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법: 법을 듣기

명상의 효과

명상은 삶을 향상시키고 변하게 합니다. 우리 삶은 일상과 경제적 상황, 그리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또 개개인의 성격과 기분에 따라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직업, 돈, 친구 같은 외부 조건이 바뀌어도 삶의 태도나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여전히 외롭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불안합니다. 외부 환경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내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마음을 훈련하는 데에는 명상이 도움이 됩니다. 명상은 단순히 지성을 향상시기고, 집중력을 강화하고,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훈련도 필요하겠지만 내면의 근본적인 불안감과 삶에 대한 혼란스러움을 해소하고 감정을 보다 깊이 살펴보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불교적 관점에서의 명상

명상은 불교 이외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명상’은 반복을 통해 습관을 들이고, 이를 바탕으로 선한 마음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운동 훈련이나 악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몸을 단련하는 훈련과 달리 명상은 마음을 선한 상태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작하는 것 같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 일부가 됩니다.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다소 부자연스럽더라도 새로운 마음 상태를 개발하려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자신을 바꾸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원래 타고난 모습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굳이 화장실을 갈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라면서, 살면서 많은 훈련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그냥 두는 것이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것이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는 아이에게 울음을 멈추라며 화를 내면서 우격다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글쎄요,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밤중에 우는 아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때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지만 이 행동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명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부와 수행이 별개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불교에서는 공부와 수행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습관 들이기

좋은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먼저 무엇이 좋은 습관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습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명상의 목적입니다. 음식을 씹어서 삼키지 않으면 소화를 시킬 수 없듯이 불법을 듣고 사유하더라도 명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상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음식을 씹고는 삼키지 않고 뱉는 것과 같습니다. 음식이 몸에 도움이 되려면 삼켜서 소화를 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명상은 듣고, 사유하고, 수습하는 세 과정과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힌두교의 우파니샤드와 같은 인도를 대표하는 사상 체계에서도 발견됩니다. 불교 수행법이 인도 전통적인 종교의 수행법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인도 전통적인 종교의 수행법이 불교 수행법이 유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수행의 목적, 실상에 대한 이해, 동기에 있어서는 불교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도록 명상 수행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듣기 

명상의 시작이 왜 ‘듣기’에서 시작되는 걸까요?  부처님께서 살아 계시던 당시 그 어떤 가르침도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불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암기하고 있는 법을 듣는 것입니다. 설명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든 가르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다른 이로부터 가르침을 들어야 할까요? 거기에 어떤 유익함이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선생과 제자가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듣기의 장점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되는 법을 들을 수 있으며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의문이 생기면 바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듣기의 단점은 읽기처럼 이전 페이지를 ‘다시 보기’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집중력이 떨어져 놓친 내용들을 다시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기가 좀 미안하지요. 특히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면 민망하기도 합니다. 또 뒤쪽에 앉으면 잘 안 들릴 때도 있습니다. 졸음이 쏟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단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듣기’에 익숙하기 위해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데 있어 향상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불교를 배우고 실천하려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치는 때 너무 쉽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말을 받아들이기가 좀 어렵습니다. 저에게 교수법을 일러주신 쎌콩 린포체는 통역하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부터 너무 상세하게 설명하지 마세요. 법에 관심이 있어서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법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더 많이 질문을 할 것입니다. 자세하게 배우려고 하는 마음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제자의 입장에서 스승의 설명이 분명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스승의 자질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 스승은 분명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걸까?, 스승 자격이 있기는 한 걸까?’ 

스승이 제자의 인내심과 지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작정하고 상세한 설명을 안 하는 걸까요? 우리는 법을 사유하기 위해서 법을 듣습니다. 따라서 스승이 즉답을 주지 않는 것이 보다 유익합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가르침을 분석하는 능력을 향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석하기 

