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불교를 수행해야 하는 목적에 대한 혼란을 제거하다
저는 일상 속에서 귀의하며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0세기 말에 티베트로 가셨던 인도의 위대한 스승 아티샤가 떠올랐습니다. 아티샤는 티베트에 전파되었던 불교가 쇠락하고, 이후에 티베트에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셨던 위대한 스승들 중 한 분입니다. 당시 티베트에는 밀교와 고도의 수행력을 요구하는 수행법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정확하게 해석해 줄 수 있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들이 있다고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했고, 인쇄된 경전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글을 읽을 수 있을 수 있는 이들 중에 경전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서부 티베트의 한 왕이 용기 있는 티베트인들을 인도로 파견해 인도에서 스승을 모셔오도록 했습니다. 왕의 명령으로 인도로 가게 된 티베트인들은 먼 길을 걸어야 했고, 새로운 언어를 습득해야 했으며, 다른 기후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으며, 그 외의 사람들도 인도에서 사망했습니다. 어쨌든, 티베트인들은 인도에서 위대한 학자이자 수행자로 존경을 받던 아티샤를 티베트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아티샤는 티베트에 수십년 동안 머무시면서 티베트인들에게 주로 가르치셨던 가르침은 “귀의하는 것과 업과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아티샤가 티베트인들에게 “귀의와 업과를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아티샤의 행적은 오늘날과 연관이 많습니다. 오늘날에도 불교를 잘 모르고, 일상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수행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이들이 또다시 밀교와 고도의 수행력을 필요로 하는 수행이야말로 참된 수행이라고 잘못 이해합니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 전혀 기초가 없거나 불교를 잠깐 접한 많은 이들이 곧바로 밀교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들은 밀교의 의식들이 불교의 수행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귀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우리의 일상을 바꿀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떻든 간에 불교의 수행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며, 선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취미생활이나 스포츠처럼 매일 30분이나, 일주일에 한번, 또는 퇴근해서 몹시 지친 몸으로 짧게 때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 늘 수행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수행은 우리가 지닌 선하고 악한 마음과 행동을 잘 인지한 다음, 악한 마음과 행동은 줄이고, 선한 마음과 행동을 전보다 더 많이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목표는 모든 악업을 제거하고, 선업을 원만하게 닦아 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나만을 위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많은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입니다. 불자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로서 귀의한다는 것은 이같은 목표를 위해 일상 속에서 수행을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의하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불보, 법보, 승보 –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모든 불교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불교도와 비불교도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 법보는 우리가 해야 할 수행법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목표를 나타냅니다. 불보는 이와 같은 법을 가르치신 분들이며,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 분들을 의미합니다. 승보는 깨달음을 부분적으로 성취한 분들입니다. 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다르마’는 ‘예방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방법들입니다.
