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션 7: 탄트라를 삶 속으로 가져오기

탄트라는 고급 수행이다

마지막 시간에는 탄트라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봅시다. 탄트라 역시 현실적인 차원으로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티베트 불교의 탄트라 가르침을 접할 때 흔히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을 느껴 아예 탄트라에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곧 바로 탄트라에 뛰어들고 싶어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두 극단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탄트라는 매우 고급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준비 없이 성급히 뛰어들어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불교의 초기 단계인 수트라 수행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여러 자질들을 하나씩 길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윤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거나, 해탈을 얻거나, 혹은 가능한 한 완전하게 다른 존재들을 돕기 위해 부처가 되기 위한 자질들입니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중력, 사랑과 자비, 무상과 공성에 대한 올바르고 깊은 이해, 출리심 등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원인들입니다. 탄트라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 한 측면은 이런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통합해서 수행하는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각각의 요소들을 하나씩 먼저 길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들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질들이 준비되지 않은 채 탄트라에 뛰어들면, 결국 내용도 깊이도 없는 단순한 의식 수행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의식 수행이 정말 깊은 도움이 되려면, 그것은 우리가 길러 온 여러 자질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구조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삶 속에 귀의라는 안전하고 긍정적인 방향을 세워야 합니다. 탄트라 의식을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의식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탄트라는 오락거리처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도피를 위해 디즈니랜드에 가듯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양한 불교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 성장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란 귀의의 삼보, 즉 부처가 완전히 성취한 것, 부처가 가르친 법, 그리고 고도로 수행된 승가가 부분적으로 실현한 것을 말합니다. 

출리심의 필요성

출리심은 모든 탄트라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출리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리심에서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결심입니다. 이 측면이 있어야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탄트라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탈의 의지가 없다면, 탄트라 수행은 자신의 삶과 연결된 진정한 수행이 되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단지 괴로움만이 아니라 괴로움의 원인까지도 내려놓으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버릴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도 실제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단순히 영화 보기, 초콜릿 먹기, 성생활 같은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 전체에 걸쳐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분노, 집착, 교만, 질투 같은 부정적 성향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불안, 걱정, 불안정함 같은 것들이 있고 더 깊은 차원에서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현실과 다르게 사물을 드러내는 우리의 평범한 마음 작용 자체가 문제입니다. 이른바 “불순한 현현” 위에서, 우리는 그것이 왜곡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문제는 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이 현실과 어긋난 방식으로 대상을 드러내는 작용,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진짜로 믿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원인은 단지 “겉으로 나타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티베트어 “nangwa”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옵니다. 이 단어는 “현상”이라는 뜻도 있고 “현현 작용”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의 현상”이나 “이원적 현현”을 없앤다고 할 때, 그것은 밖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 즉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현실과 다르게 사물을 드러내는 마음의 기능 자체를 멈추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시작도 없이 계속 그렇게 작용해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상과 무아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해도, 아침에 거울을 보면 여전히 “어젯밤의 나와 똑같은 나”가 있다고 느낍니다. 마치 변하지 않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또 발을 다쳤을 때도 “내 발이 아프다”라고 느낍니다. 마치 발과 분리된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어와 개념에 기반한 우리의 마음은 계속 그렇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정말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전체 과정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왜곡되게 드러내고, 거기서 온갖 혼란, 걱정, 문제들이 생겨나는 이 과정 자체 말입니다. 이것을 내려놓을 마음이 없다면 탄트라를 통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고정된 “나”라는 자기 이미지, 단단한 정체성을 가진 자기상을 내려놓지 않은 채 자신을 본존으로 관상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해탈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정신적 혼란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여전히 분노와 집착에 가득 찬 자기 개념을 유지한 채 그 위에 “나는 본존이다”라는 생각까지 덧붙이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화내는 건 본존의 분노로운 측면이다"같은 식으로 왜곡하기 쉽습니다. 혹은 “나는 탄트라 수행 중이니까 누구와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같은 위험한 생각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출리심, 즉 기존 자기 이미지에 대한 내려놓음이 없이 탄트라에 뛰어들 때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이미지를 내려놓기 위해서는 공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개념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공성에 대한 이해 없이 “모든 것이 만다라다” 혹은 "모두가 부처다”라고만 생각하면 현실감각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길을 건널 때 부주의하게 걷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과 자비, 그리고 보리심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수행을 하는 이유는 다른 존재들을 돕고,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입니다. 보리심은 우리가 이 모든 수행을 세상 속에서,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 관계 맺는 방식으로 실제 적용하게 만드는 힘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혼자 이상한 환상 세계 속으로 빠져들기 아주 쉽습니다. 일종의 “불교 디즈니랜드"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탄트라 수행에서는 자신에게 여러 개의 팔과 다리가 있고, 다섯가지 색의 빛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각각 사랑, 자비, 다섯 가지 깊은 지혜 같은 여러 이해와 자질들을 상징합니다. 여러 개의 팔과 다리 같은 형상을 통해 그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그 많은 자질들을 동시에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탄트라는 매우 고도의 수행이며, 제대로 수행하려면 엄청난 준비가 필요합니다. 

