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인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람림 전체에서 이 주제가 차지하는 위치

우리는 훌륭한 자질을 두루 갖춘 선지식을 만나고, 수행에 필요한 여유와 원만한 조건을 모두 갖춘 귀중한 인간의 몸을 다시 얻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오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까지 미래를 대비하는 예방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은 채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파괴적인 행동에 익숙해진 우리의 습성 때문에 다음 생에는 좋지 않은 환생의 세계 가운데 하나에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 두려움을 느끼고, 부처와 법 승가가 우리를 이러한 위험한 추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안전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면, 우리는 그 길을 따르기로 온전히 자신을 맡기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특히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바로 다음 생에서 나쁜 환생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생은 어떻습니까? 삼보가 어떻게 우리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안전하고 지속적인 길로 이끌어주겠습니까?

예를 들어, 범죄자가 권력있는 고위 관리에게 도움을 청해 그 측근들의 지원을 받아 당장의 처벌을 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계속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다면 아무리 인맥이 좋다한들 결국에는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 행동을 바꾸고 법을 지킬 때에만 비로소 안전히 보장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는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시고 승가는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진정한 안전한 방향은 법이 제공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법의 가르침을 실제로 자신의 마음의 연속체에 받아들이고 길러 갈 때에만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시는 나쁜 환생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그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건설적인 행동이고 무엇이 파괴적인 행동인지를 분별하고, 각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져오는 행동은 버리고, 행복을 가져오는 행동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예방책입니다. 이러한 예방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쁜 환생을 초래하는 원인을 없앨 수 없으며 그 운명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행동의 기준을 올바른 이해 위에 세우는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업의 인과 법칙에 대한 존중과 확신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파괴적인 업의 충동과 건설적인 업의 충동이 어떻게 각기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중생처럼 이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괴로운 존재 상태에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 제1장 28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괴로움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괴로움 속으로 뛰어든다. 행복을 바라면서도, 어리석음에 가려 자신의 행복을 마치 원수인 것처럼 스스로 무너뜨린다.

업의 인과 법칙의 일반 원리

인도 나란다의 논사들은 업을 크게 두 가지 체계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설일체유부, 

경량부·자립논증파, 귀류논증파 중관학파에서 따르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경량부, 유식학파, 유가행 자립논증파 중관학파에서 따르는 설명입니다. 람림 전통에서는 업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보다는, 이 두 체계 가운데 업을 가장 완전하게 설명하는 체계에 따라 업의 세부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대체로 유식학파의 설명입니다. 유식학파에서는 모든 업의 충동을 촉구라는 마음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아상가(Asaṅga)의 『아비달마집론(Abhidharmasamuccaya)』 256-4-7 이하를 인용.]

두 체계 모두 업의 충동은 건설적인 것(선, kuśala), 파괴적인 것(불선, akuśala), 또는 부처님께서 선도 악도 아니라고 규정하신 것(무기, avyākṛta)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무기에는 해탈을 방해하는 것과 방해하지 않는 것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 세 범주에는 각각 촉구하는 업의 충동과 촉구된 업의 충동이 있습니다. 촉구하는 업의 충동은 마음의 업(意業)입니다. 이것은 촉구라는 마음작용으로 몸이나 말의 업을 일으킬지를 숙고하고 결정하도록 마음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마음작용을 움직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업이 촉구하면, 그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 몸의 업(身業) 또는 말의 업(口業)입니다. 

경량부·자립논증파, 그리고 귀류논증파 중관학파에서는 몸의 업과 말의 업을, 마음의 업이 결정한 행위를 실제로 일으키는 몸의 움직임 또는 말소리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업이 결정한 행위를 실행하는 수단이 몸의 움직임과 말소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촉구가 곧 업인 것은 아니며, 모든 몸의 움직임이나 소리도 업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점심을 먹을지 생각하도록 마음의식이나 몸의식을 움직이는 촉구는 업이 아닙니다. 또한 의자에 앉기 위해 몸을 움직이거나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업은 업이 전개되는 길(업도, 業道)입니다. 마음의 업에서는 업도가 마음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마음작용이 전개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이며, 그것을 일으키는 업의 충동 자체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반면 몸의 업과 말의 업에서는 업도 자체가 촉구된 업의 충동입니다. 다시 말해 몸의 움직임이나 말소리가 실제로 그 행위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업도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친(Vasubandhu)의 『구사론(Abhidharmakośa)』 제4품 제78게에서 인용.]

