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션 6: 두 가지 추가 주제– 불교도가 되는 것과 행복

불교로의 개종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수행하면서 겪는 여러 어려움들에 대해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서양인들에게 반복해서 하시는조언 가운데 하나는, 종교를 바꾸는 문제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언은 결국 이런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교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과연 종교를 바꿨다는 뜻인가? 개종했다는 뜻인가? 그래서 이제는 목에 십자가 대신 붉은 실을 걸게 되었다는 말인가?

여러 면에서 볼 때, 불교의 길에 대한 헌신을 “개종”이라는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불교로 개종했다"고 말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속해 있던 전통의 사람들을 상당히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기독교든 유대교든, 특히 이슬람 문화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종교를 떠나는 일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대체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개인적인 거부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이 문제를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단지 가족이나 사회라는 사회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관점에서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에서는 자기 삶 전체를 조화롭게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삶의 각 부분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 삶 전체의 역사와도 편안하게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삶을 통합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사람은 훨씬 더 균형잡힌 상태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른 종교로 개종할 때 종종 일어나는 일은 자신이 이전에 해오던 것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조상이나 가족, 혹은 자신의 배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충성의 욕구, 다시 말해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는 충동은 대개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작동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자기 과거 안에 어떤 긍정적인 면도 없다고 부정해버리면 - 예를 들어 종교나 가족, 혹은 국적 등의 안에 -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그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충동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그 과거의 부정적인 측면들에 충실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파괴적인 형태의 충성입니다. 

파괴적인 충성의 형태

이런 파괴적인 충성의 좋은 예는 구 동독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겪었던 경험입니다. 동독이 서독에 통합되는 과정 전체에서 동독의 정치문화 거의 모든 것이 부정되었고 “잘못된 것”,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전 체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버려졌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었으며 평생을 부정적인 무언가를 위해 낭비해버렸다는 끔찍한 감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국가를 지지하며 정치적으로 적극 활동했던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동독 출신의 일부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느끼기 위해 자기 과거에 충실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욕구가 생겨났고, 결국 전체주의 같은 부정적인 요소들에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스킨헤드나 네오나치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네오나치즘은 외국인에 대한 강한 혐오와 자기 자신 및 자기 만족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배타성은 동독 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자기 과거 안에 있었던 긍정적인 측면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 긍정적인 부분들에 충실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삶 전체도 훨씬 건강하게 통합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동독 사회에도 긍정적인 면은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서로를 신뢰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사람들 사이에는 매우 따뜻하고 진심 어린 관계들이 존재했습니다. 모두가 외부로부터 강한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전한 친구 관계 안에서는 아주 깊고 따뜻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긍정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종교를 바꿀 때에도 같은 문제가 자주 나타납니다. 만약 우리가 “내가 이전에 믿던 종교는 어리석고 형편없었다"고만 생각한 채 불교 같은 새로운 종교로 뛰어들게 되면, 무의식 속에서는 다시 자기 과거에 충실하려는 충동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사람은 긍정적인 면이 아니라 부정적인 면에 충실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도 모르게 매우 교조적으로 되거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 강하게 사로잡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상당히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태어나면서 접했던 종교 안의 긍정적인 요소들, 가족의 종교 안의 긍정적인 요소들, 그리고 자기 문화 안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인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독일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미국인이든 자신의 배경 안에는 분명 긍정적인 측면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 배경 안에도 분명 엄청나게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자선에 대한 강조,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대한 강조는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수행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동시에 기독교인이면서 불교도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적 배경 안에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을 굳이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저는 그것이 불교에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처럼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를 따져 묻고, 종교 재판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증명해야 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방식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전통 인도 사회에서 재가 불교도의 위치

이 점은 고대 인도의 사례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불교가 발전했던 고대 인도에서는 불교도와 힌두교도 사이에 아주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도의 불교에는 카스트가 없었고, 부처님께서는 카스트 제도에 반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출가 공동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승려와 비구니 공동체 안에는 카스트가 없었지만, 재가 불자들에게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대 불교 사원의 폐허 벽면에 남아 있는 비문들을 보면, “어느 브라만이 얼마의 돈을 이 사원에 기부했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비문들에는 항상 그 재가 후원자의 카스트가 함께 적혀있었습니다. 이것은 재가 불자들이 힌두 사회와 분리된 독립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 아니라, 힌두 사회의 일부였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 말은 곧 인도에는 별도의 불교식 결혼 의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도의 재가 불자들은 실제로 그런 부분에서는 힌두 관습을 따랐습니다.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었습니다. 장점은 기본적으로 인도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통합된 사회 안에 속해 있었고, 각자가 자기 학파와 자기 영적 스승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불교 학파를 따르든, 혹은 어떤 형태의 힌두교를 따르든, 그것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사회 자체가 모두를 조화롭게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강하게 “나는 힌두교도다” 혹은 “나는 불교도다”라고 자기 정체성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승려나 비구니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분명 독립된 공동체에 들어가는 강한 헌신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전통 인도 사회 안에서 재가 신도들이 차지했던 위치입니다. 