‘귀의처’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로 ‘샤라나’라고 하는데, 영어로 ‘refuge’라고 번역합니다. 때로는 ‘보호처’라고 번역하고, ‘의지처’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같은 단어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마’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외부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어떤 대상에 찾아 수동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다르마’가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귀의한다’는 것은 매우 능동적인 행동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저의 스승들께서 자주 사용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고, 근처에 동굴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동굴로 잠시 피해가겠다. 동굴로 들어가 대피하고 있으려고 한다’고 반복해서 말만 하고는 여전히 밖에 서 있다면 눈앞에 동굴이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우리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불보, 법보, 승보에 귀의하며, 귀의처로 의지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우리의 삶의 한 부분으로 삼지 않는다면 말로만 하는 귀의는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질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삼보가 일러 준 것들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귀의처를 ‘안전한 의지처’라고 표현한 것이며, 귀의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안전한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굴로 들어간 것은 비를 피하기 위해서일뿐 동굴 안에서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보, 법보, 승보가 의미하는 올바른 의미를 찾기 위해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저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면 “부처님”을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하나님”과 같은 구제자의 의미로 혼동하기 쉽습니다. 이런 경우, 부처님은 신과 같고, 승가는 성자와 같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서구 사회는 기독교의 영향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생각으로 초월적인 힘이 기적적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기를 기도합니다. 이점은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모조리 제거해주시길 바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리 모두 티베트식으로 불자의 이름을 받고, 목에 붉은 끈을 차고, 진언을 독송하고,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구원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티베트어를 하나도 모르지만 티베트어로 기도를 한다면 그로 인해 신비한 힘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최근 종싸르 켄체 린포체께서 제가 사는 베를린에 방문하셨습니다. 린포체께서 해 주신 말씀은 매우 감명 깊었습니다. 린포체께서는 “만일 티베트인들에게 독일어로 기도를 발음하게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독송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 경우 티베트인들 중에 몇 명이 실제로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전부 웃었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린포체께서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의 고통과 문제를 전부 제거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과 신통력을 지닌 존재를 찾아 그와 같은 큰 힘에 굴복하고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관련된 실제 문제는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인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삶은 어떤 목적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환생과 같이 깊은 주제를 굳이 꺼내지 않아도, 우리에게 일상은 무의미하고 무료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요? 우리는 자신의 일상을 돌이켜보면 슬퍼질 뿐 그다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의미 있는 방향성을 찾고, 삶의 목표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인 실천입니다. 삶에서 의미 있는 목적이나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좀더 든든하고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삶에서 의미 있는 목표를 지니기
우리는 살면서 어떤 종류의 목표를 가져야 할까요? 일반적으로 우리의 목표는 만족스럽지 못한 고통스런 현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삶의 목표라고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모두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명언이며, 생물학적인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픔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하물며 곤충이나 벌레들조차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크기의 어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어떤 문제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예를 들어, 우리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목표는 좋은 일자리를 구해서 빨리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다. 만일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면, 능력이 뛰어난 도둑이 된다면 빨리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러가지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한번도 돈을 충분히 가진 적이 없습니다. 수십억을 소유한 사람일지라도 늘 더 많은 돈을 원합니다. 그들은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어, 백억 이상을 소유한 사람들이 경제침체로 인해 재산의 절반을 잃고 절반만 남았다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들은 더이상 기부금을 내지 않을 것이며, 자선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50억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이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저금해서 이전과 같이 백억이 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주식 시장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혹시라도 돈을 잃을까봐 걱정을 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집에 몰래 들어와 물건을 훔치거나 자녀를 납치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개인 경비를 고용하고, 보안 장치를 집안에 설치합니다. 남미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런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친구라고 잘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버는데 필요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인에게 잘 하는 이들은 내심 내게 돈을 바라기 때문에 잘 하는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이와 같은 이들은 가난이라는 문제는 없지만 분명 돈이 많아서 생기는 또다른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속적 목표는 바탕이 불안정합니다
