 삶에서 성숙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이해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말하려 했듯이, 불교의 전체적인 설명에서 윤회를 제거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매우 진지한 수행자여서 한평생 정말 열심히 수행하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암에 걸려 매우 괴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는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의 경험을 이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이해 방식입니다.
물론 불교의 설명에는 우리가 겪는 일이 보상이나 처벌처럼 주어진다는 개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즉,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에 근거한 윤리는 불교 윤리가 아닙니다. 서구 문화에서 윤리는 두 가지 근원에 기반해 왔습니다. 첫째는 전능한 신이 정한 신의 법, 신성한 규칙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나쁜 존재가 되고, 죄책감을 느끼며, 처벌을 받습니다. 반대로 규칙을 따르면 우리는 좋은 존재가 되고 보상을 받습니다. 이것이 서구 윤리의 한 축으로, 성서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윤리의 핵심은 기본적으로 복종의 문제라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롭고, 동시에 매우 문화적으로 특수한 이해입니다. 특정 문화의 특징일 뿐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또 하나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법이 어떤 신적 존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입법 기관과 가은 사람들에 의해 정해집니다. 이것은 시민법입니다. 이 경우에도 핵심은 역시 법에 대한 복종입니다. 시민으로서 법을 잘 지키면 보상을 받고, 모든 것이 잘 풀리며, 법을 어기면 범죄자가 되어 처벌을 받습니다.
불교 윤리는 전혀 복종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때, 그것은 우리가 불순종했고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탐욕, 집착, 증오, 분노, 미숙함 같은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근거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정들은 파괴적이며 모두 무지에 기반해 있습니다. 반대로 건설적인 행동은 탐욕이나 분노, 미숙함 등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는 좋은 의도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 좋은 의도조차 완전한 무지와 섞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나, 다른 누군가가 파괴적으로 행동할 때,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불순종했고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결과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냥 몰랐을 뿐입니다. 이것은 이해의 결함입니다. 나방이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것은 나쁘기 때문도 아니고, “불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법을 어겼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한 예입니다.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나방을 보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너는 나쁜 나방이니 벌을 받아야 마땅해!”라고 생각하기 않고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 유형의 무지란 행위와 그 결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우리 행동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그 작동 방식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 결과는 복종이나 불복종에 따른 보상이나 처벌이 아닙니다.
이제 출리의 범위를 점점 넓혀 가며 세 단계, 즉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집착에서의 출리, 이번 생에만 집착하는 태도에서의 출리, 그리고 모든 미래의 삶에 대한 집착에서의 출리를 구분해 볼 때, 우리가 출리하고자 하거나 제거하고자 하는 첫 번째 고통의 원인은 바로 행위와 결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만족만을 원하면서, 그것이 이번 생의 후반부에 우리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한 채 파괴적으로 행동하거나, 혹은 더 일반적으로 이번 생 전체에서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삶에서 어떤 경험을 낳게 될지 알지 못한 채 파괴적으로 행동합니다.
