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림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조언

람림과 사성제

알렉산더 벌진 박사: 동유럽에서 람림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라마 초파(Bla-ma mchod-pa, 상사 공양, 구루 푸자)의 강화에서 성하께서는 사성제와 중급 수준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리고 이른바 ‘상사(구루)에 대한 헌신’과 가행(加行)에 관한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들은 불화를 장식하거나 제단에 물그릇을 바칠 수 없습니다. 의심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죠. 

공산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사성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사성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는 수준과 고통으로부터 실제로 해탈하는 수준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해탈을 목표로 하는 것은 람림의 초급 수준 동기에 해당합니다. 실제 해탈, 즉 윤회로부터의 해탈 혹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중급/상급 수준의 동기에 해당합니다. 

일시적인 해탈을 목표로 하다

첫 번째 수준에서, 

  1. 우리는 집착과 분노로 인해 업을 축적하고 악업을 쌓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악취로의 환생의 원인이 됩니다. 삼악취[三惡趣, 지옥도(기쁨이 없는 영역), 아귀도(부유하는 악령의 영역), 축생도의 세가지 중 어느 하나에 갇혀 있는 상태]의 고통을 진정한 문제로 논의합니다. 
  2. 그 원인은 언동의 인과(karma, 업)에 관한 무명(무지)에 근거한 파괴적 언동입니다. 이를 고통의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3. 자신이 악취로 환생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준비 단계는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탈을 진정한 정지(滅諦, 멸제)로 설명합니다. 
  4. 이는 십불선업(十不善業, 열 가지 악한 행위)을 자제하는 계(윤리적 자기 단련)에 의해 달성됩니다. 이는 진정한 길(道諦, 도제)로 설명합니다. 이렇게 사성제 모든 부분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즉, 처음에 사성제 전체의 구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람림의 초급 수준 동기에 해당하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악취로의 환생을 첫 번째 범주의 기초로 합니다. 악취의 고통을 설명함으로써 고제에 대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해탈의 예로서 선취로 환생하는 것의 행복과 기쁨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바로 해탈, 즉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말하자면 이것은 일시적인 해탈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원인 – 즉 부정적인 언동 – 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에 대한 해설로 넘어갑니다. 이때 인과의 법칙 중 두 가지가 고고(苦苦, 고통의 괴로움)에 관계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악취에 있어서의 고고에 관해서는 사소한 원인으로부터 큰 결과가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면, 헛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결과가 생겨납니다. 파괴적 언동을 취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업의 영향을 정화하지 않는 한 언젠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성제 정화에 관한 측면, 즉 고고와 그 원인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길의 해설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사성제 모든 부분에 대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람림을 가르칠 때 강조해야 할 점은 사성제와 해탈에 대한 바람입니다. 

여기에 귀의에 대한 해설을 추가합니다. 그 순서가 가장 좋을 것입니다. 사성제의 관점에서 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법을 배우는 조건을 충족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중요성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성제의 틀이 없이는 인간으로서의 귀중한 환생에 대해 생각해도 단지 ‘인체는 중요하다’라는 대수롭지 않은 결론에 이를 뿐입니다. 

사캬파 전통에서 가르치는 람데(lamdre, 도와 그 결과)는 사성제를 염두에 두고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고통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법을 배우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 인간으로서의 환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부처는 무엇보다 먼저 사성제를 설파한 것입니다. 람림의 중급과 상급의 가르침이 실제 해탈에 이르기 위한 이정표로서 사성제 구성에 적합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의 해탈을 목표로 하다

성하께서는 처음부터 중급 수준의 목표를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번뇌나 악견, 마음 해설에 중점을 둔다는 뜻일까요? 

네,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해탈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확신하지 않으면 법은 일절 생겨나지 않습니다. 즉, 번뇌나 악견(진정한 고통과 진정한 원인)은 덧없는 것이며, 마음은 자성(自性, 자신의 본질/본성)으로 청정하며(자성에 의한 진정한 정지), 따라서 번뇌와 악견은 영원히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게다가, 상급 수준에 대해 말하자면 사랑, 자비심, 보리심에 대해 조금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생이나 내세, 윤회로부터의 해탈의 존재를 받아들이든 아니든 이 삶에 있어서 사랑을 가지고 타인과의 조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다음 사무량심(四無量心) – 모든 중생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행복을 얻고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어 행복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이타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습니다. 그리고 자타상환법(자신과 다른 사람을 동등하게 간주하고 교환하는 자세)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이기심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고, 다른 사람을 아끼는 태도는 모든 공덕의 기초입니다. 이 두 가지 점을 깨닫고 사회에 이익이 되도록 자신을 사용해 갑시다. 

람림에서 ‘상사에 대한 헌신’의 위치

상사에 대한 헌신을 언급해야 할까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상사가 없는데요. 

우리가 귀의할 때, 실제로는 진정한 정지와 진정한 길의 법에 귀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 상속에 달마의 보물을 가지려면 마음 상속 속에 그것을 발생시키기 위한 방법과 자신의 예를 통해 법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또한 법을 올바르게 실현하는 길을 걷고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한 친구, 즉 승가도 필요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법을 교시하는 사람이 스승 외에 누구일지 생각해보면 tenpa(bstan-pa),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티베트어 단어 역시 스승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을 교시하는 스승이 없다면 수행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상사에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상사나 전통적인 람림에서 해설되는 사제 관계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고, 별로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간단한 수준으로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르침을 설파하는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에 문헌 속에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논의되는 것입니다. 율장이나 대승 경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다양한 수준에 맞는 영적 스승의 자질을 설명하면 충분합니다. 

지난 번 동유럽을 방문했을 때, 저는 귀중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는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고, 자신의 삶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귀중한 인간의 삶에 대한 가르침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접근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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