예비 수행의 필요성

절이나 금강살타 백자진언 같은 예비 수행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에 더해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런 수행들은 탄트라 수행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긍정적인 잠재력을 쌓게 해주고, 수행을 방해하는 부정적인 잠재력을 정화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사랑, 자비, 집중, 공성에 대한 이해 같은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지지 않고, 예비 수행만 반복한다고 해서 충분한 결과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아주 신경증적인 동기로 십만 배 절을 할 수도 있습니다. 스승을 기쁘게 하고 싶어일 수도 있고, “특별한 사람들 모임”에 속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으며, 혹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벌을 주듯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예비 수행은 단지 사랑과 자비 같은 법의 여러 요소들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그런 자질들을 더 성장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공성의 이해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 것과도 같습니다. 이해가 깊어지려면 많은 긍정적인 잠재력을 쌓고 정신적인 장애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절같은 수행은 법의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정작 함께 모아야 할 핵심 요소들이 없다면, 예비 수행에서 생기는 긍정적인 에너지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잠재력을 쌓고, 장애를 정화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형식을 따를 수도 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것은 아닙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일 수 있고, 병원에서 일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행하는 모든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행동이 그런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부처님에게는 지적 능력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던 제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사람에게 절 수행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몇 년 동안 사원을 쓸게 하면서 “먼지야 사라져라, 먼지야 사라져라”라고 반복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예비 수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가 아니라, 긍정적인 힘을 쌓고 장애를 정화해 나가는 그 과정 자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과정의 구조는 사람마다 다르게 맞추어질 수 있습니다. 

스승과 서원

반대로 탄트라를 두려워하면서 “나는 이런 것을 전혀 하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조심스럽고 올바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 스승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스승을 본존이나 부처의 형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반대로도 작용합니다. 즉, 그런 부처의 형상들을 인간적인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탄트라 수행이 실제로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하루 종일 그런 형상으로 관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상하게 이해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탄트라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러 종류의 서원을 받는 일입니다. 재가계, 보살계, 그리고 최고 단계의 탄트라에서는 탄트라 서원까지 포함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단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입장에서 서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걸 해야 해", “이건 하면 안 돼"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강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서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 했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혹은 “이 서원을 받으면서 내가 통제권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같은 생각이 생기기 쉽습니다. 심지어 “이제 내 삶의 통제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렸고, 나는 이 스승의 노예가 되었다" 같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통제’의 문제로 생각하면, 서원 자체가 두려워져서 아예 탄트라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문제를 넘어서 건강하게 서원을 받고 지켜가기 위해서도, 다시 공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계속 반복해 말하지만, 탄트라 수행에는 출리심, 보리심, 그리고 공성의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탄트라는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의 모든 요소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뛰어드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동시에 “나는 절대 준비하지 않을거야. 그러니 아예 시도 조차 하지 말자"라는 태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필요한 것은 중도적인 접근입니다.

어느 정도의 이해가 충분한가?

“이제 나는 공성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있고, 보리심과 출리심도 충분해서 탄트라 수행을 시작할 수 있겠다"고 알 수 있을까요? 그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구루가 다 알아서 판단해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황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은 상당히 미성숙한 태도입니다. 물론 가까운 스승이 있다면 상담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난 스승에게 물어볼 필요 없어"라고 오만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이 스승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나는 굉장히 높은 경지에 이른 수행자야"같은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신의 자비심이 얼마나 진실한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보리심의 강도를 결정합니다. 즉,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은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마음이 강하다면 자연스럽게 강한 출리심과 보리심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들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최대한 잘 도울 수 있도록 좋은 자질들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내려놓고 좋은 자질들을 길러가는 유일한 방법은공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야. 아무것도 못 해" 혹은 “나는 신의 선물과 같은 특별한 존재야. 더 배울 필요 없어"같은 단단한 자기 개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를 인과를 이해하게 됩니다. 

