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상황 다루기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문제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두려움 등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는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자신과 주변 모든 것의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존재 방식과,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적 존재 방식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교에서 말하는 공성이란 애초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한 존재 방식의 부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물은 실제로 어떻게 존재할까요?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수많은 요소들에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원인들, 부분들, 그것들에 붙이는 정신적 명칭과 개념 등, 많은 요소들에 의존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이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 발생하고 존재한다는 차원에 머물러 봅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세상은 흑백논리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오직 하나의 행동만이 옳고 다른 행동은 틀렸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처한 어떤 문제 상황이든 매우 복잡하며, 우리가 찾아내는 해결책 또한 수많은 요소들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려면 엄청난 민감성과 자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한다 /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과, 법칙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려는 태도를 조금씩 극복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듯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단지 우리 상상 속 이야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 의미는 오히려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경직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규칙을 적어둔 책이 있으니 알맞은 규칙을 찾아 따르면 된다 이것이 바로 “해야 한다 / 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경직되고 실체화된 반응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분별력과 지혜,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활용해 그 상황에 적적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유연성이 요구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더 많은 요소를 고려할수록 더 지혜롭게 해결한 가능성도 커집니다. 반대로 많은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결국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흑백논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효과적인 해결책과 비효과적인 해결책의 차이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신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손가락을 튕겨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공성을 깨닫기 위한 긍정적 힘 쌓기
혼자 명상하다가 공성을 깨닫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 도달하나요? 아니면 반드시 스승에게서 공성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까?
쫑카파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아마 우리 대부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공성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공성을 비개념적으로, 올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긍정적 잠재력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보통 “공덕”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는 수행의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렀을 때조차, 10만배 절을 35차례, 10만 만다라 공양을 18차례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행 이후에야 공성을 올바르게, 그리고 비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혼자 앉아 공성을 이해하려 애쓰든, 아니면 어떤 스승이 찾아와 “알렉스, 공성을 소개해 주겠네. 인사하게”라고 제안한다 한들 우리 안에 그런 긍정적 잠재력, 이른바 “공덕”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공덕과 통찰이라는 두 가지 축적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혹은 제가 선호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긍정적 잠재력” 혹은 “긍정적 힘”의 저장과 “깊은 자각”의 저장입니다. 어떤 표현을 쓰든 이 두 가지를 쌓아 가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거나, 성취하려 하거나, 혹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그것이 명상이든, 책을 쓰는 일이든, 무엇이든 간에 어느 순간 막혀 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 상태에 빠지거나, 정신이 무뎌집니다. 그럴 때 문제는 우리의 에너지가 약해졌다는 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에너지, 긍정적 힘과 잠재력이 필요합니다. 공덕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점수를 더 많이 따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처럼 막혀 있는 상황에서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무언가 긍정적인 일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돕는 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방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주 빨리 정신을 맑게 해야 할 때 - 예를 들어 글을 쓰다가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거나 어떤 표현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는 경우, 잠시 멈추고 문수보살 만트라를 적절한 관상과 함께 반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해!”라고 자신을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마치 변기에 앉아 억지로 힘을 주며 배변하려 애쓰는 변비 환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만 들고 매우 불편할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죠.
