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내려놓기

서론

이번 주말에 저는 “불교를 삶 속으로 가져오기”라는 그리 정의하기 쉽지 않은 주제로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주말에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제 마음속에서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 자신의 경험에서 불교를 다루며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고, 제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특별히 관련이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말해 주신다면 그 어려움을 듣는 것이 이 과정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의 방향이 불교의 어떤 특정한 점에 대한 기술적인 질문을 하는 데만 머물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법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따르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반적인 문제들, 예를 들어 스승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거나, 스승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거나, 탄트라와 관계 맺는 데 어려움이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 방식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마치 초콜렛 상자에서 초콜렛 하나를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불교 가르침을 시작하는 표준적인 방식은 우리의 동기를 확립하거나 설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릿속으로 단지 말을 하는 것과 실제로 가슴과 몸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것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을 알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는 압니다. 그러나 동기를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문제들이 이번 주말에 다루기에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은 꽤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저는 “부처에게는 깨달음의 표지가 몇 가지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숫자를 대답하는 것보다 이런 문제들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하려고 할 때 저는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저는 사물이 꽤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생겨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모든 것은 논리적인 순서로 정리되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가 통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통제하고 있고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혹은 적어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항상 통제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항상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편에는 우리가 통제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통제하거나 우리가 처한 상황을 통제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 역시 같은 통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든 다른 누구든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놓아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놓아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어떤 일이 일어나든 통제하려는 단단한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단단한 “나”는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안전한 존재를 확립하려고 합니다. 마치 “통제하면 내가 존재한다. 통제하지 못하면 나는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의 길을 따를 때 여러 면에서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통제권을 다른 사람, 특히 구루나 스승에게 넘기는 것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같은 문제입니다. 통제의 양쪽을 모두 극복해야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매우 인간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므로 서로를 인간으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해답을 가지고 단상 뒤에 서 있는 권위자로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고 통제하려 하거나 이 과정을 논리적인 순서로 진행하려 하기 보다는 이번 주말이 그림을 그리듯 펼쳐지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 붓질 하나, 저기 붓질 하나 칠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논의할 많은 주제들이 서로 겹치고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콜릿 상자의 첫 번째 조각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저는 아직 그것을 다 씹지 못했으니 여러분도 아직 다 씹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동기를 느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제 자신의 과정에서 이것을 이미 직접 겪어 보았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감정은 극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극적이면 감정으로 인정되고 존재하는 것이고, 극적이지 않으면 감정으로 인정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은 아마 영화와 텔레비전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미묘한 내용으로는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배경에 감동적인 음악이 깔리며 극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불교 경전에서 이런 말을 읽습니다. “우리의 자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감동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은 꽤 어려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기를 일으킨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때때로 “나는 뭔가를 느껴야 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해야 한다”라는 말은 이번 주말에 여러 번 다시 돌아올 주제입니다. 우리는 “강한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진짜로 동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는 동기를 일으킬 때 그것은 대개 거의 감각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만큼 미묘합니다. 팔의 털이 곤두서는 것보다 훨씬 미묘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단상 뒤에서 말하는 대신, 불교에서 여러 수행을 해 오며 제가 겪은 경험과 서양인으로서 우리가 흔히 겪는 전형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나누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런 방식으로 해 봅시다.

우리는 가르침에서 늘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모든 존재를 어머니로 보라.”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이나 이미지를 가장 가까운 친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강하고 긍정적인 정서적 유대를 느끼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밤 동기를 설정할 때, 저는 청중 여러분 모두를 제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진실합니다. 어떤 연기를 하거나 가면이나 역할 뒤에 숨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와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향해 진심 어린 무언가를 느낍니다. 항상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가 분명 존재합니다.

“모든 존재를 어머니로 보라”는 가르침을 “모든 사람을 가까운 친구로 보라”는 뜻으로 적용하기 시작하면 실제로 어떤 동기가 생깁니다. 우리는 진실한 동기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의미 있고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이기적이어서 그 사람을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을 뜨고 있는 것의 중요성

또한 저는 자타평등과 자리교환 수행을 할 때, 눈을 감고 관상 형식으로 수행하면 마음이 움직이는 느낌을 잘 경험하지 못합니다. 물론 눈을 감고 가장 가까운 친구를 떠올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눈을 뜨고 사람들을 보면서 수행할 때 훨씬 더 의미를 느낍니다.