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 인도에서 불교 사원들이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매우 쉽게 힌두교 안으로 흡수되었습니다. 특히 힌두교에서는 부처님을 자신들의 비슈누의 한 화신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귀의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훌륭한 힌두교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입니다.

불교를 따르면서도 교회에 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결국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한편으로는 불교를 너무 가볍게 여기며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극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이제 불교로 개종했으니 절대로 교회에 가면 안 된다”는 식의 극단도 있습니다. 결국 핵심은 이것입니다. 귀의 의식을 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이 기독교의 세례처럼 “이제 나는 불교도가 되었다”는 선언과 같은가? 저는 그것을 세례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 영적인 길이라는 것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조용한 것이어야 합니다. 목에 낡은 붉은 실을 여러 개 걸고 다니는 모습, 특히 그런 실이 서른 개쯤 된다면 꽤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목에 금속 고리를 여러 겹 두른 어떤 부족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그런 실을 갖고 싶다면 지갑 안에 넣어두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간직하면 됩니다. 굳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에 광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불교를 수행한다고 해서 교회에 가는 것이 금지된 일이라거나, 그것이 불교 수행에 위협이 된다고 느낄 이유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처음 불교를 접할 때는 종종 방어적으로 변합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고 스스로도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심리 때문에 “나는 이제 교회에 갈 수 없어" 혹은 “내 과거에는 긍정적인 게 하나도 없었어"같은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물론 진지하게 불교 수행을 한다면 우리는 그 길에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위대한 기독교 인물에게 감명을 받고, 그녀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불교 수행과 전혀 충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모순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명상하고 여러 불교적 수행을 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어떤 상황에서 교회에 가야할 일이 생겼을 때 불편함을 느낄 이유는 없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에 갔을 때도, 위협을 느끼며 계속 만트라만 외우고 앉아 있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불교 수행자로서 교회에 가더라도 자연스럽게 참여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 속에서 어떤 태도를 갖느냐입니다. 

물론 어떤 조직의 종교 안이든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교회 같이 가자. 크리스마스잖아"라고 말했을 때, “난 불교도니까 안 갈래"라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적인 거절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가족과 함께 성탄 예배를 가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과거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느꼈던 부분들만 떠올리기보다, 그 안의 긍정적인 면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실제로 긍정적인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훨씬 더 통합된 사람처럼 느끼게 됩니다. 자기 삶의 역사와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행복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는 문제는 곧 “불교에서 행복은 어떤 위치를 갖는가?”라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특히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라는 분위기의 종교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고민이 제법 큽니다. “나는 행복해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거나 쉬거나 즐겁게 지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우선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한지조차 잘 모릅니다. 심지어 “내가 행복해 보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지요. 

불교에서 행복은 여러 방식으로 정의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이것입니다. 행복이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행위의 결과로 익어나는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한 업의 결과입니다. 만약 이것이 행복의 정의라면, 불교에서는 당연히 행복을 원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 수행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살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의 결과로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불교가 “행복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행복이 금지되어 있다면, 불교도들은 절대 행복하지 않기 위해 계속 파괴적인 행동만 해야 할 테니까요. 

또 불교에는 모든 존재는 행복하고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기본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란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자신 또한 행복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행복을 또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복이란 그것이 생겨났을 때 계속되기를 바라고, 사라졌을 때 다시 오기를 바라는 느낌입니다. 물론 집착하는 방식으로가 아니겠지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행복은 “좋게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행복에 대한 혼란

행복에 대한 혼란은 보통 두 가지 지점에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행복을 느끼려면 그 감정이 굉장히 강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형태를 가져야만 그것이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혼란입니다. 이 두 번째 문제는 결국 “행복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우선 행복은 극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감정이 정말 강해야만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할리우드식 사고방식인 셈입니다. 긍정적인 감정의 강도가 낮으면 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영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경음악까지 깔리면서 굉장히 강렬해야만 진짜 행복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행복은 “좋게 느껴지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상태”입니다. 단순히 기분 좋은 느낌입니다. 행복이 꼭 “와아! 최고다! 환상적이야!"같은 식의 열정적인 라틴계나 이탈리아 스타일의 감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조용하고 잔잔한 영국식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문제를 봅시다. 불교에서 행복이나 불행을 말할 때, 그것은 업의 결과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경험하는가를 의미합니다. 즉 삶을 어떻게 체험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행복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가? 행복이란 꼭 즐겁게 놀거나, 재미를 느끼거나,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오락을 즐기는 것과 관련되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꼭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어야 행복한 걸까요?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행복의 원인일까요?