불교에서는 재물을 축적하는 것 외에도 세속적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세속적’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무익한’ ‘무의미한 것들’ 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의 스승이신 쎌콩 린포체께서는 티베트어로 ‘직땐-세상’이라는 단어 자체에 의미가 실려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바탕(땐)이 있는 것은 소멸한다(직)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너질 대상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확고한 바탕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들을 야기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인생 목표가 멋진 가정을 이루고, 많은 아이들을 키우며, 나이가 들면 그 아이들이 다시 나를 보살펴 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며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모든 일이 우리의 이상대로 이뤄지진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또 다른 예는 유명해지기 위해 너무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명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시간을 보내고 싶어합니다. 변장을 하지 않고는 외출을 하지 못하는 영화배우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떼로 몰려가 옷을 잡아당기고 껴안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슈퍼스타로 사는 것은 너무 힘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돌이켜 본다면, 물질적 편안함이나 정서적 안정감만으로는 우리가 겪는 삶의 모든 문제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냄, 애착, 탐욕, 질투. 오만, 어리석음 등이 있는 한 소위 ‘세속적인’ 수준에서 아무리 성공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감정 (번뇌)
불교에서는 내생을 인정하고, 내생에서 경험하게 될 고통과 끔찍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곤 합니다. 우리에게 ‘부정적인 감정(번뇌)’이 있는 한, 우리는 번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연히 악한 업을 짓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번뇌는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진정 좋은 것인지를 안다면 번뇌를 끊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잠재력은 문제와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내생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생을 예로 들어 이 부분을 논의해 보겠습니다. 현재 우리 자신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정적 문제의 진정한 원인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외적 요소들은 단지 감정적 문제를 유발하는 상황들일 뿐입니다. 사실,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빼앗는 것은 성냄, 애착, 탐욕과 같은 번뇌들입니다. 번뇌는 우리가 지닌 선한 성품을 활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를 돕고자 노력하는 것은 선한 성품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우리를 반박하면 화가 납니다. 이와 같이 번뇌는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 것을 방해합니다.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가 이런 식이 되면 너무 힘들어집니다.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투정을 부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내하지 못하고 화를 냅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며 조언을 하지만, 아이들은 듣지 않고, 관계는 점점 나빠집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관계는 점점 악화됩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기운은 빠지게 되고 성격은 온순해지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번뇌가 저절로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냄과 같은 번뇌는 아무런 노력없이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 번뇌에 대한 두려움을 지녀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영어로 “fear(두려움)”이라고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이 단어는 대체로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좋은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는 “dread(두려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언어로 이를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dread”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 너무 지루한 회의에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회의를 “afraid -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의가 “dread - 너무 싫어서 가기 싫습니다.” 그 일이 너무 하기 싫습니다.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겪게 될 내생의 끔찍한 일이든 이생에서 나이가 들면서 겪는 고통이든 우리는 두 유형의 두려움을 구별해야 합니다. 벗어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두려움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삶 속에서 종종 이와 같은 두려움을 경험하는데, 저는 이 두려움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귀의하는 계기가 되는 두려움은 우리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는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고통이 두려워서 귀의하는 것은 절망적이지도 않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힘이 우리를 두려운 상황에서 구제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요점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가능하게 할까요? 가장 큰 맥락에서, 모든 번뇌가 성냄, 애착, 탐욕과 같은 문제들을 야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번뇌는 실상에 무지한 까닭에 발생합니다. 이와 같은 번뇌들은 마음의 본성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있으며, 한번 제거한 이상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법보는 모든 번뇌를 뿌리째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음 또는 정신 작용
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에 대해 너무 자세하게 거론하지 않고 여기서는 마음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의 작용들은 매순간 일어나고 수면 상태에서도 작용합니다. 마음은 정신 작용의 주관적 경험을 의미하지만 뇌 과학은 생리학적 바탕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바탕이 되는 마음의 본성에 무지함과 성냄을 비롯한 번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매순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정신 홀로그램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적 관점에서, 광자들은 눈으로 들어와 신경을 전달하는 물질들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일종의 전기 충격으로 전환됩니다. 뇌는 이것을 내부 홀로그램으로 만들어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생성됩니다. 물론, 거미와 파리의 눈 세포와 인간의 눈 세포를 통해 일어나는 것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음파”라고 부르는 유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정신 홀로그램은 감각일 수도 있고, 그저 일어난 생각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예로 들면, 광자가 카메라를 통과하고, 전기 충격으로 전환된 다음, 사진을 만드는 과정과는 다릅니다. 마음 홀로그램에는 일종의 “인지함”이 개입하기 때문에 다릅니다. 