혼자 수행할 때는 물론 상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상상하기 어렵다면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을 관상하더라도 추상적으로 “모든 중생”이라고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저는 눈을 감아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눈을 뜬 채로 유지하려고 하합니다.

탄트라 수행에서 관상에 대한 지침을 보면, 예를 들어 무상요가탄트라의 생기차제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의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각의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의식으로 관상할 수 있는 것은 원만차제에서만 가능합니다. 원만차제는 매우 높은 단계로 감각 세포의 에너지 바람을 실제로 조작하여 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생기차제에서는 우리가 지각 방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각한 것을 개념화하는 방식을 바꾸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평범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대신 그것을 본존이나 부처 형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게 법을 수행하려면 처음부터 배운 모든 것을 함께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본존으로 관상하든, 이 경우처럼 모든 사람을 가장 가까운 친구나 어머니로 관상하든, 처음에는 감각 지각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을 볼 때 우리가 개념화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 “개념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념적 인식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다면, 우리는 인식론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개념적 인식이란 눈앞의 대상, 예를 들어 물리적 대상과 어떤 범주의 개념을 섞는 것이라고 배웁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범주를 단지 머릿속 이미지와 결합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그 사람을 보면서 동시에 그 범주를 적용할 때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힘이 생기는 방법은 눈을 뜬 채로 명상을 하고, 실제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치 않습니다. 다양한 수행에서 정말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요소입니다. 티베트 대승 불교 가르침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명상은 눈을 뜨고 하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혼자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특히 쉽게 산만해지는 사람이라면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집중이 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된 상태라면, 수행을 실제 삶 속의 사람들에게 적용할 때 훨씬 더 의미가 깊어집니다.

예를 들어 동기를 일으키는 수행을 생각해 봅시다. 제 개인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 방 안에서 저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여러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여러분과의 관계를 느껴 봅니다. 여러분이 정말 가장 제 친한 친구라면 저는 여러분에게 허튼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진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친구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 시간이 당신에게 의미 있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같은 말을 되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가장 친한 친구처럼 바라보면서 만들어 놓은 마음 상태를 조금 더 의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 팔의 털이 곤두서는 특별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 사이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이 분명히 생깁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가 버리는 아주 단순한 것들에 대해 실제 감각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주절 주절대며 동기를 세운다고 말을 합니다. 대개는 그 말을 티베트어로 외우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에게는 우리가 외우는 말 자체도 사실 별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것들을 실제로 연습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번 주말이 저 혼자만 계속 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모임이 아니니까 원형으로 앉아 보면 졿겠습니다. 줄을 지어 앞뒤로 앉아 있으면 계속 베개를 바라보거나 앞사람의 뒤통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꽤 어색해집니다. 원형으로 앉으면 서로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보려는 것은 동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실 “동기를 세운다”라는 표현은 조금 인위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저는 번역가라서 단어 바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안에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분위기는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어떻게 느끼나요? 아주 편안합니다. 우리는 연기하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느낌도 없습니다. 어떤 모습인 척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역할을 맡을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 언어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실 불교적으로 보면 그다지 불교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도리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벽을 내려놓기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모든 벽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방어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그저 함께 있고 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어떤 기쁨이 있습니다. 아주 극적인 기쁨은 아니지만, 분명히 어떤 편안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진심 어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진솔한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 보려는 것은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각과 시각적 인식이 함께 작용합니다. 눈을 감고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 느낌이 생기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눈을 뜨고 실제로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상”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꾸는 것은 지각의 방식, 다시 말해 우리가 상대를 바라볼 때 어떤 생각과 어떤 마음 상태로 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에 필요한 느낌은 편안해지고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벽이 내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벽이 내려오면 우리는 진심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를 바라보면서 한 번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수행을 위한 잠시 멈춤]

이제 여기에 한 가지 마음을 더 더해 봅니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이것은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 다시 말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 내가 도와야 하는데, 뭘 해야 하지? 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도울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수행을 위한 잠시 멈춤]