중요한 것은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이 훨씬 더 맑아질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만트라 수행은 그 점에서 매우 효과적입니다. 특히 제가 정신을 아주 날카롭고 맑게 유지하고 싶을 때, 그런 상태가 되기를 강하게 발원하고 의도를 세우면 만트라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정신을 날카롭게 집중시키는 관상을 함께 하면 효과는 더욱 커집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하나의 공식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입니다. 이 만트라 독송을 통해 생겨나는 긍정적 힘과 잠재력을 더해, 정신적 막힘을 돌파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이것이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당히 유용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충분히 열려 있을 때, 해결책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상황도 있습니다. 제가 번역을 하는 동안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또는 우리의 에너지가 전반적으로 조금 무뎌지는 다른 종류의 상황들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예로 들면, 저는 여기저기 다니며 가르침을 전할 때 그것을 일종의 보리심 집중 수행(retreat)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저는 그것을 “글쓰기를 방해하는 끔찍한 방해물”이라고 느끼거나 일을 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이 오히려 제 글을 더 명확하게 쓰도록 도와주는 아주 긍정적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삶의 예를 들고 있지만, 이런 접근 방식은 누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가정 문제든, 가족 관계든, 어떤 인간관계든, 우리가 어떤 막힘에 부딪혀 있다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혹은 그 상황에 적절한 어떤 긍정적인 일을 한다면 그것은 긍정적 힘과 잠재력을 쌓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 잠재력의 저장을 쌓는 이런 방식은 단지 정신적 막힘이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번 강연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글을 막힘없이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더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에너지를 원합니다. 저는 쫑카파 대사 역시 어떤 벽에 막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는, 정말로 탁월한 통찰(공성에 대한 올바른 비개념적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훨씬 더 큰 긍정적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긍정적 잠재력을 쌓는 일이 반드시 저처럼 모든 일을 내려놓고 여행하며 가르치는 보리심 집중 수행 형태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명상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정신적 막힘이 있다고 해서 공성 명상을 완전히 멈춰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추가적인 긍정적 에너지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상 사이사이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앉아서 명상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행동해야 합니다. 더 많은 긍정적 힘을 쌓아야 하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영적 스승과 전강한 관계 맺기
이제 자연스럽게 영적 스승이라는 주제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물론 우리는 독각, 즉 “자각자”의 예를 알고 있습니다. 독각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역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수행의 한 길입니다. 그들은 귀의수 위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독각은 부처도 없고 가르침을 줄 스승도 없는 암흑시대에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는 명상하고 수행의 진전을 이루기 위해 이전 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며 쌓아 두었던 법에 대한 본능적 감각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독각은 대단히 용기 있는 존재들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영적 성장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데도, 자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법의 감각을 따라 수행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 의심이 생겼을 때 의지하거나 찾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정말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독각을 두고 “동굴에 틀어박혀 혼자 수행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부처님의 가르침도 있고 스승들도 있는 시대에는 질문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왜 스승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실제로 스승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는 영적 스승이라는 주제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것을 전부 다룰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주 실질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 영적 스승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 물론 그 스승이 제대로 자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이 스승이라고 주장하는 엉터리 인물은 아니어야 하겠지만 - 스승이 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데 있습니다. “실재적인”이라는 표현은 조금 부담스러운 단어이니 차라리 “인간적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스승은 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만약 스승이 없고 책만으로 배운다면 “가르침을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삶 속에 구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나 관념은 전적으로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단지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예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살아 있는 예가 우리 스스로도 가르침을 이해하고 내면화하려는 가장 큰 영감을 줍니다.
가르침을 배우는 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성과 같은 특정 가르침에 대해 정확하고 기술적인 이해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측면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스승이 질문에 답해줄 수 있습니다. 책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외에도, 스승은 그 이해를 실제 삶 속에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달라이 라마 성하 같은 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하께서 공성과 보리심에 대해 매우 깊은 이해와 실현을 갖고 계시다는 점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하께서 보살의 몇 지(地)에 계신가?” 같은 식으로 점수표를 들고 검사하려 드는 것은 유치한 일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신경 쓰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성하의 행동 방식을 보면서, 법에 대한 이해가 세상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머리가 구름 속에 떠 있고 현실에서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하의 예를 보면, 지혜와 자비가 결합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법, 특히 공성에 “입문한다”는 것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에 입문한다는 것
법에 입문하는 방식에는 여러 수준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식은 스승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 우리가 정서적으로 강하게 흔들리게 함으로써 현재의 정체 상태에서 충격적으로 깨어나 깨달음을 얻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간 선불교 스타일의 방식이며, 일부 티베트 스승들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스승은 많지 않습니다. 미국에 계셨던 칼미크 몽골 출신 스승인 왕걀은 이 방식을 매우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제자들에게 자신과 제자들을 위한 집이나 사원을 짓게 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제자가 바크시(제자들이 몽골어로 스승을 부르던 호칭)를 위해 집을 짓느라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붕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바크시가 지붕 위로 올라가 그 제자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는거야? 완전히 잘못하고 있잖아! 당장 내려가!” 그러자 제자는 말했습니다.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하고 있었고, 몇 달째 계속 이렇게 해 왔습니다!” 그러자 게셰 왕걀이 즉시 말했습니다. “아하! 바로 그것이 부정되어야 할 ‘나’다.“
