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션 3: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함

제2성제– 고통이 생기는 원인

어제 우리는 제1성제, 즉 “삶은 괴롭다”는 사실을 조금 더 개인적이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세 가지 성제로 같은 방식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불교 수행이 우리에게 실제로 와 닿고 의미 있게 삶을 바꾸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삶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 스스로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주었다면, 이제 제 2성제 즉 고통이 생기는 원인을 살펴봅니다. 고장난 배관을 고치려면 왜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야 하듯이 우리의 문제도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중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쪽 극단은 이런 식입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외부의 영향 때문이야. 내가 어릴 때 엄마가 그렇게 했고, 사회가 이랬고, 경제가 이래서야.”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전부 내 잘못이야.” 그리고 모든 책임과 죄책감을 무겁게 자기 자신에게 떠넘깁니다. 

불교에서는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을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 즉 무명이라고 설명하는데, 그것을 쉽게 왜곡해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멍청하다.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결국 내 잘못이다.” 이런 생각은 모두 항상 잘못하는 존재로서의 “단단한 나”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언제나 틀리고, 언제나 부족한 그 ‘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는 무지하다”라고 하기보다는,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2성제, 즉 고통이 생기는 원인을 조금 덜 판단하는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왜 이렇게 힘든지를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이해하려면, 제 2성제를 반드시 공의 이해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모든 걸 망쳐버린 어떤 고정된 “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 망쳐버린 바보 같은 나” 같은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마음속에서 훨씬 더 심한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우리 자신의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양동이가 첫 번째 물방울이나 마지막 물방울 하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삶도 하나의 원인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하나의 원인에 선을 그러 놓고 “이게 전부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여러 조건에 의해 함께 일어납니다. 우리의 이해 부족과 혼란, 사회적 환경, 경제적 상황,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경험까지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 모든 물방울이 모여서 지금의 삶이라는 양동이를 채운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의 근본 원인을 알지 못함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는 상태가 가장 깊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결국 이것을 없애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원인들은 이 알지 못함에서 파생된 것이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세 살 때 어머니가 했던 일을 지금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래서 제2성제를 다룰 때는 반드시 공과 연기의 관점에서 판단 없이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과정은 제1성제를 다루었을 때와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래,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판단 없이 인정하려고 합니다. 이것 굉장히 섬세한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채소를 썰다가 손을 베었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 손을 베였네.” 그리고 굳이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하지.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지”라고까지 생각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조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납니다.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손을 벤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칼이 날카로웠을 수도 있습니다. 칼이 무뎠다면 베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배가 고파서 음식을 준비해야 했고,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매일 먹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습니다. 이런 조건이 없다면 그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한 결과입니다. 손을 베었다고 해서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문제를 겪는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된 존재인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내면의 악마를 돌보는 방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의 원인을 판단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한번 해봅시다.

[수행을 위한 잠시 멈춤]

3성제고통을 완전히 멈출 수 있음

제3성제는 우리의 문제를 완전히 멈출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것입니다. “소멸”이라는 말은 결국 문제를 멈출 수 있고 없앨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의 “cessation”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완전한 멈춤” 또는 “완전한 소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문제가 끝난다는 거싱 아니라, 문제의 원인까지 함께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특정한 하나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사를 하면 지금의 배고픔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배고파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반복되는 문제와 그 원인의 흐름 자체를 멈추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배고픔의 원인은 식사를 하면 사라지지만, 배고픔 자체는 다시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정 문제 하나가 아니라 문제의 원인이 계속 반복되는 흐름 자체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나는 정말로 내 문제의 원인이 계속 반복되는 이 흐름을 완전히 멈출 수 있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멈출 수 있는가?” 즉, “해탈과 깨달음이 정말 가능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가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어느 정도라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왜 불교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깨달음이나 해탈은 단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면서,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는 것을 이루려고 시간을 쓰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꽤 심각한 문제입니다.