긴장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기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진심으로 어떤 느낌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핵심은 먼저 벽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통제력을 잃게 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벽 안에 갇혀 있는 “단단한 나”가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긴장을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긴장을 푼다는 것은 단지 근육을 풀거나 몸의 긴장을 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일부이긴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이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성, 즉 공에 대한 가르침을 어느 정도 이해할 때 가능해집니다. 공성은 흔히 “비어 있음”이라고 번역되지만, 실제 의미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독립적이고 단단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혼자서 독립적으로 단단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자기 의식, 불안감, 자기 집착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공성 이해가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가르침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성을 깊이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어느 정도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동기를 세우고 삶의 상황에 들어가면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연기를 해야 하거나 꾸며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팔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취업 면접을 보듯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할을 연기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어도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자신과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자아에 대한 이해, 다시 말해 자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해, 즉 공성 이해와 연결됩니다. 자아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역시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벽을 다 내려놓으면 상처받기 쉬워지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술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가 몸이 굳어 있고 긴장해 있으면 누군가 공격해 올 때 빠르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의식이라는 벽이 내려가 있으면 우리는 상황을 훨씬 더 또렷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훨씬 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벽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벽을 내려놓으면 상처받을 거야.” 하지만 사실 우리는 벽을 세워 놓음으로써 이미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직접 경험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인 “이해”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추론적 이해에 기반해 감정을 만들어 내기

많은 사람들이 불교, 특히 티배트 불교의 논리와 추론 중심의 접근을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런 방식으로 항상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해라는 것은 반드시 무거운 지적일 과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알람 시계가 울립니다. 우리는 그것이 일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왜 일어날 시간일까요? 알람 시계가 울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의식적인 논리적 추론이 있습니다. 또한 뇌는 무의식적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논리적 추론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알람 시계가 울리면 일어날 시간이다. 알람 시계가 울렸다. 그러므로 지금은 일어날 시간이다.” 우리는 이것을 논리적 삼단 논법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이런 것을 무거운 지적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티베트어에서도 바로 이런 것을 “표지”라고 부릅니다. 알람 시계가 울리는 것은 우리가 일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의지하는 표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을 가장 친한 친구로 보는 것도 하나의 신뢰할 수 있는 표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벽을 세워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 주는 표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어떤 연기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알까요? 어떤 표지를 보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추론하기 때문입니다. 그 표지는 바로 우리가 그 사람을 가장 친한 친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론적 이해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무거운 논리 과정이 아니라 단순한 추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은 이해와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것이 지적인 이해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것으로 어떻게 넘어가는지 혼란스러워합니다. 서양식 사고 방식에서는 지성과 감정을 서로 관련이 없는 두 가지로 분리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먼저 감정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느끼는 것, 즉 그것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믿음에 기반해 생기는 감정적인 느낌입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사릴로 믿고 그에 대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한 존재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표지에 의존에 어떤 것을 이해합니다. 그것을 논리적인 형태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있다면 방어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그러므로 나는 방어할 필요가 없다.” 이 이해는 논리적인 삼단 논법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지적인 이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핵심을 놓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벽이 내려오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벽이 내려오지 않고 우리가 편안해지지 않는다면, 보통 문제는 우리의 이해나 믿음에 있습니다. 물론 삶에서 다른 일들 때문에 긴장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이해와 사실이라고 느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서 생기는 감정 사이의 연결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로 알람 시계가 울리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추론을 통해 “지적으로” 이것이 일어날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 그 순간의 느낌에 집중해 봅시다. “지금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여기에서 어떤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면 일을 하러 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늦게 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무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더 깊은 수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감정적 문제와 마주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들은 것, 이해한 것, 즉 정말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침대에서 일어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왜 그 결정을 하는지에 대한 부차적인 이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의무감 때문일 수도 있고, 죄책감 때문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의무감만은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충분히 일찍 일어나면 몇 분 정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면서 하루를 더 편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날 때 더 긍적적인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해를 바탕으로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일어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면 집을 나갈 때 훨씬 더 여유롭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분 안에 모든 것을 챙겨 뛰어나가야 하기 때문에 정신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것에는 여러 장점이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는 것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현실은 우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분노를 느끼든 편안함을 느끼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일어나는 것의 단점을 생각할 때 분노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따뜻하고 아늑한 침대에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일어나는 것의 장점을 생각하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불교 가르침의 구조를 보면 항상 각 가르침의 장점을 설명합니다. 벽을 내려놓는 것의 장점, 모든 존재를 어머니처럼 보는 것의 장점, 귀한 인간의 삶을 기억하는 것의 장점, 무상을 기억하는 것의 장점 등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의 장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다시 이해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이해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이해한 것을 얼마나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이해한 것을 받아들이기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사실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알람 시계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은 삶의 다른 예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콜릿 한 조각을 먹고 싶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집 안을 둘러보았는데 초콜렛을 찾을 수 없다면 논리적인 결론은 집에 초콜릿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꽤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집 문이 잠겨 있고 우리가 집 밖에 서 있다면 주머니와 가방을 모두 뒤져 열쇠를 찾습니다. 열쇠는 그 중 어딘가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없다면 우리는 열쇠를 잃어버렸거나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타당한 표지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집 밖에 갇힌 셈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시 또 열렬히 찾아봅니다. 이런 예들은 비교적 쉬운 예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견고한 “나”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이해하는 것에서 실제로 그것을 정서적으로 느끼는 것으로 넘어가는 문제는 우리가 그 과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때문에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것에서 감정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보고, 이 둘이 완전히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이해에서 느낌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더라도 저는 이것이 더 건설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해한 것을 받아들이는 문제 때문에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벽을 내릴 용기를 얻기