법을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법이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법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에 대한 다른 이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일년에 한 번 정도라면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저는 무엇이 더 효율적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승이 상주하지 않는 많은 불교 센터에서 우리는 불교 서적을 통해 법을 읽고, 오디오 자료에 의존해 법을 듣습니다. 법을 담고 있는 책들은 소설이나 화장실에서 가볍게 읽는 책들과는 다릅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천천히 핵심을 짚어 가며 정독해야 합니다. 스승이 없는 불교 센터라고 해도 다른 이들과 함께 모여 서적을 읽고 관점을 나눌 수 있습니다. 개중에 다른 이보다 좀 더 이해를 잘 한 사람이 도반들 사고의 폭을 넓혀 주기도 합니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불교 센터가 멀거나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온라인 불교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공부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혼자서 법을 배우다 보면 일상 생활에 전혀 활용을 못하고 지식을 쌓는 것에 그칠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소통이 안 되는, 웃지도 못할 경직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런 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과 법을 심도 있게, 즐겁게 논의하는 그런 공부 모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부 서양인들 가운데 진지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취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함께 모여법을 공부하는 자리에 익숙해지는 것 역시 삶에 법이 스며들게 하는 한 과정입니다. 법을 듣고, 분석하는 근본 목적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군대처럼 규율과 형식에만 얽매인 상태라면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질서가 깨지는 것,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뒤집힌 항아리, 깨진 항아리, 오물이 가득한 항아리 

자, 그럼 다시 청법, ‘법을 듣기’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법을 듣는 이들을 항아리에 비유합니다. 먼저, 뒤집힌 항아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뒤집힌 항아리에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법을 들을 때에는 개방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깨진 항아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깨진 항아리에는 무엇을 담든지 바로 샙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물이 가득한 항아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입견이 많으면 법과 고정관념이 뒤죽박죽이 되어 오물만 쌓입니다. 

불법을 들을 때는 다른 사상 체계와 비교하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물론, 비교해서 깊이생각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장하고, 도교에서는 이렇게 주장한다.” 등등. 하지만 저의 스승인 쎌콩 린포체께서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을 무의미하다.” 기본적인 체계가 잘 갖춰지지 않는 상태에서 여러 가지를 비교하는 것은 혼란만 더할 뿐입니다. 두 체계를 각각 완전히 이해했다면 의미 있는 비교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불교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른 사상과 비교하는 생각은 내려놓고 신중하게 법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선입견이 가득하다면 불법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깨진 항아리가 되지 말라는 것은 배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대개 기록하는 습관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기록한 내용을 다시 읽을 때나 유익한 습관이 됩니다. 기억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중요한 내용들은 적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서양의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시험을 보지 않는 이상 무언가를 기억하고 익히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커닝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공부를 안 하겠지요! 하지만 불교 공부는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수행은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선생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공부의 핵심은 불법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자신을 향상시키고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타인과 경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수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화를 잘 내지만 나는 아니지!” 법의 거울은 바깥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안을 비추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추어야 합니다. 

약의 비유 

법을 듣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병든 환자로, 부처님과 스승을 의사로, 부처님의 말씀을 약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보살을 환자인 우리를 보살피는 간호사로 여길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마음’과 ‘화’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 고질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 고질병을 고칠 수 있는 최고의 의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의사가 처방한 명약을 지시한 대로 복용해야 합니다. 단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복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다 먹으면 안 됩니다. 불교 수행은 항생제를 복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정량의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수행도 정해진 시간에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을 복용하다 며칠 쉬면 약효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불법을 약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법을 들을 때 우리는 불국토에 있으며 스승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 직접 법을 듣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스승을 부처로 여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스승과 법에 존경심을 지니라는 의미입니다. 그저 슬픈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방안을 답답해 하기 보다 열린 마음으로 법을 듣는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 유지하기 

부처님께서는, 금을 고를 때처럼, 법을 철저하게 분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부처님을 신뢰한다는 이유만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무턱대고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분석할 때 우리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단순한 재미를 위해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다는, 어리석은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하고 유익한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생과 내생을 예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서양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전생과 내생을 믿지 않았습니다. 서양인들의 사고에는 환생의 개념이 아주 생소합니다.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내세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천국이나 지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전생에 나의 어머니로 여기라는 가르침이 모든 법에 전제되어 있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데 시간을 걸렸습니다. 

모든 이들이 “전생에 나의 어머니”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이렇게 했습니다. 환생에 대해 아직 이해가 안 되지만 일단 옳은 개념이라고 여기겠다. 이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정말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은 윤회를 토대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여러분이 환생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윤회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환생을 제대로,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옥, 아귀, 축생 등 육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가르침을 거부하면 안 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열린 마음입니다.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환생을 말씀하셨다. 아직 환생이 잘 이해 안 되기는 하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불교를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 받아들여 보자!” 하는 이런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약

불교 경전의 내용들은 법을 공부할 때도 유익하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매우 요긴합니다. 더러운 것이 가득한 항아리나 깨진 항아리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불교 수행은 법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청법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법을 완전하게 이해를 할 때까지 열린 마음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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