여러분이 의식이 있든 없든, 또는 알고 있든 없든, 여전히 일종의 인식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정신 작용은 컴퓨터와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이 작은 키들을 누르면 전기 충격이 컴퓨터에 전달되고, 컴퓨터는 입력한 것을 화면에 이미지나 스피커 소리로 변환합니다. 인공지능을 통해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컴퓨터에 인지 능력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컴퓨터는 생명체들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컴퓨터와 우리가 다른 점은 정신 작용과 관계된 행불행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행복과 불행을 느끼지 않습니다. 컴퓨터는 “아까 재부팅 할 때 내부 오류로 인해 작업 중인 파일이 삭제됐다.” 라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는 이런 일이 발생하면 매우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납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들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정신 홀로그램, 일종의 정신적 개입, 행불행의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잠에 들면 홀로그램역시 수면에 들어가 기억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의 의식은 남아있습니다. 의식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완전히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꾸지 않을 때도 일종의 행불행이 아닌 중립적 감각을 느끼기도 합니다. 꿈꾸고 있을 때는 애착과 성냄을 비롯한 번뇌와 관계된 행불행의 감각도 느끼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번뇌들은 매순간 상속되는 마음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마음의 본성이 청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생겨날 수 있도록 이해해야 할 복잡한 부분들이 있지만 이것은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마음에서 이와 같은 번뇌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번뇌의 정의는 번뇌가 일어날 때 마음의 평화를 상실하고 자제력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냄, 애착, 탐욕 등으로 인해 악한 행동하고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제력을 상실하여 다른 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고는 이후에 자신이 한 말에 대해 후회합니다. 그리고 ‘악한 습’을 쌓습니다.
만일 우리가 앞으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피하고 싶다면 이와 같은 번뇌와 무지함을 제거해야 합니다. 번뇌는 마음의 본성과 작용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매순간 작용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모든 마음의 작용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 외 자애심, 자비심과 같은 다른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한 성품들은 더더욱 향상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악한 마음은 무지함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반대로 선한 마음은 이해, 즉 실상을 앎에서 비롯됩니다. 매우 간단한 예로, 무지함은 ‘나는 이 세상의 중심이다. 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나는 항상 내 길을 가야 한다. 나는 늘 모든 관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관심의 중심이 아니며, 우리의 길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마치 개같이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으르렁거립니다. ‘넌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어’라는 이런 생각들은 무지함으로 인해 발생합니다. 현실은, 우리 모두 여기 있고, 우리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한 소멸 (멸제)
우리의 내면을 분석하면 할수록 우리의 무지함은 바탕이 없고 견고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거짓일 뿐입니다. 반면, 바른 앎은 검증할 수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바른 앎을 통해 이해력은 향상되고, 무지함을 극복합니다. 집중력과 자제력을 지니고 항상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무지함은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귀의하는 것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우리에게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목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목표는 모든 무지함을 완전히 제거하여 다시는 고통이 생겨나지 않는 “멸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무지함은 우리가 이생과 내생에 직면할 모든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히,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무지함은 바르게 앎이 대체하고 제거합니다. 우리가 무지함을 제거하면 번뇌는 제거되고 그로 인해 더이상 문제와 고통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가 악한 부분에 해당하는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며, 후자는 모든 선한 부분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 부분은 올바른 앎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첫 번째는 고제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집제입니다.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우리의 무지함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멸제입니다. 고통의 원인인 무지함을 제거한 것이며, 무지함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충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도제입니다. 도제, 즉 진정한 길을 통해 무지를 제거하는 멸제를 성취합니다. 여기서 ‘길’이라고 함은 ‘깨달아 가는 내면의 단계’를 의미하며, 이를 길로 표현한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도제는 멸제를 성취하는 깨달아 가는 길이며,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서 생겨난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멸제와 도제는 우리가 삶에서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을 법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도제를 통해 멸제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번뇌들을 제거하고, 선한 잠재력들을 깨닫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두렵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아간다면, 아무리 많은 돈과 명예, 친구들이 있어도 여전히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번뇌로 인해 점점 더 탐욕스러워지고, 불안해하고,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하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부주의로 인해 불에 대일 수도 있지만, 주의하면 다칠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건전한 두려움입니다. 편집증에 대해 거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종종 친척과 친구들에게 자주 화를 내고 소리 치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누구도 찾지 않는 외로운 노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돌봐 주기를 거부하는, 마음에 상처만 가득한 노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불평불만과 소리만 치는 사람 곁에 어떤 사람이 있고 싶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아서 나중에 나를 돌보게 할 것이라고 하거나, 은행에 적금을 많이 부어 나이가 들면 실버타운을 이용할 것이라는 생각 외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날이 비참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성격을 고치는 것입니다.