자,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더 쉬운 예로 돌아가 봅시다. 어떻게 벽을 내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누가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그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면 받아들이기가 더 쉽습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이해할수록 받아들이기가 더 쉽습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벽을 내리는 것의 이점을 이해하고 그것이 참이라고 받아들일 때 실제로 벽을 내리려고 시도합니다. 또 다른 의견이 있습니까?

어떤 것을 받아들이려면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냥 먼저 시도해 봅니다. 물에 뛰어 들었는데 가라앉을 수도 있지만 처음에는 가라앉는 경험을 해보기 위해서라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벽을 내리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벽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조차도 처음에는 어떤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이해는 우리가 관계 속에서 벽을 내리지 않알을 때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에 대한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하고, 또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 사람 안에서 벽이 내려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 보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시도해 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림의 한 부분, 즉 여기서 “스승”에 해당하는 부분에 작은 붓질을 하나 더할 수 있습니다. 벽이 내려진 상태의 본보기를 실제로 보여 주는 누군가를 통해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올바른 스승이어야 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올바른 스승에게서는 벽이 내려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 살아 있는 예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어 우리 스스로 시도해 보게 합니다.

벽을 내리는 법을 배우기

어릴 때에는 이런 벽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쁜 경험들, 학대받은 경험들 때문에 우리는 벽을 쌓아 올립니다. 그래서 이제 벽을 내리려고 하면 여전히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은 불교를 접했기에 벽을 내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의 열린 상태를 악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제가 말하고 싶었던 지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벽을 내리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것을 느끼거나 일으킬 수 있을까요? 벽을 실제로 내려 보았을 때 그 이점을 직접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이점이 항상 즉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학습 방식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때때로 우리가 벽을 내렸다가 상처를 받는 경우입니다. 이것 역시 과거 경험에서 옵니다. 때로 우리는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고 이용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문제는 벽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와 관련해 상황을 다루는 방식에 부적절한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화를 냈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벽을 올렸거나 내렸거나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벽을 내렸고 취약한 상태였는데 그 사람이 화를 내며 심한 말을 쏟아 냈고 나는 상처를 받았어.” 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벽을 올리고 있었다면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방금 표현한 방식은 사실 꽤나 비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벽이 올라가 있었다면 어떻게 상처를 받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요? 그 상황은 실제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는 벽을 올리고 있었든 내리고 있었든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큰 진흙 덩어리를 던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냥 우두커니 서서 그것을 얼굴에 맞는다면 이는 우리 자신을 매우 견고하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우 유연하다면 약간 옆으로 틀어 얼굴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난 말은 우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 사람은 단지 기분이 나빴을 뿐이고,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유연하게 화난 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래서 그것이 얼굴에 맞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매우 견고하게 보고, 경직되어 있고,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면 벽이 내려가 있을 때 우리는 매우 취약하고 모든 것은 그대로 얼굴에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그러나 같은 견고한 “나”의 감각을 가지고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한, 벽을 올린다고 해서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니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벽 뒤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받거나, 상처받는 것을 차단하지만, 실제로 내면은 상처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의 상태일 뿐이며 사실 우리는 매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것이 벽 뒤에 웅크리고 있는 견고한 “나”입니다.