마음의 파괴적인 업에서는 마음의식과 그에 수반되는 여러 마음작용을 움직이는 업의 충동이라는 마음작용이 번뇌와 그릇된 태도에 의해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동기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일어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번뇌와 그릇된 태도는 업의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여러 마음작용 가운데 하나로서 그 파괴적인 마음의 업과 함께합니다. 업의 충동과 번뇌 및 그릇된 태도는 모두 마음작용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리키는 하나된 공통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이나 말의 파괴적인 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현상이 업의 충동이면서 동시에 번뇌인 경우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칼로 찌르도록 팔을 움직이게 하거나, 거짓말을 하도록 말을 하게 만드는 몸의식은 번뇌와 그릇된 태도가 함께하는 여러 마음작용 가운데 하나로 작용합니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업과, 그것을 일으키거나 그 안에 포함된 업의 충동은 그것이 건설적인지 파괴적인지에 따라 각각 긍정적인 힘 또는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긍정적인 힘은 죽음을 맞이할 때 성숙하여, 마음의식이 다음 생에서 자신을 의지할 물질적 토대롤 삼을 세 가지 좋은 환생 가운데 하나의 몸을 이루는 무기의 물질 요소를 취하도록 이끕니다. 또한 이번 생이나 미래의 어느 생에서는 마음의식이나 감각의식과 함께 일어나는 행복한 느낌이라는 마음작용으로 성숙합니다.반대로 부정적인 힘은 세 가지 나쁜 환생 가운 데 하나의 몸을 이루는 물질 요소를 취하게 하며, 그 결과로 괴로운 느낌이라는 마음작용으로 성숙합니다.

‘즉각적인 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업이 실제로 드러나는 행위로 나타나는 순간과 그 업의 결과가 성숙하여 나타나는 순간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 둘을 이어 주는 것은 잠재된 업의 씨앗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체입니다. 이 업의 씨앗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형성법으로, 마음의 연속체를 바탕으로 가설적으로 성립하는 법입니다. 물질도 아니고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도 아니기 때문에, 대상과 같은 의식의 다섯 가지 공통 요소를 마음의식과 공유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업이 드러나 있는 상태과 잠재되어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전체의 연속체는 건설적인 경우에는 긍정적인 힘으로, 파괴적인 경우에는 부정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업의 씨앗 자체는 장애가 없는 무기의 법입니다. 업의 씨앗은 자기 자신을 계속 이어 가는 각각의 순간에 취인(取因)으로 작용하며, 드러난 업과 잠재된 업을 이어 주는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몸의 업과 말의 업에 해당하는 촉구된 업의 충동은 물질적 현상입니다. 여기에는 표색(表色)과 무표색(無表色)이 있습니다. 표색은 업의 행위를 실제로 일으키는 몸의 움직임이나 말소리입니다. 그것은 업이 실행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그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작용이 건설적인지 파괴적인지를 드러냅니다. 반면 무표색은 매우 미세한 물질적 현상으로 이름 그대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업이 일어날 때 함께 생겨나며, 업의 행위가 끝난 뒤에도 특별한 원인으로 소멸하기 전까지 마음의 연속체과 함게 계속 이어집니다.

무표색은 미세한 입자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생겨날 때 함께 일어나거나 이미 존재하는 물질 요소를 바탕으로 생겨납니다. 물질적 현상이긴 하지만 형태도 없고 색도 없습니다. 또한 그것은 존재의 마음의 연속체에 축적되지만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이나 마음 상태를 느끼듯이 그것을 직접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무표색은 설일체유부와 중관학파에서는 인정되지만, 다른 불교 교학 체계에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세친의『구사론』 제1품 제11게에서 인용.)

무표색에는 모든 계율이 포함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몸이나 말로 파괴적인 행동이나 건설적인 행동을 하도록 지시할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해를 끼치는 것을 직접 만들거나 후원할 때, 다른 사람의 건설적인 행동을 함께 기뻐할 때 등에도 무표색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무표색은 업의 충동으로서, 우리가 시킨 일을 다른 사람이 실제로 행하거나, 우리가 만들거나 후원한 것을 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등의 경우에도 우리의 마음의 연속체에 긍정적인 힘이나 부정적인 힘을 계속해서 쌓아 갑니다.

요컨대, 우리가 건설적인 충동에 따라 행동할 때마다 행복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힘을 쌓게 되고, 파괴적인 충동에 따라 행동할 때마다 괴로움과 불행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힘을 쌓게 됩니다. 이러한 힘은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각각 행복과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낳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행복과 괴로움은 과거에 우리가 충동에 따라 행한 업의 결과입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어떤 전능한 존재가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대 자신이야말로 가장 좋은 벗이며, 또한 가장 큰 적이다.

이는 어떠한 상황이나 어떤 존재가 결과가 나타날 조건을 제공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행복과 괴로움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업의 일반적인 원리를 관하는 방법

행위의 인과 법칙에는 다음 네 가지 일반 원리가 있습니다.