누구나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는 늘 한결같고, 나는 언제나 이런 성격의 사람이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나는 화를 잘 내니까 너가 적응하도록 해. 나는 변하지 않아.’라고 하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부정적인 부분인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긍정적인 부분인 선한 성품을 깨닫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일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겨날 것이라는 건전한 두려움과, 더불어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힘을 강화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안전한 방향을 삶에서 실천하게 됩니다.
만일 이것을 ‘대승’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여기에 자비심을 추가해야 합니다. 대승의 기본적인 사상은, 만일 우리가 어떤 이에게 화가 났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돕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성냄, 애착, 질투, 그 외의 다른 감정들로 인해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함과 번뇌를 전부 제거해야만 다른 이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지만 정작 돕지 못할 수 있다고 주저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내심과 이해심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기는커녕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데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상상만해도 끔찍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우리 스스로 발전하고 안전한 방향인 선한 길로 안내합니다.
수행은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과 문제들로 인해 우리가 귀의하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 번뇌가 있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더 많은 고통을 겪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 모두 심적인 고통을 겪는 것은 동일합니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화를 내고, 욕심을 부리며, 이기적이고, 질투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정도는 정상이라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이들 모두에게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에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화가 나는데도 인내하며, 내면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단지 이러한 것을 약화시키고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모든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바르게 아는 앎이 필요합니다.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만 알면 충분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나와, 모든 이들과,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언제나 알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마음의 본성은 본래 청정하고 선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불보의 공덕
안전한 의지처이자 귀의처는 불, 법, 승 삼보를 의미합니다. 삼보를 이해하는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삼보의 세간적 모습, 심오한 실체, 그리고 상징하는 의미들입니다. 우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삼보의 세간적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몸에는 매우 특별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들께서는 찰나에 어느 곳에나 당도할 수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몸으로 동시에 여러 곳에 몸을 나투실 수 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쉽게 믿어지지 않긴 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면 각각 다른 언어를 쓰던 모든 이들이 알아듣고,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선명하게 듣게 되는 것도 부처님이 지니신 법음의 공덕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시며 아끼시고, 동시에 모든 이를 보살피시는 공덕을 지니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지니신 공덕들은 너무 환상 같고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처님은 이렇다’라고 우리의 지적 수준으로 부처님을 가늠해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오류에 빠지게 되므로 매우 위험합니다.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부처님은 ‘모든 것을 전부 아시는 분이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의 핸드폰 번호를 모조리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처한 상황과 그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 아주 오래된 원인과 조건들마저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때마다 법을 듣는 이들에게 미칠 영향과 결과를 아셨으며, 그들만이 아닌 그들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지에 대해서도 미리 아시고는 그들에게 맞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는 최고의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훌륭하지 않나요? 부처님처럼만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알고 계신다고 우리는 조금이나마 확신합니다. 만일 우리가 ‘부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며,’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내 앞에 즉시 오실 수 있다.’ 라고 부처님을 신격화한다면 사적인 관계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처님께서는 나를 각별히 도와 주시고, 다른 이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나를 이해하신다’라고 생각하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듯이 부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동등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가 ‘매우 훌륭하십니다. 부처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라고 생각해도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과는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사랑과 자비를 평등하게 베푸십니다. 