이처럼 스승은 어떤 상황을 만들어 정서적 충격 속에서 우리가 직접 통찰을 얻도록 함으로써 공성에 입문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숙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법의 어떤 측면에 입문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책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다른 방식은 아주 명확한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책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스승의 명확한 설명은 책으로 기록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설명히 명확해도, 우리 안에 정신적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스승이 법이라는 퍼즐을 한 번에 전부 떠먹여 주지 않고, 한 조각씩 건네주면서 우리 스스로 퍼즐을 맞추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은, 실제로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스승의 모습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책을 통해 명확한 설명을 읽는다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그 책을 썼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직접 만났든 아니든 결국에는 스승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이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라 해도 우리는 그 스승을 만나는 셈입니다. 책을 읽으며 그 사람의 말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독각이 아닌 이상, 바퀴를 처음부터 다시 발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이해를 완전히 혼자 힘으로 만들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해는 누군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어떤 스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독각이 가진 법에 대한 본능조차도 이전 생에서 어떤 스승에게 가르침을 들으며 심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 모든 요소가 함께 있는 스승을 필요로 합니다. 정확하고 명료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스승,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살아 있는 본보기인 스승,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스승, 또한 우리가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스승, 그리고 법이라는 퍼즐을 딱 알맞은 방식으로 한 조각씩 건네주는 스승 말입니다.
비개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관계
영적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서양 사람들에게서 언제나 등장하는 문제 중 하나는 “개인적인 관심”에 대한 욕구입니다. 우리는 개인성에 대한 감각이 아주 강합니다. 모두가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특별하니 특별한 관심을 받아야 한다.” 물론 그 배경에는 심리치료 모델이 있습니다. 심리상담가에게 가서 돈을 내면 개인적인 치료를 받는다는 모델 말입니다. 하지만 불교의 맥락에서는 그런 방식이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나만의 특별한 스승”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그 관계에 대해 헐리우드식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밀라레빠와 마르빠 같은 관계는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나치게 힘들게 만드는 스승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르콩 린포체와 제 자신의 관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약 9년 동안 그의 통역자, 영어 비서, 해외 순회 일정 관리자, 그리고 개인 제자로서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엄청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 관계는 1983년 그분이 입적하실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관계를 “비개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관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제 개인사에 대해 질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단 한 번도요. 가족 이야기도 묻지 않았고, 그 밖의 어떤 개인적인 문제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제 개인사를 굳이 말씀드려야겠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속에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했지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일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비개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관계”란, “너와 나”라는 거대한 자아 둘이 모여 “우리 함께 일 해봅시다!” 하는 식의 관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서로 칫솔까지 공유하며 모든 사생활을 털어놓는 식의 관계도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을 너에게 말하고,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한다”는 식의 관계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더러운 속옷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관계는 비개인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적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린포체는 제 성격과 기질을 이해하고 계셨고 우리는 그것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함께 일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분의 연세와 필요, 여러 요구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관계는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개인적인 관계였습니다.
제 생각에, 그 관계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기반 중 하나는 양쪽 모두에 깊은 존중이 있었고, 서로가 성숙한 어른으로서 함께 관계를 만들어 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성인으로서 린포체에게 다가갔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거나, 제 삶의 모든 것에 대해 린포체가 책임져 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제 삶의 통제권을 스승에게 넘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 극단으로 간 것도 아닙니다. “내가 통제권을 가져야 하고, 당신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의 태도를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삶에서 어려운 선택에 부딪혔을 때 린포체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결정을 대신 내려 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언을 들은 뒤에도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제가 뭘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다시 “해야 한다 / 하지 말아야 한다”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저는 “어느 쪽이 더 이로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번째 세계 순회 공연을 마쳤을 때 저는 린포체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남아서 가족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린포체와 함께 인도로 돌아가서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남인도에서 여시는 첫 번째 몬람 기도 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어느 쪽이 더 이로울까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 저는 이런 식의 질문을 했습니다. 린포체는 그 기도 대회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인도로 가는 편이 좋겠다고 권했고, 저는 그 조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린포체는 제게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거수경례를 하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복종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저는 명령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린포체는 단지 상황을 조금 더 명확하게, 그리고 더 넓은 관점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 자신의 지혜를 통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제가 이미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여전히 린포체에게 “제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보이는지”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스승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 관계가 아주 개인적이고 특별해야 한다고 기대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시작합니다. 또 그런 요구를 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아이로, 스승을 부모로 바라보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혹은 자신을 십대로, 스승을 팝스타로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일종의 로맨틱한 환상까지 끼어들 수도 있습니다.