  1.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
  2. 행위의 결과는 원인보다 훨씬 크게 중대될 수 있다.
  3. 짓지 않은 업의 결과를 받는 일은 없다.
  4. 한 번 지은 업은 반드시 결과를 낳으며,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

[1]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며, 어떤 행동을 하든, 또 어떤 마음으로 행동했든 간에, 건설적인 행동은 반드시 행복을 가져오고 파괴적인 행동은 반듯시 괴로움과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행복은 시원한 바람을 스치며 느끼는 아주 작은 즐거움에서부터 가장 큰 행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거에 지은 긍정적인 행동의 결과입니다. 매운 고추씨에서는 반드시 매운 고추가 자라고, 포도씨에서는 반드시 달콤한 포도가 열리듯이, 원인과 결과는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율장 아함(Vinaya-āgama)』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행위를 지었든, 그 결과는 반드시 그 행위에 상응하여 나타난다.

부처님의 율장은 크게 다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율장 근본사(Vinaya Vastu)』
  • 『별해탈계경(Prātimokṣa Sūtra)』과 『율분별(Vinaya Vibhaṅga)』(이 둘을 하나로 계산함)
  • 『율장 소사(Kṣudraka Vastu)』
  • 『율장 후편(Vinayottara Grantha)』

『현우경(賢愚經)』 제37장에는 야샤바드리카라는 비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키가 매우 작고 매우 흉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황금과도 같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출가하여 뜻깊은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사위국의 프라세나지트왕은 악명 높은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붙잡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급고독장자의 기원정사를 찾아왔습니다. 앙굴리말라는 희생자 999명의 엄지손가락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부처님께서 이미 그를 교화하여 아라한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고, 다만 그가 부처님과 함께 이 정사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기세 좋게 정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을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경을 독송하는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말과 코끼리들마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일 정도였습니다. 왕 또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앙굴리말라를 찾으러 왔다는 목적도 잊은 채 왕은 부처님께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하셨지만 왕이 거듭 청하자 마침내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왕은 야샤바드리카를 보는 순간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이 이렇게 왜소하고 흉한 모습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왕은 부처님께 어떻게 이런 목소리와 외모를 함께 갖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세 번째 부처님이신 가섭불께서 열반에 드신 뒤, 어느 왕이 그분을 기리기 위해 큰 탑을 세웠습니다.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며 “왜 이렇게 거대한 탑을 세워야 하는가? 이보다 작게 지어도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원망했습니다. 그 과보로 그는 다음 생에 키가 작고 추한 모습의 야샤바드리카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탑이 완성된 뒤 그 비구는 자신의 불평을 깊이 후회했습니다. 그는 정성껏 황금 종을 만들어 탑 꼭대기에 바쳤습니다.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맑고 아름다운 음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프라세나지트왕에게는 므리가라라는 대신이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사가마에게는 서른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체격이 건장하고 씨름과 무술을 즐겼습니다. 왕은 이 젊은이들이 겨루는 모습을 매우 좋아하여 특별한 총애를 베풀었습니다. 이를 시기한 다른 대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서른두 형제에게 각각 수정으로 만든 곤봉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 곤봉 속에는 교묘하게 날카로운 칼날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이 기뻐하며 곤봉을 높이 들어 올리고 궁궐 뜰에서 장난 삼아 모의 전투를 벌였습니다. 왕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음모를 꾸민 대신이 왕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저들은 단순히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폐하를 암살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는 증거라며 수정 곤봉 하나를 깨뜨렸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칼날이 드러났습니다. 프라세나지트왕은 크게 놀라고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서른두 형제를 모두 참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어머니에게 보내게 했습니다. 이 일에도 전생의 업이 있었습니다. 전생에 그 서른두 형제는 소를 훔쳐 잡아먹던 도둑들이었고, 프라세나지트왕은 바로 그때 잡혀 죽은 황소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어머니는 도둑들에게 쇠고기 요리를 내어 주었던 여관 주인의 아내였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파괴적인 행동을 했다고 가정해 봅싯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파괴적인 행동은 결국 괴로운 결과를 낳습니다. 그 과정에서 행복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오직 선한 동기라는 건설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 파괴적인 업 자체에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세에 배의 선장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 배에는 미냑 둠둠이라는 노 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선장은 오백 명의 상인을 태우고 항해하던 중, 그가 상인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모두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장은 오백 명의 목숨을 구하고, 동시에 그 노 젓는 사람이 대량 살생으로 엄청난 악업을 짓는 것을 막기 위해 깊이 숙고한 끝이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로 인해 자신이 어떤 괴로운 과보를 받게 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보살의 숭고하고 이타적인 동기로 인해, 그는 이 한 사건의 계기로 첫 번째 아승기겁동안 쌓아야 할 긍정적인 힘을 모두 완성하였고, 마침내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살생이라는 행위 자체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살생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파괴적인 행동은 반드시 괴로운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미 과거의 업으로 인한 모든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셨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해탈을 성취하셨으며, 평소에는 걸을 때조차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경지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일부러 발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걸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과거 선장이었을 때 사람을 죽였던 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설명하시며, 파괴적인 행동은 반드시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의 법칙을 자비로운 방편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2] 작은 원인이 매우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 방울의 독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고, 작은 알약 하나가 병을 고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은 부처님께서 어느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집의 안주인은 부처님께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깨과자 하나를 공양 올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녀에게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그대는 다음 생에 이러한 곳에 태어나, 이 공양의 공덕으로 독각불 아라한이 될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을 믿지 않던 그녀의 남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고작 과자 하나를 받았다고 그런 이야기를 꾸며 내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네.” 그리고 오백 대의 수레가 그늘 아래 들어갈 만큼 거대한 보리수를 예로 드시며, 그렇게 큰 나무도 참깨보다 크지 않은 작은 씨앗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주 작은 원인도 헤아릴 수 없이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일상적인 비유로 보여주셨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사례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비구에게 “네 목소리는 개나 개구리,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라고 조롱한 결과, 자신이 오백 생 동안 그러한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마누의 아들 카필라는 토론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열여덟 명의 비구를 여러 동물의 이름으로 모욕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머리가 열여덟 개인 바다 괴물로 태어났습니다.