우리가 부처님께 기도와 공양을 올리지 않아도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도우시니, 지출없이 얻는 소득인 셈입니다. 게다가 부처님께서는 인내심이 크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스승과 종교를 선택할지라도 결코 질투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분노하지 않으시며, 하늘에서 벼락을 치는 행위와 같은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전한 의지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간에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와 같이 보면 더 안전하고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속이지 않으시고 실망시키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매우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교를 꾸준히 배우면 내 발에 박힌 가시를 뽑듯이 우리의 고통을 부처님께서 빼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점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보여지는 부처님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지 않고 이 정도의 이해에서 그친다면 부처라는 존재를 우리를 구원해 줄 신격화된 존재로 생각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과 불화로 표현합니다. 불상과 불화는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불상을 기독교에서 모시는 그리스도상으로 착각할 수 있을까요? 불상은 무엇입니까? 이슬람인들이 지적하듯 우리는 신격화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정말로 불상 앞에 절을 해야 할까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부처님의 대상 이해의 수준이 낮다면 이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 부처님을 이와 같이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깊이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 이해의 수준은 동상과 그림으로 묘사된 신을 숭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법보의 공덕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법이라고 하는 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으신 법이자 깨달으신 후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내가 믿는 신과 같은 부처님이 있고,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코란 대신 불교 경전이 있고, 불교의 경전은 성경과 비슷한 것으로 경전 안에 담긴 모든 단어가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경전을 존경해야 합니다. 허나 부처님께서는 “내가 한 말일지라도 바로 믿고 따르지 말라. 금을 살 때와 같이 먼저 분석해보라.”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조차도 제자들에게 명확하게 분석해 볼 것을 조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게을러지면 아무것도 분석하고 확인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하시고, 아끼시는 분인데 어련히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설하셨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불법이라는 것은 실제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불교를 기독교처럼 바꾸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승보의 공덕
그렇다면 승가는 어떨까요? 애석하게도 서양에서는 사원에서 거주하는 모든 이를 ‘승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에서 이 단어가 의도한 실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승가’는 사원 내에 기거하는 스님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스님들 중 누군가가 문제를 일으켰다면 여전히 그 집단에 귀의할 것인가요? 저는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함께 수행하고, 노력하고, 서로 도우며, 공존하는 이 영적 집단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승보를 의미하는 진정한 귀의처는 아닙니다.
또다른 의미의 승가는 사원 내에 기거하는 스님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녀 스님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완벽한 귀의처의 모습을 보여주는 스님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이 산만하고 불편한 사람들이 출가를 하기도 합니다. 제 친구는 “출가는 점심을 무료로 먹으려고 하는 거야.” 라고 했듯이 어떤 스님들은 삶의 어려움에서 회피하고자 출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자신을 갈고 닦으며 청정한 수행자가 되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을 지지하고 존경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또다른 단계의 승가가 있습니다. 밀교를 수행하는 금강승 수행자를 승가라고 한다고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따라보살, 문수보살 등을 승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따라보살에게 기도하고 우리를 구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모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저는 우리가 늘 기도 드리는 본존들을 밀승의 신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본존들은 신인 삼보와 가까워지게 해 주는 중간 매개체가 절대 아닙니다.
불 법 승 삼보의 가장 심오한 의미
법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모든 무지함을 완전히 제거하고, 실상을 바르게 깨달으며, 도를 완전히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법입니다. 이를 우리가 깨달으면 우리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무지와 번뇌, 분별과 어려움이 전부 제거되고 알아야 할 바를 전부 알게 될 것입니다. 부처는 깨달아야 할 바를 전부 깨닫고,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승가는 실제 성인의 위치에 오른 성인들을 의미합니다. 성인 승가는 높은 수행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멸제와 원만한 깨달음의 공덕을 전부 이루신 것은 아니고 부분적으로 이뤄 내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끊어야 할 무지함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제거하는 여러 단계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여러 단계의 무지함을 제거하는 것 역시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승가에 해당하는 성인들은 이 단계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이뤄냈을 뿐 전부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무지함을 제거하기 위해 도를 닦고 있습니다.