벌과 꽃의 비유
영적 스승과의 관계를 “비개인적이면서 개인적인 방식”으로 맺는다는 것은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의 중요성은 단지 영적 스승과의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접근은 모든 인간관계의 특징이 된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샨티데바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벌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벌은 꽃에서 꽃으로 옮겨 다니며 꽃의 본질만 취하지만 어느 한 꽃에도 달라붙어 집착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세르콩 린포체의 예를 떠올려 봅시다. 린포체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분은 그 순간 함께 있는 사람이 곧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첫 번째 세션에서 이야기했던 그 “열린 마음”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을 가장 친한 친구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그런 방식으로 함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 그 사람과 진심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아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제 “더러운 속옷”을 당신에게 보여 줄 필요도 없고, 당신이 당신의 것을 제게 보여 줄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며 늘어놓는 그런 종류의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들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세세한 사항들에 빠져들기 사작하면, 마치 자신의 혼란과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겨 그 사람까지 거기에 얽히게 만드는 것과 비슷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삶 속에서 스스로 감당해야 할 개인적인 혼란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짐이되어서는 안 되며, 인간관계 전체를 짓누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완전히 열린 상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과 진정으로 접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야만 벌이 꽃에서 꽃으로 옮겨 다니듯 우리 역시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열려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 관여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승과도 맺게 되는 관계의 형태입니다. 스승과 함께 있을 때는 아주 직접적이고 열린 소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자리를 떠나고, 다음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옵니다. 만약 “내 스승이어야만 해!”라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우리는 금새 질투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 됩니다. “스승 주변의 친한 그룹에 난 속하지 못했어" 이런 식의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의 속옷을 직접 빨아야 합니다. 자기 삶의 혼란은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스승이 대신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을 비인격화하는 극단을 피하기
스승이든 친구든, 이런 식의 “비개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방식으로 누군가와 관계 맺을때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장 깊은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입니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계의 비개인적인 측면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개별의 존재입니다. 이것이 관계의 개인적인 측면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은, 가장 깊은 차원만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극단으로 빠지지 않는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을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 보는 일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비개인적인 방식으로 당신과 관계 맺게 되면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설령 그것이 마음과 마음의 관계처럼 느껴진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느끼는 함정을 피해야 합니다. “당신은 마음의 흐름 번호 14762이고 저 사람은14763이다. 그러니 나는 어떤 번호의 마음 흐름에도 똑같이 열려 있고 친밀할 수 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이라는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여, 모든 사람을 비인격화해 버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상대방은 자기 자신을 아주 개인적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상대와 관계 맺어야 합니다.
제 어머니가 작년에 돌아가셨을 때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초반에 저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고 다양한 수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비개인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저 어떤 마음의 흐름 번호 정도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집착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저는 제 어머니를 단순히 “내 어머니”로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과거 생과 미래 생을 이어가는 존재, 다른 모든 존재들과 마찬가지의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한때는 우리의 어머니였다고 가르치니까요. 그래서 중간 상태인 바르도에 있는 어머니와 연결되는 저의 방식은 다소 추상적이었습니다.