반대로 아주 작은 선행도 매우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세친 존자가 『구사론』을 집필하던 당시, 그는 새장에 비둘기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비둘기는 날마다 세친 존자가 『구사론』을 암송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소리가 마음의 연속체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비둘기는 다음 생에 스티라마티가 될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말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부모에게 자신을 세친 존자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후 세친 존자의 뛰어난 제자가 되었고, 과거 생에 수없이 들었던 『구사론』에 대한 유명한 주석서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나가보디가 있습니다. 그는 전생에 역시 새였는데,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들은 인연으로 다음 생에는 용수의 뛰어난 제자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머물던 사찰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비구는 인식론(量論), 반야, 중관은 매우 쉽게 익혔지만, 비교적 배우기 쉽다고 여겨지는 아비달마와 율장은 유난히 어려워했습니다. 신통력을 갖춘 한 고승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비구는 전생에 전갈이었는데, 어느 날 사찰 문 안으로 들어와 인식론, 반야, 중관의 토론장이 있는 곳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비달마와 율장의 토론장에 이르기 전에 매에게 잡아먹혀 버렸기 때문에, 그 두 분야에 대해서는 아무런 습기(習氣)를 쌓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파리나 다른 작은 벌레가 불상이나 탱화 위에 앉더라도 함부로 쫓아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귀의의 대상과 인연을 맺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연속체에 유익한 흔적이 남아, 미래 생에서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겔룩파의 승가 교육은 인도의 다섯 가지 주요 논서를 바탕으로 다음의 다섯 학과를 공부합니다.

  • 인식론, pramana (tshad-ma), 삼보의 존재, 윤회와 환생, 그리고 부처님의 일체지와 같은 중요한 가르침이 왜 타당한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법칭의 『량평석(量評釋, Pramāṇavārttika)』을 기본 교재로 삼습니다.
  • 반야, prajnaparamita (phar-phyin), 공성을 깨달아 해탈과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수행자가 거쳐야 하는 수행의 단계와 도(道)를 배우는 학문입니다.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Abhisamayālaṃkāra)』을 중심으로 공부합니다.
  • 중관, Madhyamaka (dbu-ma), 귀류논증과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공성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찬드라키르티의 『입중론(Madhyamakāvatāra)』을 기본 논서로 삼습니다.
  • 아비달마, 중생을 이루는 몸과 마음의 구성 요소, 윤회의 세계, 업, 번뇌와 그릇된 태도, 해탈에 이르는 길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학문입니다. 세친(Vasubandhu)의 『구사론(Abhidharmakośa)』을 중심으로 공부합니다.
  • 율장, Vinaya (’dul-ba), 출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율과 승가의 규범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구나프라바의 『율경(Vinayasūtra)』을 기본 교재로 삼습니다.