재미(Fun)

“재미”라는 단어는 참 흥미롭습니다. 사실 정의하기가 꽤 어렵습니다. 예전에 저는 제 스승 세르콩 린포체와 함께 네럴란드에 있었는데, 우리가 머물던 집의 사람들에게 아주 큰 요트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우리를 보트에 태워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요트는 굉장히 컸고 호수는 그에 비해 아주 작았습니다. 작은 호수 안에 큰 배와 작은 배들이 잔뜩 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그 호수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마치 놀이공원의 어린이 자동차 놀이기구처럼요. 잠시 후 세르콩 린포체께서 제게 티베트어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재미'라고 부르는 것인가?”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이것입니다. “행복을 인과의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교적 관점에서 행복의 원인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행동입니다. 재미있게 놀러 다니는 것이 행복의 원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재미있다”고 하는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는 충분히 비참할 수 있습니다. 배를 타거나, 영화관에 가거나, 파티에 가더라도 완전히 우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회사 사무실에 앉아 일하고 있으면서도 아주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의 원인인 긍정적 행동을 충분히 쌓아두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재미있다”고 불리는 상황에서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도 있고, 쉬거나, 운동하거나, 수영을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활동에서 행복의 원인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영을 가는 이유가 단순히 “행복해지고 싶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기준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나는 너무 오래 일했고 많이 지쳐있다. 지금은 쉬는 편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 계속 일하는 건 이제 생산적이지 않다" 이런 기준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말도 계속 달릴 수는 없습니다. 들판에 나가 풀을 뜯고 쉬어야 합니다.

삶은 어렵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쉬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합니다. 그런 것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삶이 힘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죄책감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삶에는 원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반드시 즐거워야 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면 대개 잘 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 가거나 수영을 하거나 식당에 가도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도 덜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활동들이 우리를 쉬게 하고 에너지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활동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해도 꼭 엄청나게 강렬한 감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영화나 수영 같은 문제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어디를 가고, 뭔가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냥 함께 있는 것만으로 느껴지는 잔잔한 행복과 편안함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함께 장을 보러 갈 수도 있고, 빨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소소한 시간 속에서도 충분한 깊은 만족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에 대한 우리가 품고 있는 이상한 기대나 죄책감을 내려놓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 알아차리기

잠깐 스스로를 관찰해봅시다. 그냥 앉아서 지금 여기 있는 경험과 드는 감정을 느껴보세요. 여기서 말하는 “느낌”은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 가운데 두 번째인 ‘수(受)’를 뜻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행복, 불행, 혹은 무감각의 형태로 경험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지금 그것을 알아차려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덥다 춥다 같은 신체 감각이 아닙니다. 쾌락이나 통증 같은 감각도 아닙니다. 어떤 경험을 “좋다” 혹은 “별로 좋지 않다”라고 느끼는 그 행복감 혹은 불행감의 정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꽃병 속 꽃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꽃을 좋아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꽃을 보고 있는 동안의 느낌 자체를 보는 것입니다. 꽃이나 벽의 그림, 혹은 창밖의 나무를 보면서 어떤 정도의 행복감을 느끼는지 인식해 보세요.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브라질 축제처럼 강렬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도 분명 존재합니다.

행복이란 생겨났을 때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사라졌을 때 다시 돌아오면 좋겠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반대로 불행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감정입니다. 

[수행을 위한 잠시 멈춤]

이런 연습은 꼭 정식 명상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언제든 할 수 있는 관찰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행복하다는 사실을 점점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아무 감정도 없어"인 것은 아닙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계속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갑자기 제 느낌을 관찰하려고 하니 조금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공원을 걸을 때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리는 감각과 함께괜찮다. 나는 꽤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이 우리가 늘 어떤 느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편안한 일을 하고 있었을 때뿐 아니라 굉장히 집중해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 머릿속에만 머물러 있어서, 실제로는 모든 경험에 행복 혹은 불행이라는 어떤 질감이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는 너무 쉽게 “불쌍한 나”, “나는 행복하지 않아", “나는 즐거운 일을 해야 해", “이 지루한 사무실에 있기 싫어"같은 생각으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심한 교통체증 속에서도 내면의 평온한 행복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극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마음에서 느끼는 것은 다른 것 아닐까요? 티베트인들은 감정을 말할 때 늘 가슴을 가리키잖아요.

티베트인들은 생각을 말할 때도 그쪽을 가리킵니다. 티베트 전통에서는 지적 활동, 감정, 느낌을 서로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의 전체로 봅니다. 서양처럼 몸과 마음, 이성과 감정을 둘로 나누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적으로 매우 깊이 몰입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빠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십대에 느꼈던 사랑과 같은 방식으로요. 하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함께 있는 행복은 아주 잔잔한 강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깊고 만족스러운 행복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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