그러다 가까운 친구와 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 뒤 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황을 제 입장이 아니라, 바르도에 있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행자로서 전생과 현생, 비고정적 자아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로즈 버진(Rose Berzin)”이라는 옛 정체성에 집착하고 있었고, 여전히 저를 자신의 아들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저는 바르도에 있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하고 있던 수행 방식을 즉시 바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직접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칠레와 타히티에서 가르침을 설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에게 매 세션마다 와서 저와 함께 있으라고 초대했습니다. 또한 어머니가 좋아하시고 편안하게 느끼셨던 기도와 수행들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머니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감지하려 했고, 어머니에게 맞는 방식으로 그것을 진정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불교 만트라의 염송을 좋아하셨습니다. 그것이 어머니를 아주 평온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제가 바르도에 있다면 그런 방식이 제 자신에게는 가장 도움이 되는 수행은 아니었을지라도, 저는 어머니가 가장 편안해하셨던 방식으로 아주 천천히 만트라를 염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와 실제로 연결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맞게 수행을 조정했던 것입니다. 상대적 차원에서 어머니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핵심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기독교나 유대교 기도를 들을 때 더 평온해지셨다면 저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천천히 읊조리는 만트라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수행하기 시작했을 때 정말 엄청난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단지 추상적으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모든 생에서 다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늘 귀한 인간의 몸을 받기를 바랍니다. 제가 모든 생에서 당신을 깨달음으로 이끌기를 바랍니다”같은 일반적인 기도와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한 개인과는 실제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을 때는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기도들도 계속 이어갔지만 말입니다. 요컨대, 제가 설명해 온 이런 “비개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방식으로 누군가와 관계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개별적 존재로 대하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열려 있고, 아주 개인적으로 관계 맺고 있다. 하지만 집착은 없다. 내 개인적 혼란과 당신의 개인적 혼란 속으로 함께 빠져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전체 맥락 안에서도, 나는 당신의 개별성과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민감하게 존중한다. 그래서 실제로 소통이 가능한 방식으로 당신과 관계 맺는다.” 이 지점에서부터는 상대와 관계를 맺을 때 사용하는 다섯 가지 깊은 알아차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대승불교 수행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는 큰 어려움 하나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리심, 자비, 그리고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명상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중생”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 즉 구체적인 한 사람에게 능숙하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 “모든 중생”이라는 수준에서만 수행한다면, 때로는 그것이 실제 누구와도 깊이 관계 맺지 않기 위한 핑계가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관계 맺는다”는 것이 곧 집착과 온갖 감정적 혼란을 뜻한다면, 그런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거친 수준의 집착과 분노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다루게 되었다면 - 물론 그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 그 다음에는 실제적인 인간적 관계가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은 “비개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집착 없이 개별성과 관계 맺는 방식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영적 스승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온 모든 내용은, 스승을 부처로 보느냐 아니냐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설령 스승을 부처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미 있고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제가 설명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스승을 부처로 본다는 맥락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숙한 어른으로서 그 관계에 접근해야 합니다. 스승을 아버지처럼 보거나, 팝스타처럼 보거나, 혹은 “나는 특별하니까 스승은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 해”같은 이상한 투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승과의 깊은 관계에 대한 두려움
저는 스스로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있는 익명의 한 사람으로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한 스승과 일대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여러 스승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편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헌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친밀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한 스승에게만 마음을 열고 싶지는 않아. 내가 통제권을 잃게 될테니까" 물론 이런 두려움을 제대로 극복하려면 어느 정도 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스승에게 마음을 연다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여는 것이 상처받기 쉬운 무방비 상태의 어떤 “나”의 존재가 공격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버림받고 처참해질거야”라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마음을 열었더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완전히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지는 것도 아닙니다. 스승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스승과의 관계가 성공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성숙한 관계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는, 무엇이 도움이 되고 무엇이 해로운지, 무엇이 적절하고 무엇이 부적절한지를 분별할 수 있는 안정된 “관습적 나”의 감각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성숙한 관계는 꽤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영적 스승과의 관계는 천천히 형성되어야 한다