앞서 우리는 순수한 동기로 아주 작은 공양을 올리는 것조차도 헤아릴 수 없이 큰 과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르마왕 아쇼카도 과거세에는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는 비파시불께 한 줌의 모래를 바치면서 그것을 황금이라고 마음속으로 관상했습니다. 이러한 공덕으로 그는 훗날 위대한 아쇼카왕으로 태어나 법을 널리 셋상에 펼치는 큰 업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부처님이신 가나카무니불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의 일입니다. 매우 가난한 노부부가 있었는데, 두 사람에게는 낡은 무명천 한 장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외출하면 그 사람이 그것을 걸치고, 다른 한 사람은 집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마을에 나갔다가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도 간절히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두른 해진 천 한 장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부처님의 한 제자를 찾아가 그 천이라도 공양 올려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는 물론 괜찮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길가의 바위 위에 천을 올려놓고, 자신은 숲속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부처님께서는 그 소박하지만 진실한 공양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러 가지 축원을 해 주신 뒤, 그 천을 다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노부부가 가져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공덕으로 노부부는 살아 있는 동안 왕과 왕비에 걸맞은 화려한 옷을 얻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할머니는 다음 생에 태어날 때부터 옷을 입은 채 태어났습니다. 훗날 판다리 비구니로 출가하였을 때에는, 태어날 때부터 몸에 걸쳐져 있던 흰 베옷이 자연스럽게 가사를 이루는 황색 승복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행동이라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작은 행동을 통해 조금씩 더욱 큰 업의 힘을 쌓아가며, 마침내 수행의 목표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다나바르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파괴적 행동을 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는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큰 항아리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모여 가득 차듯이,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의 연속체도 조금씩 쌓인 부정적인 힘으로 가득 차게 된다. 작은 건설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이 정도로는 나중에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큰 항아리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로 가득 차듯이, 훌륭한 수행자의 마음의 연속체도 조금씩 샇인 긍정적인 힘으로 가득 차게 된다. 

『현우경』 제16장에는 시리자티 장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행위의 인과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좋은 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시리자티라는 이름의 장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든 살의 노인이었고 가족도 많았지만,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그를 업신여겼으며, 그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가족들에게 깊이 실망하여 집을 떠나 사리불을 찾아가 출가를 청했습니다. 사리불은 신통력으로 그의 전생을 살펴보며 출가의 바탕이 될 만한 건설적인 업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공덕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결국 노인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리자티는 크게 낙담하여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으신 부처님께서 직접 그를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완전히 깨달았기에 사리불보다 훨씬 멀리 볼 수 있다. 그대에게는 많은 긍정적인 힘의 씨앗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아주 먼 옛날의 일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대는 한 때 파리였는데, 빗물에 떠내려가던 당나귀의 배설물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배설물은 탑 주위를 세 바퀴 돌았고, 그 인연으로 그대의 마음의 연속체에 공덕의 씨앗이 심어졌다. 그 공덕을 바탕으로 그대는 출가할 수 있으며, 수행 또한 반드시 성취하리라.” 

부처님께서는 시리자티의 출가를 허락하시고, 목건련에게 그의 수행을 맡기셨습니다. 그는 승원에 들어가 어린 사미들과 함께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린 수행자들은 늙은 그를 끊임없이 놀리고 조롱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늙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티베트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늙은 말과 늙은 개, 그리고 늙은 사람들은 모두 업신여김을 받는다.” 시리자티는 깊은 낙심에 빠졌습니다. ‘집에서도 모두가 나를 싫어하더니 이제는 절에서도 마찬가지구나.’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갠지스강으로 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기도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법을 업신여겨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비참한 늙은 몸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마침 목건련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붙잡았습니다. 시리자티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목건련은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라며 다시 절로 돌아가자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시리자티에게 자신의 가사를 붙잡게 한 뒤, 신통력으로 허공을 날아 승원으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이 하늘을 날아가는 동안 시리자티는 기이한 광경들을 보았습니다. 썩어 가는 한 여인의 시신이 있었는데, 뱀이 눈구멍과 콧구멍을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묻자 목건련은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설명할 때가 아니다.” 조금 더 가자 이번에는 한 여인이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이다가 물이 끓자 스스로 그 안으로 뛰어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시리자티가 다시 이유를 묻자, 목건련은 이번에도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고만 했습니다.

목건련은 시리자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마침내 바다 건너편에 도착하자, 모래사장에는 거대한 고래의 해골이 놓여 있었고, 두 사람은 그 갈비뼈 위에 앉았습니다.목건련은 먼저 시체와 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 여인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에 몹시 집착하여 늘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감상하곤 했다.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바다를 건너다가 익사했고, 시신은 해변으로 떠밀려 왔다. 자신의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과보로, 전생의 시신에 집착하는 뱀으로 다시 태어나 그 시체의 눈구멍과 콧구멍을 드나들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끓는 가마솥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던 여인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옛날 어느 독실한 여인이 근처 동굴에서 수행하는 수행자에게 늘 공양을 올렸다. 공양은 하녀를 시켜 보내곤 했는데, 하녀는 음식을 대부분 자기가 먹고 수행자에게는 조금만 가져다주었다. 어느 날 주인이 직접 동굴을 찾아가 보니 수행자는 몹시 야위어 있었지만 하녀는 오히려 살이 많이 쪄 있었다. 주인이 이를 추궁하자 하녀는 끝까지 공양을 훔쳐 먹은 사실을 부인하며, '차라리 제 몸을 삶아 먹겠어요.'라고 맹세했다. 그 거짓 맹세의 과보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받게 된 것이다.”