아마 저는 지적으로 그 문제와 견고한"의 공성에 대한 불교적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상처받는 느낌이 있을 때 저는 그것을 그 느낌을 적용할 수 없고 그 이해를 감정 속에 통합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상처를 받았을 때그래, 자아는 없다라고 알 수는 있지만 저는 여전히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없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상처받는 느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길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비개념적 인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고통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개념적 인식은 서서히 우리 안에 스며들어야 하고 오랜 시간과 풍부한 경험을 통해 깊이 자리 잡아야 비로소 괴로움을 실제로 제거합니다. 공성의 비개념적 인식을 가진 아리야 성자와 영원히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해탈한 아라한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각 개인이 해탈에 이르는 정상적인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성제를 기억해야 합니다.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공성을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가 즉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고통입니다. 괴로움은 즉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고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여전히 상처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는, 그 느낌에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상처는 훨씬 더 빨리 지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눈에 띄는 차이입니다. 우리는 그 정도의 결과에 만족해야 하고, 점점 더 익숙해지면서 효과는 더 좋아집니다. 그 정도에서 낙담해서는 안됩니다. 되려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아니오라고 말하기

벽을 내리는 것과 관련하여 제가 언급하고 싶은 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벽을 내리면 항상 “예”라고 말해야 하고 누구에게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경험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상처받기보다는 자신이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필요를 돌보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이 점을 인지하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과 자신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 벽을 다시 올리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벽을 다시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벽을 다시 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완전히 열려 있고, 완전히 수용적일 수 있으며, 단지 “정말 미안하지만 그것은 할 수 없어요” 또는 “지금 저는 쉬어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여전히 개방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견고한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불쌍한 나, 이용당하고 있어”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매우 화가 납니다. 또는 내가 “아니오”라고 말하면 저 사람이 나를 버릴지도 모르니 입을 닫고 있어야 한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적대감, 죄책감, 분노를 이 “나”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모ㅓ든 것은 견고한 “나”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버려야 할 것은 그 오해입니다.

벽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대응

제 삶에서 늘 반복해서 생기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기대를 합니다. “내가 벽을 내렸다면 다른 사람들도 벽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 왜 그들은 벽을 내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이 벽을 계속 올리고 있으면 저는 매우 화가 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첫째는, 최근 기차에서 한 여성과 나눈 대화입니다. 제가 불교를 가르치고 있고 이기심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기적인 게 뭐가 잘못됐죠? 모두가 이기적이라면 내가 이기적이지 않으면 바보 아닐까요?” 지금 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모두가 벽을 올리고 있는데 내가 벽을 올리지 않으면 내가 바보고 손해라는 것이지요. 제가 그녀에게 한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논리라면 모두가 돌아다니며 사람을 쏘고 있는데 당신만 사람을 쏘지 않는다면 당신이 바보라는 말이 되겠네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쏘는 것의 이점과 단점, 그리고 벽을 올리는 것의 이점과 단점에 대해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제 어머니의 예입니다. 어머니는 뉴스를 보면서 매우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날 일어난 살인, 강도, 강간 사건들을 보고 들으면 이렇게 화를 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하는 거지?”

여기서 핵심은 독선, 즉 자기 의로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우 노골적인 방식으로 독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그런 유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미묘한 방식으로도 독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그런 미묘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한데 다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나쁠까?”하는 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모두 견고한 “나”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즉 우리는 벽을 내리는 것처럼 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 혹은 사람을 살생하거나 훔치지 않는 것과 같은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우리는 그것과 견고한 “나”를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이 “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하게 거부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이 “나”가 덜 위협받고 더 안전해지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다름의 예를 통해 우리가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컵에 담긴 물을 마십니다. 개는 우리처럼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만약 많은 개들이 있고 모두가 바닥의 그릇에 담긴 물을 혀로 핥아 마신다고 해서 우리가 올바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고 있고 개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마시고 있으니 우리가 옳고 개들이 나쁘다고 느끼나요? 아닙니다. 그것이 왜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가 개방되어 있고 주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 때는 긴장하게 될까요? 그것과 우리가 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저는 그 차이가 특정한 입장과 견고한 “나”를 동일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물을 마시는 방식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개가 어떻게 마시는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견고한 “나”는 “나는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데.. 이렇게나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있는데..”라며 초조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림의 또 다른 부분에 작은 붓질을 하나 더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처럼 행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화가 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말입니다. 이것은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문제에 대한 붓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거나 하든 신경 쓰지