공성을 이해할수록 인과를 더 존중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자질을 길러 다른 존재들을 도울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강하게 다른 존재들을 돕고자 한다면, “나는 괴로움의 원인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억지로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진정한 이타심에서 나오는 동기입니다. 또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과의 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점도 이해하게 됩니다. 좋은 원인을 쌓고 자질을 길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인과의 과정은 공성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동기와 이해를 바탕으로 탄트라 수행 자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탄트라가 다른 존재들을 돕지 못하게 막는 장애를 제거하고, 필요한 자질들을 가장 강력하게 길러주는 방법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즉, 깨달음과 이타행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신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동기와 어느 정도의 공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탄트라 수행의 의미와 과정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생겼다면, 그때 우리는 탄트라 수행에 들어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때의 탄트라는 매우 건강하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탄트라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기억할 점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보는 일입니다. “내가 정말 다른 존재들을 돕고 싶은가?” 아니면 단지 말 뿐인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탄트라를 수행하면 위험이 많습니다. 신경증적인 동기로 텅 빈 의식 수행만 반복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수행은 과도한 자기부풀림과 환상, 교만으로 이어질 수 있고, 또는 “아무 효과도 없잖아"라는 실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매일 특정 의식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있고, 그것을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게 되면 수행은 점점 고역이 됩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수행 자체를 싫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충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올바른 태도로 탄트라를 수행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법의 모든 요소들을 함께 통합해야 합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점은, 탄트라 수행 역시 계속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을 고정된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매일 똑같은 의식을 반복하기 때문에 이제 거꾸로도 외울 수 있다" 이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영원히 똑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지루한 작업이 아닙니다. 윤리, 출리심, 보리심, 집중, 공성의 이해 같은 것들은 평생 계속 필요한 요소들이지만, 그 이해와 체험의 수준은 수행 속에서 계속 변화하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행 역시 윤회처럼 오르내린다는 사실입니다. 매일 직선적으로 좋아지기만 하는 식으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와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관정

서양에서는 아주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관정을 받고 나면 수행 의식을 해야 하는데 정작 그 수행에 필요한 이해들에 대해서는 미리 충분히 설명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관정을 받고 나면 수행 의식을 해야 하는데, 정작 그 수행에 필요한 이해들에 대해서는 미리 충분히 설명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 중 하나는 관정이 굉장히 많이 주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또 서양인들은 그것을 “이제 나는 이걸 해야 하고 저건 하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티베트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관정이 열리면 대부분 평범한 티베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미래 생을 위해 마음의 연속체에 씨앗이나 습기를 심으러 가는 것이다.” 대부분은 이번 생에서 실제로 탄트라 수행을 하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평범한 재가 티베트인들입니다. 그들은 아기들도 데려오고 심지어 자신들이 키우는 개까지 관정에 데려옵니다. 그 이유는 아기든 개든 누구나 관정 자리에 함께 있으면 미래 생을 위한 어떤 씨앗이 마음의 연속체에 남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해합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정에 가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멍하게 있다가도 끝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세상에! 내가 이제 이 서약을 받은 건가? 이제 이걸 해야 하나? 안 하면 금강지옥에 떨어지는 것 아니야?” 

이건 공성과 연기법에 대한 상당한 오해입니다. 어떤 일도 일방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관정을 받는다는 것은 관정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모두 의존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로 관정을 받으려면,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서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정 자리에 있었던 개와 사실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 개도 씨앗을 받았을까? 고전 문헌들을 보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보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개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인상은 매우 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흔적은 남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어떤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그것을 흔히 “가피를 받았다”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실제로 관정을 받아 모든 서약과 의무를 갖게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분명하게 서약과 수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것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티베트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관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즉, 미래 어느 시점에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게 도움이 될 씨앗을 남기는 영감 있는 경험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 자체는 괜찮습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허세입니다. 실제로는 피상적인 수준으로만 참여했고, 아무런 분명한 헌신도 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나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수행자다. 진짜 탄트라 수행자다"라고 생각하는것은 문제입니다. 오히려 “나는 개의 수준으로 참석했구나. 그래도 전혀 상관없다"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경험에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 수준으로 참석했다고 해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도움이 되는 경험일 수 있습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허영심입니다. 그런 정도의 도움만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관정을 많이 받을수록 나는 더 높은 사람이 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도 꽤 우스운 일입니다. 관정을 많이 찾아다니는 것이 영감을 주고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위대한 탄트라 수행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함은 모든 법 수행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요약

부처가 가르친 모든 것은 결국 사람들이 삶의 괴로움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기억한다면,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 어렵거나 멀게 느껴지는 가르침을 만났을 때 함부로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전통적인 설명 방식이 현재 우리의 수준에는 아직 너무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어떤 혼란과 문제를 느끼고 있는지 먼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접근해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목표를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이루려 하면 결국 혼란에 빠지고 포기하게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수준에 맞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면, 실제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에 품고 있는 환상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불교를 삶의 현실 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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