이어서 목건련은 벌레가 들끓던 나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전에 한 비구가 절의 창고를 관리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원래 승가에만 나누어 주어야 할 땔감을 돈을 받고 아무에게나 팔기 시작했다. 그 과보로 그는 나무의 모습을 한 존재로 태어났고, 부정한 방법으로 땔감을 받아 간 사람들은 벌레와 곤충으로 태어나 그를 갉아먹으며 괴롭히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고래의 갈비뼈 위에 앉아 이처럼 업의 인과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마침내 목건련은 거대한 고래의 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뼈는 바로 그대의 전생의 몸이다.” 놀란 시리자티에게 그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고래로 태어나기 전, 그대는 한 나라의 법왕이었다. 어느 날 왕이 장기를 두는 데 깊이 몰두하고 있을 때 대신이 죄인 한 사람을 끌고 와 어떻게 해야할지 여쭈었다. 왕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했다. 당시 나라의 법은 매우 엄격했다. 대신은 왕명을 그대로 따랐고 죄인을 곧바로 처형했다. 장기가 끝난 뒤에야 왕은 아까 무슨 일로 찾아왔던 것이냐고 대신에게 물었다. 대신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왕의 명령대로 죄인을 처형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자신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쳤다. ‘그때 왕으로서 깊이 참회한 공덕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는 지옥과 같은 악도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대신 고래의 몸을 받게 된 것이다.’” 

목건련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고래였을 때 그대는 어느 날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는데 마침 배 한 척이 가까이 지나갔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삼보에 귀의합니다.'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들은 고래는 입을 다물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생을 마쳤을 때, 그대의 뼈가 바로 이곳 해변으로 떠밀려 온 것이다."

시리자티는 목건련의 여러 이야기들을 곰곰이 되새겼습니다. 그는 무명이야말로 모든 파괴적인 행동의 근본 원인이며, 그것이 온갖 괴로운 과보를 불러 온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전생에 고래였을 때의 갈비뼈 위에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했습니다. 다시 절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목건련의 가사를 붙잡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신통력을 얻어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 앞에서 설법하실 때, 시리타지를 앞으로 나오게 하시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시리자티는 목건련의 자비와 뛰어난 방편 덕분이 모든 번뇌의 장애를 없애고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된 과정을 대중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감탄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앞에서 살펴본 첫째,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른다는 점과 둘째, 작은 행위도 매우 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숙고한 뒤에는 분명한 결심을 내려야 합니다. 곧, 가능한 한 많은 건설적인 행동을 실천하고 가능한 한 많은 파괴적인 행동을 피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사소한 선행이라도 꾸준히 실천하고, 아무리 작은 악행이라도 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3] 전쟁이나 대형 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피해 없이 살아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행위의 인과 법칙의 또 다른 일반 원리, 곧 짓지 않은 업의 결과는 결코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존자 가나카밧사가 태어났을 때, 일곱 마리의 황금 코끼리가 신비롭게 나타났습니다. 그 코끼리들은 배설물마저 모두 순금이었으며, 평생 동안 그가 어디를 가든 늘 곁을 따라다녔습니다. 때로는 무척 난처할 정도였지만, 아무리 떼어 놓으려 해도 결코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전생에 그가 두 번째 부처님이신 가나카무니불의 코끼리상을 진흙으로 수리한 뒤, 그 위에 금박을 입혀 공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자타샤트루왕은 이 일곱 마리의 황금 코끼리를 몹시 탐내어 일곱 번이나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들을 데리고 갈 때마다 그것들은 땅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신기하게도 가나카밧사의 곁에 나타났습니다. 이는 왕에게는 그러한 끊임없는 부를 누릴 만한 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카밧사는 십육나한 가운데 한 분입니다. 십육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한 뒤, 여러 지역으로 파견되어 다르마를 전하고 보존하는 임무를 맡았던 열여섯 분의 성자를 말합니다. 십육나한은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자(Angaja), 아지타(Ajita), 바나바사(Vanavāsin), 칼리카(Kālika), 바즈리푸트라(Vajriputra), 바드라(Bhadra), 가나카바라드바자(Kanakabharadvāja), 바쿨라(Bakula), 라훌라(Rāhula), 핀돌라 바라드바자(Piṇḍolabharadvāja), 나가세나(Nāgasena), 고파카(Gopaka), 아베다(Abheda), 마하판타카(Mahāpanthaka), 추다판타카(Cūḍapanthaka), 그리고 가나카밧사(Kanakavatsa)입니다. 또 다른 예가 있습니다.