거짓된 ‘나’와 관습적인 ‘나’를 구별하기
무지에는 두 번째 유형이 있는데, 이것은 훨씬 더 깊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알지 못함, 즉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알지 못함입니다. 대부분의 불교적 설명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무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정교한 불교적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단지 사람, 즉 나와 당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알지 못함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알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 지점에서 공성, 즉 공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가 등장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의 마음이 사실상 불가능한 방식으로 사물이 존재하는 모습을 환상처럼 투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으로서의 ‘나’에 대해, 마음은 몸과도 분리되고, 마음과도 분리되고, 감정과도 분리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단하고 분리된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이것은 여러 수준에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실제로 다루고 있는 수준은 그 ‘나’가 스스로 충분히 인식될 수 있는 존재. 즉 그 자체로 알려질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동시에 다른 어떤 것도 알지 않고서도 그 ‘나’ 하나만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거울을 볼 때를 생각해 봅시다. 어떤 모습이 보입니까? 우리는 “거울에서 나 자신을 본다”고 말합니다. 그렇죠? 실제로 그렇게 느낍니다. 우리는 “거울에서 몸을 보고, 그 몸을 바탕으로 나를 본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데서 탁자 다리에 발을 부딪혔을 때도 “내가 다쳤다”라고 말하지, 발과 통증을 따로 떼어 생각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발이나 통증과는 독립적으로 ‘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또 우리가 “나는 파트리시오”를 안다고 말할 때도, 마치 그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는 그에 대한 어떤 정보와는 별개로 단지 파트리시오라는 사람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는 나 자신을 안다”,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른다”, “나는 오늘 나답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찾아야 한다” 같은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모든 표현들은 우리의 마음이 자동으로 만들어 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의 알지 못함이란, 이러한 모습이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함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즉, 마치 굵고 단단한 경계선으로 둘러싸인 하나의 실체처럼 존재하는 ‘나’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거짓된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 근거해 행동합니다. 우라는 그 ‘나’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그래서 그것을 지켜야 하고, 주장해야 하고, 증명해야 하고, 끊임없이 개선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 거짓되고 단단한 ‘나’는 항상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단단한 경계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밖에 있는 저 사람들이 이 안에 있는 나를 위협하고 있다”, “나는 내 뜻대로 해야 한다”고 느끼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그에 근거해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맥락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무지의 형태입니다. 모든 불교 전통에서 공통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도하게 부풀려져 단단한 경계선을 두른 ‘나’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존재방식 입니다. 그것은 어떤 실제적인 것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이렇게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불가능한 ‘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이 방에 없고 다른 곳에 있다는 식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절대적인 부재를 말합니다. 이것이 아주 단순한 말로 설명한 공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다만 실제로 존재하는 ‘나’는 ‘관습적인 나’입니다.
관습적인 ‘나’와 거짓된 ‘나’의 차이는 아주 간단한 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해 봅시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이 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몸과 나, 두 가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둘은 서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일까요? 굵고 단단한 경계선이 각각 있습니까? 몸을 보지 않고도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따로 볼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마치 굵은 경계선을 두른 ‘내가’ 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의자 위에 몸이 있다는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렇게까지 생각합니다. “이건 내 의자입니다. 당신의 의자가 아니니 앉지 마세요!”
거짓된 ‘나’, 불가능한 ‘나’란, 이러한 경우 몸과 분리되어 있고, 몸과는 독립적으로 따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반면 관습적인 ‘나’란 몸과 관련해서 몸에 의존해서 인식되는 ‘나’이지, 단단하고 분리된 독립적 실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음 상태를 생각해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나는 우울하다”, “나는 슬프다”라고 말할 때. 마치 매 순간 변하는 감정 경험과는 분리된 어떤 ‘나’가 여기 따로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저기 슬픈 사람을 봐. 우울한 사람이야”, “나는 정말 우울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 변화하는 순간순간의 경험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나’를 전제합니다. 이 분리된 ‘나’, ‘불쌍한 나’라 바로 불가능한 ‘나’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관습적인 ‘나’란 매 순간 변하는 경험과 관련해서 인식되는 ‘나’입니다.
우리는 이 불가능한 거짓된 ‘나’를 믿습니다. 몸, 마음, 감정 등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는 ‘나’가 실제로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을 믿고, 그에 근거해 파괴적인 행동이나 순진한 방식으로 건설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 ‘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종종 파괴적으로 행동합니다. “당신이 한 말 때문에 내가 위협을 받는 듯 느꼈으니 소리를 질러야 타당해!” 혹은 건설적으로 행동하지만 그 이면에는 순진함이 깔려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길 바라고 인정해 주길 바라기 때문에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거야.”
결국 이 모든 혼란은 이 거짓된 ‘나’를 믿는 데서 비롯됩니다. 그것을 믿고, 그에 근거해 행동한 결과로 우리는 불행의 고통과 변화 속에 있는 평범한 행복의 고통을 계속해서 경험하게 되는 윤회적 삶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 즉 윤회 전체는 무지에 근거한 행동, 다시 말해 우리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생겨난 결과입니다. 이 상황이 특히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를 계속 유지하고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업을 경험하고 있는 단단한 ‘나’가 있다는 느낌이 계속 되고, 그 업의 결과에 근거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더 쌓고, 더 반복합니다. 이것이 윤회적 상황이 끔찍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는 한, 이 과정은 끝없이 계속됩니다.