저는 또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데 누군가가당신은 형편없어라고 말하면 화가 납니다. 그러나 당신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가 열 번이나 그런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어떤 이유로 당신의 아내를 데려가려고 하고 붙잡아 두고 싶어 한다면 당신을 맞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아내가 떠나고 싶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겠다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붙잡고자 하는 욕망이 없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궁극의 진리와 세속의 진리라고 부릅니다. 궁극의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사물들이 견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봄으로써 집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속의 진리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일 것과 거부할 것”일 있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닫혀 있는 것보다 열려 있는 것이 더 이롭고, 누구든지 아내를 침해하여 데려가도록 두는 것보다 보호하는 것이 더 이롭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궁극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두 진리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무리 수행

이제 오늘 저녁 세션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체험적인 수행을 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도 주변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열어보는 방식으로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은 벽이 내려간 단단한 “나”가 있어서 누군가 진흙을 던졌을 때 퍽! 하고 얼굴에 맞는 그런 의미의 열림이 아닙니다. 오히려 벽이 내려가 있지만, 상처받을 어떤 단단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움 때문에 강하게 집착하며 방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어디에서 올까요? 두려움은 상처받을 수 있는 단단한 “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관습적 진리의 차원에서는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던지면 우리는 옆으로 피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을 우리는 분별하는 지혜, 즉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처리합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자기중심적 판단과는 다릅니다,

벽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유연함과 관련이 있습니까? 좋은 말을 듣든 나쁜 말을 듣든 여전히 도움을 베푸고 싶다면 그것은 우리가 유연해졌다는 의미인가요?

맞습니다. 벽이 내려와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벽이 올라가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매우 경직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온몸에 벽을 둘러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벽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상당 부분 유연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유연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벽을 내려놓는 것이 단지 유연해지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요?

정확합니다. 그것은 단지 유연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황에 맞게 다른 사람과 제대로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벽을 내려놓으면 더 민감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더 민감해지면 더 유연해집니다. 우리가 더 진심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벽이 내려와 있고 우리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분별하는 지혜를 갖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분별하는 지혜와 방편은 벽이 내려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공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 식으 열린 마음을 만들어 내지 못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가장 친한 친구로 보는 것을 통해서도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같은 결과, 예를 들어 벽을 내려놓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의 공성에 대한 가르침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해에 이르는 데에는 많은 다른 길이 있고, 이해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의 관점에서 이러한 열린 마음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 열린 마음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도움이 됩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합니다. 자비와 지혜입니다. 기억하시죠? 그것은 새의 두 날개에 비유됩니다.

다른 존재에 대한 책임을 지기

하지만 만약 상대를 가장 친한 친구로 본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저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왜 두려워 할까요? “나”의 실패를 두려워 하는 단단한 “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에 또 하나의 붓질을 더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과의 공성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부처님께서 드신 전형적인 예가 있습니다. 물 한 양동이는 첫 번째 물방울이나 마지막 물방울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물방울이 함께 모여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우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나”를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입니다. 결과는 수많은 원인들이 함께 모여서 생깁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 사람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것이 전적으로 내 책임이고 나는 실패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극단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돕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대부분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에 작은 붓질을 하나 더하는 것과 같은 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앞으로 점점 더 깊이 탐구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생각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이것을 해야 한다”, “나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 “나는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이 잘 되지 않아 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자연스럽게 신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방식의 많은 부분이 바로 그 개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신처럼 전능해야 하고,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무엇이든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상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일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몇 분 동안 두려움 없이 마음을 열어 보는 것으로 오늘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런 바람을 가져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이렇게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존재가 이렇게 할 수 있기를.”, “그리고 내가 모든 존재가 이렇게 되는 것을 도울 수 있기를.”

그리고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왜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수행을 위한 잠시 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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