특정한 스승에게 귀의하기 전에 그 사람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 자체가 아직 불순한데, 어떻게 스승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스승이 정말 부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적 스승과의 관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미성숙한 동안에는 스승에게 다가가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히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스승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유능한 스승은 우리를 더 성숙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미숙한 스승은 우리의 미성숙함을 이용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재적인 스승에게 다가갈 때는 우선 우리가 아직 이 사람이 정말 자격 있는 스승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스승과의 관계는 대개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발전하는 것이며, 여러 단계를 거쳐 갑니다. 심지어 스승을 부처로 보는 것조차 초기 단계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역시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칩니다. 설명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주제를 지금 너무 자세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스승을 부처로 보는 종류의 관계는 사실 가장 높은 수준의 탄트라 수행인 무상요가탄트라의 매우 진전된 단계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쫑카파 대사의『람림첸모(Lam-rim chen-mo)』에서 올바른 스승과의 관계가 수행의 뿌리라고 말하며, 그 관계를 “스승을 부처로 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쫑카파 대사가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썼고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분명히 그는 탄트라 수행을 하고 있던 승려들을 대상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귀의에 대한 설명이 그보다 뒤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귀의도 하지 않았고 부처가 무엇인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스승을 부처로 보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 “스승을 부처로 보라”는 가르침은 이미 귀의했고, 이미 탄트라 수행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본질적으로 탄트라의 주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점을 시사합니다. 우리처럼 이미 고급 탄트라 수행을 하고 있는 출가 수행자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귀의 같은 문제를 당연한 전제로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훨씬 더 초기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특히 서양인으로서 처음 스승에게 배우기 시작할 때는 “이 스승이 부처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이 좋은 스승인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설명을 명확하게 하는가? 무엇을 설명하는가? 그 설명이 전통 경전들과 일치하는가? 내 삶과도 연결되는가? 이것은 어떤 종류의 교사를 평가할 때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려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가?”
또 우리는 이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살펴봅니다.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느끼는 분위기를 통해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만나고 나면 그냥 공허한 느낌만 남는 사람인가? 이 사람은 실제로 우리와 소통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아무리 해도 연결되지 않는 사람인가? 이런 것들은 특별한 투시력이나 대단한 수행 수준이 없어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좀 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윤리성을 살펴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윤리적인가?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인가? 학생들을 지나치게 소유하려 하고 삶을 통제하려 드는가? 다른 제자들에게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스승을 살펴보는 방식입니다. 적어도 “내가 이 사람에게 배우고 싶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단계에서 말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사람과 “부처로 보는 단계”까지 맺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은 매우 진전된 단계의 문제이며, 초심자 단계에서는 사실 그렇게 중요한 주제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미 귀의했고, 기본적인 수행 단계들을 거쳤으며, 최고 수준의 탄트라 수행에 들어가 있고, 또 스승과 강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때는 “스승과 부처로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체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처음 단계부터 수행 전체를 되짚어 본다면 - 마치 탄트라 관정을 받기 전『람림첸모』전체를 다시 검토하는 승려처럼 - 그때는 스승을 부처로 보는 관계가 수행 전체의 성공을 떠받치는 뿌리가 됩니다. 그때는 정말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는 것
우리는 언제나 가르침을 올바른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스승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엄청난 정서적 성숙함을 요구합니다. 그 계약의 본질은 사실 이런 것입니다. “당신은 부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나는 그것을 나를 가르치기 위한 부처의 행위로 보겠습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것도 그 자체의 독립된 본성만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승과의 이런 관계 역시 “당신은 나를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는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는 마음속으로 스승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당신의 동기가 실제로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객관적으로 깨달은 존재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 관계를 통해 계속 배우고 성장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스승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때 우리는 “당신은 정말 어리석군요”라고 화내는 대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승은 내가 내 자신의 분별력과 판단력을 사용하도록 배우게 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상황을 준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승이 무엇을 하든 그것을 하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것입니다. 스승 쪽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핵심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존재를 부처로 보라”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하나의 가르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도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가 어리석거나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아,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겠구나”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개도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정서적 성숙함을 요구합니다. 화내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주 고급 단계의 수행입니다. 초심자가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이런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스승은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나 자신은 이런 관계를 감당할 만큼 준비되어 있는가? 심지어는 개인적인 접촉이 거의 없는 스승과도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스승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법문에 참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든, 나는 거기서 배우겠습니다.” 이런 태도로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강조하자면, 이것은 군대식 관계가 아닙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의 복종 관계는 전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