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삶이 하나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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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라고 합니다. ‘다르마’는 ‘예방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법은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법은 인생의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법을 수행하기에 앞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삶의 다양한 문제와 어려움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을 수행하는 것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수행은 단지 기분전환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취미생활이나 유행처럼 따라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법을 보다 현실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수행은 즐거운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과 불쾌한 경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여 극복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문제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안해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경험하며, 소외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가족과 부모가 나이가 들고 병들면 힘들어합니다. 나도 나이가 들고 병들면 힘들어집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등 삶의 방향성을 계획하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는 전체적으로 두루 살펴봐야 합니다.  

어리석음

불교에서는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들이 전부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원인이 없이 결과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이 점을 알기까지 깊은 사유가 필요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로 인해 비롯된 나의 문제를 외부 환경이나 다른 이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느낍니다. ‘나는 너로 인해 너무 불행해졌다. 너는 내게 전화하지 않았고, 나를 저버렸다. 더이상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너의 잘못이다.’ 또한 우리는 어릴 적 부모님이 우리에게 한 행동과 해 주지 않은 일들에 대해 부모를 비난합니다. 더 나아가 경제, 정치, 사회적 상황을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물론, 이 모든 요소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불교는 이 부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문제의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면, 주 원인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와 연관된 불교적 관점을 찾아야 한다면 저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근원이 무엇인지를 인지하였다면 마음에서 그 상황을 변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내면을 살피고 내면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 기준에 의거한 ‘나는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착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교는 도덕적 판단에 의거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모두 고통을 원치 않기 때문에 문제의 근원을 찾으려는 것이며,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어리석음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어리석음 때문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올바른 이해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무지할까요? 첫째,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무지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한 일은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예를 들어, ‘뭐, 어때. 내가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무시하면 돼, 상관없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불가능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터무니없이 우려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너를 늘 친절하게 대했으니 너만큼은 나를 좋아해야지. 내가 너에게 좋은 선물을 줬는데도 왜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니?’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으로 불가능한 결과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예상보다 결과를 더 부풀려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 달리 반대의 결과가 발생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을 원하면서 우리는 행복해지는 방법으로 음주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음주는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이들,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젊은 나이에 죽지 않는 이상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아프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죽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흰머리를 발견하고는 충격에 빠져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 항상 비현실적이고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겨나는 문제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우리는 번뇌와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부정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자 갈망하고, 젊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증후군의 이면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어리석음이 깔려있습니다; 나는 이 우주의 중심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나에게 몰두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다른 이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모두가 나를 매력적으로 보고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나를 매력적으로 보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자신을 미치게 합니다. 설령 자신의 외적 매력을 찾지 못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고, 다른 이들이 자신을 봐 주기를 기대하지만 기대와 달리 다른 이들로부터 외면당하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모든 이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왜 모든 이들이 자신을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지함 때문에 우리는 갈망하고 애착합니다. 갈망과 애착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순진함에서 비롯된 착각입니다. 모든 이들이 나를 좋아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사랑스럽고 중요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혼자서 의심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착각 속에서 우리는 슬퍼하기도 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말이죠.  

우리는 내면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어려움을 겪고 불안감을 느끼더라도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조사해야 합니다. 내가 느끼는 이같은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이면에 있는 어리석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와의 관계를 조사하면 오직 나만이 어리석음에 빠진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어리석음은 분명히 있습니다. 단지 ‘나의 모든 행동이 훌륭해. 완벽하지 않은 너는 변할 필요가 있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변해야 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 무지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우리 모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법다운 방식입니다.