문제는 해탈과 깨달음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하는 논리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특히 중관 프라상기카 철학에서는 진정한 소멸이 공과 동일하다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매우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이것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긴 과정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확신하지 못하면 실제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결국 현재 단계에서는 우리는 이것을 잠정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해탈과 깨달음은 가능하다고 일단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일까요? “믿습니다. 할렐루야!” 같은 방식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스승은 부처다. 나는 그 안에서 깨달음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안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도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별해야 합니다. 스승이 본질적으로 부처인 것인지, 아니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후자가 맞습니다. 모든 것은 관점과 관계에 의존해서 성립합니다. 실제 수행에서는 우리가 존경하던 스승이 실수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실망하고 환멸을 느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

해탈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다루는 단계적 길(람림)적용

해탈과 깨달음이 정말 가능한가 하는 이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람림(단계적 수행의 길)의 기본 구조를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아티샤 존자께서 정리한 람림에서는 세 가지 동기, 즉 세 단계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가장 높은 단계는 깨달음이고, 그 다음 단계는 해탈이며,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더 나은 윤회 상태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초기 목표를 윤회라는 개념 없이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결국 지금의 삶이 더 낫게 만들고 싶다는 동기, 즉 우리의 윤회적 삶을 개선하려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삶을 개선하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지금 이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람림 이전 단계라고 할 수 있고, 편하게 “출발 단계의 동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벌진 박사에 의해 “가벼운 동기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는 것, 그리고 영적으로 잘난 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불교 수행자들 가운데 진심으로 “나는 해탈과 깨달음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정말 해탈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출리심이 있다는 뜻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리심에 대해 듣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초콜렛이나 텔레비젼을 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문제를 만들어내는 원인, 즉 우리의 부정적인 성향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행동입니다. 분노, 이기심, 탐욕, 그리고 우리가 쌓아온 마음의 벽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덧붙이고 싶어 합니다. 더 행복해지고 싶고, 더 좋은 것들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포기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출리심 없이 “나는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 “나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 진실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깨달음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쁜 수행자이고 스승도 나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이건 좀 유치한 방식의 사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지금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려는 동기 자체가 충분히 정당하고 의미 있는 단계라는 점입니다. 이 단계에 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큰 성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적인 성장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수행을 시작할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해탈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솔직한 태도는 이런 것입니다. “지금 나는 해탈과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지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환상을 쫓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우선 그것이 가능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면 나중에 진심으로 그것을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에는 지금 내 삶을 조금 나아지게 하는 데 집중하겠다. 그리고 적어도 내 문제의 원인을 조금 약하게 만들 수 있고, 혼란보다 다루기 쉬운 것들은 줄일 수 있다는 정도의 확신은 있다.” 이런 태도가 훨씬 건강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스승과의 관계도 훨씬 안정적으로 맺을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스승이 정말 깨달은 존재인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분노나 혼란이 훨씬 줄어든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가끔 실수를 하거나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나중에 더 깊이 수행하게 되면 그 의미를 다루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이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이룬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완벽한지 아닌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이 사람은 나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는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훨신 현실적입니다. 

이런 접근은 전통적인 불교 설명 방식은 아니지만, 서양적인 사고방식에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극단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완전한 부처이거나, 아니면 실수했으니 전부 틀린 것이다.”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나는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는 자기기만을 피하기 위해서도, 이 중간 단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제 스승이 실제로 부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벽을 통과할 수 있는지, 하늘을 날 수 있는지, 몸을 수십억 개로 나눌 수 있는지는 솔직히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분명히 나보다 훨씬 성숙한 존재라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감을 줍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라는 가능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실제로 시작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훨씬 현실적이고 접근 가능합니다. 문제의 원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궁극적인 상태(해탈)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일부 원인을 줄이고 멈출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이 단계는 수행에서 전혀 낮은 단계가 아니라 정당하고 꼭 필요한 출발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수준에서 있는 스승을 보면서 우리는 “아, 문제의 원인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멈출 수 있겠구나”하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해탈에 이르는 궁극적인 소멸은 아닐지라도, 그런 가능성에 대한 확신만으로도 우리는 이 첫 번째 단계에서 진지하게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단계입니다. 단순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안정적인 수행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가장 높은 동기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다가 기대가 무너지면 그대로 절망해 버립니다. 이것은 서양 수행자들에게 아주 흔하게 보이는 패턴입니다. 이를 피하려면 스스로를 과장하지 않고 먼저 지금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진지한 사람들이 불교를 시작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한 취미나 호기심이 아니라, 삶을 바꾸고 싶어서입니다. 이게 바로 수행의 진짜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네 번째 성제로 나아갑니다. 이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직접 뭔가를 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무 노력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스스로를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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