부처님들과 성인들, 과거 인도와 티베트의 위대한 수행자들과 오늘날의 뛰어난 수행자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깨우치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우리는 달라이 라마와 같은 분을 뵈면 영적으로 강한 자극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분이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법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부처이고 아니고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분이 불법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설명하실 수 있고, 뛰어난 불교 학자이며, 수행자이고,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많은 이들을 위해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법문을 하는 일정은 결코 쉬운 일정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분에게는 늘 자신을 비난하며 비판하는 중국이라는 공식적인 원수가 있습니다.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악마라고 여기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행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 수 있을까요? 달라이 라마는 화내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하고 계십니다. 믿기지 않나요? 부정적인 감정들을 제거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부처이고 아니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성품을 직접 접하지는 못해도, 달라이 라마와 같은 분의 성품은 직접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내면의 변화가 생겨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분과 같은 수행력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충분히 가능하고, 이 길로 나아가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달라이 라마를 부처님과 비슷하게 본다면, 현재 살아계신 귀한 스승들이 달라이 라마와 같은 공덕을 전부 지니지는 못했더라도 승가의 공덕을 비슷하게 지녔다고 보면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마음을 북돋아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다른 위대한 스승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이분들은 성냄, 애욕, 증오, 질투 등의 감정들을 상당히 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랑, 자비, 인내와 같은 선한 성품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분들을 통해서 각자의 노력에 따라 성취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부처님과 밀라래빠와 역사 속의 다른 성취자들보다 더 생생한 예입니다.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훌륭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은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믿을 수 있나요? 구루 린포체는 연꽃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정말로 믿으실 수 있나요? 이러한 비유는 받아들이기가 어렵긴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접하기 어려운 부처님보다는 달라이라마와 다른 훌륭한 스승들을 내 본보기로 삼아 부정적인 것들을 끊고 선한 성품을 위해 노력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도 법을 실천한다면 이런 분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법이며, 멸제와 도제는 성취가 가능한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일이며, 이것은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의미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일상에서 귀의하는 법
살아가면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거나, 이기적인 행동이 나올 때면 결과적으로 고통을 겪을 것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차립니다. 그렇다고 화가 날 때마다 스스로 너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화를 내니 나는 너무 나쁘고 끔찍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벌을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에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래서 뭐? 나는 내가 내키는 대로 할거야.’라고 고집하게 되는데, 옳지 않습니다. 단지 이러한 생각들이 부정적인 생각들이라는 것을 알고,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생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간추리면, 일상 속에서 이같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날 때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방법들을 배워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화를 줄이려면 인내심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은 그들이 불안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인과 조건으로 인해 그들은 불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해를 입히는 이들일지라도 그들에게 화내기 보다는 자비심을 지녀야 합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우리가 화를 낼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괜찮아, 괜찮아.’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아기처럼 대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화를 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를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순간에 성냄을 제거할 수 없고,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일생 동안 노력해서 가고 싶은 방향입니다. 성냄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할 것입니다. 이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인내심과 이해심, 자비심을 발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들을 점점 더 강력하게 발달시킬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른 이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고, 그들이 우리보다 특별하지 않고, 우리가 그들보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귀의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의지할 데가 있다는 것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의지처입니다. 우리가 귀의처를 향해 나아갈 수록 많은 어려움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요약
우리는 귀의하는 의미와 우리의 삶에 귀의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를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근간이 되는 부분입니다. 많은 이들이 귀의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귀의하고 하지 않고에 따라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집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법회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이름을 받고, 목에 붉은 실로 된 수호끈을 차고, 법에 입문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귀의하는 의미를 너무 하찮게 만들며 무의미해지게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자신에게 ‘귀의하는 것으로 불자가 된다면 나는 귀의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만일 귀의를 통해 우리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제대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귀의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수준의 수행을 한들 어떠한 성과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