고통의 원인을 올바르게 확인하기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 즉 윤회, 다시 말해 통제되지 않게 반복되는 태어남과 각 태어남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저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 부침을 반복할 뿐 어디에도 도달하지 않습니다.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 즉 세 번째 유형의 고통이며, 이는 불교에서만 설명되고 주장되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진짜 ‘출리’, 즉 본결적인 출리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버리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 윤회라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문제와, 그 원인을 알지 못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윤회로부터의 완전한 해탈, 즉 이른바 열반을 목표로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러한 태어남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 쉬어 가는 휴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합니다. 이것을 진정한 멈춤, 혹은 진정한 소멸이라고 부르며,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분명한 불교적인 특징입니다.
그런데 통제되지 않게 반복되는 태어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만 놓고 보면, 그것은 특별히 불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인도 종교들 역시 같은 용어, 즉 ‘윤회’와, 불교에서도 사용하는 약간 다른 표현인 ‘해탈’을 사용합니다. 그들 역시 같은 목표를 지향합니다. 즉, 윤회, 통제되지 않은 반복적 태어남으로부터의 해탈입니다. 이 점에서는 불교만의 고유한 특징이 없습니다. 불교적으로 독특한 점은, 고통의 진정한 원인, 윤회의 진정한 원인을 올바르게 규명하고, 그것을 버리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결단을 키운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출리를 키워 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된 초점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과 그 진정한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윤회를 더욱 강화시키는 조건들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단계입니다. 우리가 벗어나고자 결심하는 대상은 우리가 경험 속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 전체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급진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경험 자체가 바로 윤회, 즉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쫑카파 대사가 이러한 출리 이전에 더 이른 단계를 제안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준의 출리는 곧바로 뛰어들어 알기에는 너무 벅찹니다. 서구인들에게는, 쫑카파 대사가 제시한 이보다 훨씬 쉬운 첫 번째 출리 단계조차도 여전히 너무 높은 수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보다더 앞선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출리의 여러 단계들을 차례로 밟아갈 수 있습니다.
출리를 정말로 진지하게 갖추기 위해서는 출리가 두 방향을 동시에 향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고통을 향해 있으며 그것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해탈의 상태를 향해 있으며 그것을 성취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벗어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상태가 무엇인지, 그 두 가지를 올바르게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 고통과 그 원인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며, 이러한 해탈의 상태를 실제로 성취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만 가능하고 다른 하나는 불가능한 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맹신, 즉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혹은 “내 스승이 그렇게 말하셨으니 믿겠다. 나는 착한 제자가 되기 위해 그저 순응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라는 태도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자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존경한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금을 살 때와 같이 직접 시험해 보라.” 우리는 논리와 이성을 통해 해탈이 실제로 가능한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목표를 향한 우리의 지향은 결코 진실할 수 없고 안정적일 수도 없습니다.
보리심의 문제, 즉 모든 존재를 도울 수 없다는 상태에서 돌아서서, 대신 모든 존재를 도울 수 있게 되는 깨달음의 상태를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 역시 출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보리심에 대해 말할 때는 보통 출리에 포함된 “이 무능력에서 벗어나고 싶다”라는 측면은 강조되지 않습니다. 강조점은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 것,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리와 보리심 모두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다루어야 합니다. 즉, 윤회와 통제되지 않은 반복적 태어남,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 실제로 가능한가? 그리고 모든 존재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깨달음의 상태에 실제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먼저 우리는 이 두 상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위에 더해, 그것들이 정말로 가능한지에 대해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이론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 자신이 그것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확신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할 수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너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의 가능성, 즉 부처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는 공성에 대한 이해를 포함합니다.