무엇이 법인지를 이해하고 수행을 시작하기

수행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몇 가지 기술을 배우는 것처럼 수행에 대한 지침을 얻는 것만으로 수행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수행을 하건 우리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수행을 언제 어떻게 일상 생활에 적용해야 하고, 수행을 통해 얻게 될 결과도 미리 예측해 봐야 합니다. 이는 수행을 시작하자마자 수준 높은 상위 수행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초부터 닦아야 합니다. 기초를 다진 뒤 순서대로 수행해 나가면 수행이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했다면 환자는 그 약의 효과에 대해 물어볼 것이 아니라 일단 약을 먹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새겨들어야 할 조언 중 하나입니다만 극단적인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고 이해하려고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것은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피해야 할 또다른 극단적 행동이 있습니다. 수행을 왜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수행법을 듣고 맹목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수행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반면, 수행의 요점과 목적, 그리고 적용하는 법을 전부 이해했다면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방법을 굳이 다시 설명해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행의 목적과 적용방법을 이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의 개인적 문제만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돕는데 있어 겪는 어려움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게으르고 이기적이며, 또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돕는데 어려움이 있다.’라고 말하거나, ‘나는 너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도 모르겠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는데 겪는 이러한 어려움들 역시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비관합니다. 내가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내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내가 해내지 못했기에 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원인과 결과에 대해 무지한 결과입니다.


법에 대한 믿음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하는 것을 스트레스로 생각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실천하려면 우선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수행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불교적 접근법을 토대로 우리가 지닌 어리석음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을 얻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해탈과 성불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도 있습니다. 해탈과 성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특히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니면 불가능할까요? 만일 우리의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 위선적이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행동은 일종의 미친 게임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다는 수행은 실제 수행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와 명상 그리고 많은 연구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해탈과 성불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만이 아닌 내가 이뤄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가능하셨을지 몰라도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모든 이들이 성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리석음은 무엇으로 제거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어리석음을 실질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입니다. 올바른 이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제거하는 지와 제거된 어리석음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법을 수행하는 실질적인 장소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수행은 삶에서 겪는 각자의 어려움, 어리석음, 괴로움 등을 그때그때 대처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수행은 내면의 고찰을 필요로 합니다

수행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상을 피해서 조용하고 한적한 동굴이나 방에 들어가 방석에 앉아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상을 회피하는 것은 수행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것은 삶의 문제를 극복하는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삶입니다.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고자 앉아서 명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수행은 내면을 살피게 합니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감정, 동기, 태도, 강박적 행동 패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들을 찾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감정, 즉 번뇌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잃고 마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이는 매우 유익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이 어떤 감정에 속박되어 있는지를 인지하는데 도움이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내면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적절한 치료제를 처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에 대해 매우 예민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 상태를 전환시키려면, 우리가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많은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럽습니다. 만일 우리가 화를 낸다면 어떻게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유연한 사고

수행을 할 때는 한 두가지가 아닌 많은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자 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복잡해서 하나의 치료제로 모든 상황을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수행만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서 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유연함과 다양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 방법이 효과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이 효과가 없다면 또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 합니다. 

저의 스승인 첸샵 쎌콩 린포체는 삶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려고 할 때면 항상 두 세가지의 대안책을 마련해 놓고 시작하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계획 A가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또다른 대안인 B와 C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는 효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척 유용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할 때도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해 두어야 합니다. 만약 방법 A가 적합하지 않다면 준비해 둔 다른 대안을 고려해 봐야 합니다. 다른 방법들을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육체를 단련할 때도 몸을 먼저 풀어야 하듯 수행 역시 다양한 방법과 명상에 대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을 일상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행법에 익숙해질 수 있게 스스로 실천해야 합니다. 수행을 일종의 취미 생활로 볼 것이 아니라 항상 실천해야 하는 자신과의 약속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피하기 

우리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수행해야 합니다. 부모, 자녀, 직장동료와 있을 때도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할 때 다양한 극단적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이미 조금은 언급을 했습니다. 우리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거나 오롯이 자신에게만 전가하는 극단적 행동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변화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이 변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비롯된 극단적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너무 집중하다 보면 다른 이들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키며, 나의 문제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문제는 더이상 내 알 바가 아닙니다.  