바라나시의 우다이왕의 왕비 샤마는 이미 불환과(不還果)를 성취한 수행자였습니다. 그녀를 모시던 시녀 오백 명 역시 모두 공성을 깨달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허공을 나는 신통력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어느 날 왕궁에 불이 났을 때에는 그곳을 벗어나 멀리 날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생에 그들 모두가 브라만 집안의 오두막을 함께 불태우는 일에 가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지은 업과 그 업의 힘이 가져오는 결과를 자기 자신이 받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대신 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한 뒤 왕비는 오백 명의 시녀와 함께 다시 불길 속으로 들어갔고, 등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수쿠브자라는 등이 굽은 하녀 한 사람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전생에 그 방화에 가담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통력도 없었던 그녀는 불길을 피해 하수구를 기어 나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파괴적인 업의 원인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참혹한 과보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4] 한 번 지은 업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업백유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지닌 중생이 지은 업은 수백 겁이 지나더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인연과 때가 무르익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맺는다.

우리의 마음의 연속체에 쌓인 긍정적인 힘과 부정적인 힘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습니다.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반드시 성숙하여 결과를 낳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시리자티 장자의 이야기가 바로 그 예입니다. 그가 출가할 수 있는 공덕의 씨앗은 아득한 과거에 파리였을 때 당나귀의 배설물 위에 앉아 탑을 세 바퀴 돌았던 아주 작은 인연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습니다. 

샤타바하나바드라왕, 곧 우다야나왕은 용수 보살의 후원자였으며, 용수 보살의 『친우서』를 받은 왕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왕에게는 왕자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왕비가 왕자를 위해 왕의 예복을 한 벌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말했습니다. “저는 왕이 된 뒤에야 이 옷을 입겠습니다.” 그러자 왕비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평생 그 옷을 입지 못할 것이다. 네 아버지는 용수 보살의 가피를 받아 그분 만큼 오래 살 것이니, 네가 왕위에 오를 날은 없을 것이다.” 용수 보살은 이미 자신의 수명을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수 보살을 죽여 왕위를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했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용수 보살을 찾아가 간청했습니다. “부디 제가 당신을 죽일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에 용수 보살은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전생을 모두 살펴본 후 왕자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은 업 가운데 살해당하는 과보를 맺을 수 있는 업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전생에 비구였을 때 풀을 베다가 개미 한 마리의 머리를 알고도 잘라 죽인 일이 있었다. 그러니 풀잎 하나를 내 목에 스치게 하면 그 업이 성숙할 것이다.” 왕자는 그대로 했습니다. 풀잎이 용수 보살의 목에 닿는 순간, 그 분의 머리는 곧바로 몸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용수 보살은 참수되기 전에 자신의 머리와 몸이 썩지 않도록 가피를 베풀어 두셨습니다. 왕자는 두 부분이 다시 이어질까 두려워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각각 숨겨 두었습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지금도 머리와 몸은 조금씩 서로 가까워지고 있으며, 언젠가 다시 하나가 되는 날 용수 보살은 다시 세상에 나타나 중관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칼라차크라 탄트라』에 예언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무상요가탄트라의 세계관에 따르면, 샴발라는 우리의 남섬부주(염부제) 북쪽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곳의 주민들은 인간이지만, 그 나라와 주민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샴발라의 왕 수찬드라는 인도를 찾아와 부처님께서 스리 다냐카타카 대탑에서 설하신 『칼라차크라 탄트라』를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이 가르침을 샴발라로 가져가 일곱 분의 법왕과 스물다섯 분의 칼키왕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세웠습니다. 이 후 칼라차크라의 가르침은 인도와 티베트에도 전해졌지만, 그 중심 전승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샴발라에 이어지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는 스물다섯 칼키왕 가운데 스물한 번째 칼키왕의 시대라고 전해집니다. 훗날 마지막인 스물다섯 번째 칼키왕 루드라차크린이 통치하는 때가 되면, 인도에서는 야만적인 무리들과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루드라차크린왕은 샴발라에서 인도로 나와 그들을 물리치고, 그 승리 이후에는 황금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칼라차크라의 가르침이 널리 번성하게 되고, 바로 그 시기에 용수 보살도 다시 세상에 나타나 중관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목건련은 신통력으로 가장 뛰어난 제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불량배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고 진흙까지 뒤집어쓰는 일을 겪었습니다. 사리불이 물었습니다. “그토록 뛰어난 신통력을 지니고도 왜 그것을 사용해 그들을 막지 않았습니까?” 목건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과거에 지은 업이 너무도 강하게 성숙하여 그 과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통력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고, 하물며 몸을 피할 겨를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과거 어느 생에서 그는 어머니에게 몹시 모진 말을 퍼붓고 깊은 상처를 주는 악한 언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쌓인 부정적인 힘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이러한 과보로 성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까마귀가 와서 쪼아 먹지 않는 한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우듯이, 우리 역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네 가지 대체력을 실천하여 부정적인 힘을 정화하지 않는다면 파괴적인 행동의 결과를 반드시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씨앗이 햇볕에 타거나 손상되지 않은 채 알맞은 조건을 만나면 때가 되었을 때 힘차게 싹을 틔우듯이, 우리 또한 성냄으로 긍정적인 힘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건설적인 행동의 결과는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적절한 떄에 반드시 성숙하게 됩니다.