질문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보면 그 ‘다른 사람들’ 역시 ‘거짓된 나’, 거짓된 자아에 대해 아주 깊이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도우려고 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도움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보살의 길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반드시 길러야 할 여러 가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마음 상태들이 있으며, 그것들을 길러 가는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평정심을 길러야 합니다.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덜 좋아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똑같이 도울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 즉 다른 이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행복의 원인을 갖기를 바라는 마음이 필요하며, 자비, 즉 다른 이들이 문제와 고통, 그 원인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단지 조금 표면적으로 돕겠다는 책임감이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책임감, 나아가 그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돕겠다는 전적인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깨달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 가능한 한 가장 온전히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리심이며, 우리는 자신 각자의 깨달음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태도를 길러갑니다. “나는 모두를 똑같이 돕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상대가 어렵다고 해서 낙담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후에, 흔히 ‘광범위한 태도들’, 혹은 ‘완성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필요합니다. 매우 관대해지는 것, 단지 꽃을 선물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까지 기꺼이 내어주는 것 말입니다. 또한 윤리적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해로운 행동을 삼가는 절제, 실제로 자신을 훈련하는 절제, 그리고 기분이 내키지 않더라도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행동하는 절제 말입니다.우리가 도움을 주려 할 때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거나, 우리가 제안한 것이 효과가 없을때에도 화내거나 낙담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는 끈기,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 즉 자신을 훈련하고 다른 이들을 돕는 일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이후에는 마음의 안정성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집중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안정성도 포함합니다. 기분의 변덕이 없고, “저 사람은 잘생겨서 끌린다” 같은 식으로 쉽게 산만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물론 분별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무엇이 도움이 되는지, 무엇이 해로운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단지 투사이거나 환상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살 수행은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기르는 데 있어 매우 광범위하고 능숙한 방법들에 대한 깊은 이해 역시 포함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능한 한 최대로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부처가 된다해도 손가락을 딱 튕겨서 전지전능하게 모든 사람의 고통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부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조언을 줄 수 있고, 가능한 한 최대한 도울 수는 있지만, 그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의 몫입니다. 상대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모든 존재의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은 동일합니다. 바로 이 알지 못함입니다. 부처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가능한 한 능숙한 방식으로 현실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대신 이해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각자 스스로 이해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삶을 준비하고 미래의 태어남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또는 좋은 인간의 삶을 얻는 것이 꽤 쉬운 일처럼 들립니다. 그렇데 저는 그것이 매우, 매우 어렵다고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무런 원인도 쌓지 않는다면 좋은 인간의 삶을 얻는 것은 정말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백만 생 전의 어떤 행동 덕분에 저절로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삶에서 그 원인들을 강하게, 의식적으로 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윤리적 자기 절제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동물은 할 수 없습니다. 동물은 본능에 압도됩니다. 고양이는 쥐를 괴롭히고 사자는 사냥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통제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좋은 인간의 삶을 얻기 위한 진지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저는 착하게 살아왔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제가 항상 부처님을 찬탄하니 베풀어 주세요.”와 같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도와 긍정적인 에너지를 강하게 방향 짓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서원을 포함한 헌신적인 발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 왔고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건설적인 행동의 긍정적인 힘으로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좋은 인간의 삶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언제나 좋은 인간의 삶을 얻고, 언제나 법을 만나고, 언제나 훌륭하게 자격을 갖춘 스승들의 보살핌을 받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기도를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티베트의 간덴 사원에서는 겔룩파 종단의 수장 자리가 되는 매우 높은 법좌, 즉 간덴 법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원 안에는 동물들도 있었는데 한 마리 소가 법당 안으로 들어와 그 법좌 위에 앉았습니다. 승려들은 매우 놀랐고, 그곳에 있던 한 위대한 스승에게 “이것의 원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존재는 전생에 간덴 법죄에 앉을 수 있기를 기도했지만 기도가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리적 자기 절제와 구체적인 기도에 더해, 우리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와 같은 다른 육바라밀의 태도들도 함께 쌓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좋은 인간의 삶을 얻는 원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