또다른 극단은 우리 모두 악하다고 생각하거나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의 문제들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긍정적인 부분과 성향도 인식하여 자신을 점점 더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문제와 무지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낮은 자존감을 쉽게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지켜보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선한 성품을 기억해야 합니다.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일지라도 좋은 자질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강아지나 새끼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쓰다듬으며 소소한 따스함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이들이 이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른 이들에게 선함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이런 식으로 우리의 선한 부분도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은 우리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한 부분들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단점과 장점을 찾는 과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또다른 극단에 치닫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나는 나빠. 그래서 나는 수행해야 해. 수행하지 않으면 이보다 더 나빠질 거야.’ 이런 말과 생각은 수행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앞으로 발생할 문제를 피하고 싶습니다. ‘나의 문제를 없애고 싶어. 이 수행법으로 하면 돼.’라는 생각이 가장 건전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건 하지 않건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걸 해야 해. 이걸 안 하면 넌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다른 극단적 행동도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다. 우리는 완벽하기 때문에 불성을 보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은 극단적인 사고입니다. 우리의 태도는 어떤 것도 바꿀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미 완벽하다. 그래서 우리의 부정적인 행동을 멈추거나 그만둬야 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가 나쁘다거나 완벽하다는 극단적 사고를 삼가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신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일상과 수행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핵심입니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높이려면 자기 자신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감화를 주다

우리는 자신을 갈고 닦으며, 스승에게 감화되고, 함께 일하는 사회의 사람들에게 감화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 수행자들이 하늘을 날았다는 스승의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증명하기도 어렵고 사람들을 환상에 빠지게 유도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적인 유대관계는 없을지라도 우리와 관련 있는 이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훌륭한 스승들은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일부러 애쓰지 않으십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태양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태양은 사람들에게 온기를 주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이 태양의 온기를 느낍니다. 훌륭한 스승들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스승들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과 성품, 세상에 대처하는 모습 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다른 이들보다 현실적이고 겸손한 스승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확장 시킵니다. 

오래 전에 입적하신 뒤좀린포체가 생각나네요. 뒤좀린포체는 닝마파의 지도자로서  저의 스승들 중 한 분이셨습니다. 린포체는 천식을 앓고 있으셨습니다. 저 역시 천식이 있어서 조금은 아는데, 천식이 있으면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충분한 공기를 들이마시려면 자신의 에너지가 안으로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문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은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저는 린포체께서 심각한 천식을 앓고 있으면서도 법좌에 앉아 법문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린포체는 법문을 하실 때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흡곤란 증세를 조절하시고 천식에 방해 받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마술이 아닌 언제나 겸손한 린포체의 모습에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감화 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우리의 실생활을 다루고 있으며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길로 나아가면서 보다 성숙해지면 나 자신에게서도 감화를 받습니다. 이 또한 좋은 변화가 생길 수 있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서 감화 받습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아주 섬세하게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이 부분을 잘 다루지 못합니다. 자신이 발전한 만큼 거만해지고 자랑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전이 의미하는 바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수행의 진전

우선 우리는 발전은 절대 선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로 올라가기도 하고 아래로 추락하기도 합니다. 이는 윤회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단지 상사도와 하사도에 태어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추락하기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난 지금 행복해. 난 지금 불행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분은 늘 들쑥날쑥합니다. 수행을 하고 싶을 때도 있고 수행을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항상 들쑥날쑥하므로 놀라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가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라한이 될 때까지 감정 변화는 계속될 것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한 성인의 지위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윤회에 있는 한 항상 오르내림을 반복할 것입니다. 오랜 세월 수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갑자기 닥친 상황이 속상할 수는 있겠지만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우리가 형편없는 수행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윤회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하고 싶다면 기적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발전에서 기적이 있기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달라이 라마 성하는 단지 1,2년 수행을 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5년에서 10년 정도 수행을 하고 ‘내가 지난 5년, 또는 10년 전보다 더 고요한 사람이 되었는가? 나는 과거에 비해 어려운 상황을 더 많이 대처하고 화내거나 포기하는 일도 줄었는가?’라고 점검을 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약간의 진전을 보였다면 감화된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진전된 모습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상황이 나빠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전에 비해 크게 화내지 않습니다.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선한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수행을 지속할 힘을 줍니다.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올바른 길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윤회에 있는 한 우리가 확신한 길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좋고 나쁨을 경험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의 일상과 수행이 하나되는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모쪼록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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