다만 두 가지 경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파괴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힘과 그것을 반복하게 반드는 습기는 강력한 네 가지 대치력을 실천하면 완전히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힘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의 원인이 되는 선근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한 성냄이라도 선근 자체를 없애지는 못하며, 다만 그 힘을 크게 약화시켜 과보가 늦게 나타나거나 훨씬 미약하게 성숙하도록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인과 법칙 가운데 나머지 두 가지 원리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짓지 않은 업의 결과는 결코 받지 않으며, 한 번 지은 업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결과를 맺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울러 부정적인 힘을 정화하는 방법과 성냄으로 긍정적인 힘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도 함께 익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확고한 결심을 내려야 합니다. 앞으로는 올바른 분별과 지혜에 따라 살아가며, 행위의 인과 법칙에 맞는 것은 실천하고 맞지 않는 것은 단호히 삼가겠다고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개별적인 내용을 분별하여 숙고하기

행위의 인과 법칙이라는 일반 원리를 깊이 숙고하는 목적은 이성적인 검토를 바탕으로 그것이 사실임을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한 번도 비행기를 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비행기의 존재를 믿지 않는 유목민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까지 행위의 인과 법칙을 직접 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믿지 않거나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처음 도시를 방문한 유목민은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이 닫히더니 방 전체가 움직이고, 다시 문이 열리자 전혀 다른 장소에 도착한 것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또 작은 상자 속에서 사람이 나와 뉴스를 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합니다. 처음 라싸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본 유목민들은 그것을 귀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널리 배우고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견문이 넓은 사람은 편견이나 미신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쉽게 놀라지 않습니다. 카담파의 한 게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는 말라. 그러나 생각을 한다면 행위의 인과 법칙에 대해 생각하라.

알 수 있는 모든 현상은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명백한 현상 (mngon-gyur)
  • 숨겨진 현상 (lkog-gyur)
  • 매우 깊이 숨겨진 현상 (shin-tu lkog-gyur). 

명백한 현상이란 항아리나 기둥처럼 감각 기관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접 자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숨겨진 현상이란 연기(緣起)나 공성과 같이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올바른 논리와 추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현상에 힘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매우 깊이 숨겨진 현상, 곧 행위의 인과 법칙과 같은 것은 이러한 논리만으로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뢰에 근거한 추론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다시 말해 믿을 만한 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중생 각각에게 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오직 일체지를 성취한 분만이 그것을 완전히 안다.

부처님은 바로 그러한 신뢰할 만한 가르침의 근원이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성과 같은 심오한 가르침, 그리고 샤마타와 위빠사나와 같은 선정 수행의 방법은 우리가 직접 수행을 통해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실제 경험을 통해 참됨이 확인된다면, 행위의 인과 법칙처럼 매우 깊이 숨겨진 내용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 역싯 옳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부처님께서 일체지의 깨달음을 이루신 유일한 이유는 모든 중생을 사랑과 자비로 이롭게 하고, 그들의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중생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서만은 거짓을 말씀하시거나 사람들을 속이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쫑카파 대사는 『연기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연기라는 이 한 가지 이치로 말미암아, 당신의 말씀은 그 무엇과도 견줄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통해 당신의 다른 모든 가르침 또한 진실하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안전한 방향)하여  그분이 신뢰할 수 있는 가르침의 근원임을 확인하고, 특히 행위의 인과 법칙에 관한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믿음을 갖추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실천하고 무엇을 삼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가장 이롭고 가장 건설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을 실제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단지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올바른 분별에 바탕을 둔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며 괴로움과 문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행복을 얻는 방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 부처는 신뢰할 수 있는 가르침의 근원이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행동을 할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강간과 같은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에는 순간적인 쾌락을 느낄 수도 있고, 반대로 가난한 상황에서도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은 매우 힘들고 괴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파괴적인 행동이 장기적으로 맺는 결과는 반듯시 괴로움과 문제입니다. (아상가의 『아비달마집론』 257-4-5부터 257-5-3까지에서 인용.)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이든, 또 어떤 바람직한 목표를 이루고자 하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모두 윤리적이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찬그라키르키는 『입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범부가 더 높은 삶을 얻는 것, 성문의 깨달음, 독각의 깨달음, 보살의 깨달음, 나아가 해탈과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확실한 선(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성취의 근본 원인은 다름 아닌 계율을 바탕으로 한 윤리적인 자기 절제이다.

이제 우리의 수행은 첫 번째 단계의 동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악도에 태어나는 일을 피하고, 인간이나 천상과 같은 더 나은 삶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행동과 그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분명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충분히 숙고한다면 우리는 올바른 윤리적 판단력을 갖추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바르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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