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계 제1-3계 해설

우리가 보살계를 수지할 때 두 가지 부류의 행위를 삼가겠다고 서원합니다. 서구 언어권에서는 이 두 부류를 일반적으로 근본 보살계와 부차적 보살계라고 부르지만 원어에서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열 여덟 가지 행위는 범하게 된다면 근본타락을 일으키는 행위들이고, 이러한 행위는 보살계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타락’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러한 행위들이 우리의 수행을 퇴보시키고 선근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근본’이라 하는 이유는 주석서들에 따르면 우리가 뽑아내야 할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서구에서는 간단히 ‘근본 보살계’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열여덟 가지 근본 타락 행위를 피하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46가지 과실행입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결함 있는 행위’이며 일반적으로는 ‘부차적 보살계’라 불립니다. 만약 우리가 근본계 중 하나를 범하게 될 때, 그리고 그 계를 상실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져야 하는 네 가지 요인이 모두 갖춰진 상태에서 그것을 범하게 된다면 그 순간 우리의 마음 연속체에서 보살계를 잃게 됩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보살계를 지니고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 영어로 그리 자연스럽지 않게 들리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러한 네 가지 조건이 우리 마음가짐 안에 모두 갖춰진 상태에서 근본계를 범하게 되면 보살계 전체가 마음 연속체에서 끊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 예외가 되는 두 가지 계율이 있는데 이 두 가지는 네 가지 조건이 전부 충족되지 않아도 범하는 즉시 보살계를 잃게 됩니다. 반면에 위에서 말한 46가지 과실행에 대해서는, 설령 그 네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이를 범했다고 해서 보살계를 상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근본 보살계와 부차적 보살계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한편, 우리가 보살계를 수지할 때는 해탈을 얻을 때까지 모든 생에 걸쳐 서원합니다. 가령 과거생에서 보살계를 수지했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직 수지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봅시다. 만약 이 생에서 보살계를 수지하기 전에 엷여덟 가지 근본 타락 중 하나를, 그 네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상태로 범했다고 해도 이번 생에서 수지하지 않았으므로 보살계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다시 보살계를 수지하는 것은 과거에 했던 서원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근본 보살계, 즉 열여덟 가지 근본 타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 주석서와 해설들이 존재하고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쫑카파 대사의 해석을 따르겠습니다. 참고로, 보살계에도 여러 전통이 있으며 이는 부처님의 서로 다른 경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에서 따르는 보살계는 인도 전통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이며, 중국 전통 및 그 영향을 받은 지역의 보살계는 다른 경전에 기반을 둡니다. 이처럼 계율(승가계) 역시 티베트 전통과 중국 전통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상좌부 불교에서도 보살의 존재를 인정하고 부처가 되기 전에 보살의 길을 걷는다는 가르침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보살의 길을 따르지는 않으며 보살계를 수지하는 형태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물론 상좌부 불교에도 부처님의 전생담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열여덟 가지 근본 보살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열여덟 가지는 우리가 그것들을 범할 때, 만약 그에 해당하는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면 근본적인 타락을 초래하게 되는 열여덟 가지 과실행입니다. 각 항목마다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에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몇 가지 조건들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1) 자신을 찬탄하고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

첫 번째로 삼가야 할 행위는 자신을 칭찬하거나 타인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조건은 이러한 말을 듣는 대상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동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됩니다. 첫째, 그 사람으로부터 물질적인 이득이나 칭찬, 애정, 존중 등을 얻고자 하는 탐욕과 집착이 있고, 둘째, 우리가 비방하는 대상에 대한 질투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칭찬하거나 타인을 비난하는 그 말이 사실이든 거짓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 여부는 계를 범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즉,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존경이나 돈 등 어떤 것을 얻고자 할 때 “나는 최고야. 다른 사람들은 형편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심리학자가 자신의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저는 불교 심리학자라서 오직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다른 심리학자들은 돈만 좇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동기는 자기 자신이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려는 욕심인 것입니다. 또는 “나는 최고의 스승이다. 다른 스승들은 나만 못하다”라고 말하면서 결국 더 많은 제자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이 민주주의 체계, 선거 시스템 자체가 이 자신을 찬탄하고 타인을 업신여기는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와 권력을 얻기 위해 “내가 최고의 후보입니다. 저 후보는 별로이니 저를 뽑아주세요”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선거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저는 별로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일은 잘 모릅니다.”와 같은 매우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티베트인들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겸손한 태도를 갖춘다면 실제로는 아무도 그 사람에게 투표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이라는 것은 티베트인들이 실천하고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합니다.

보살도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계율을 어겼을 때 어떻게 다른 이를 돕는 능력이 훼손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나는 최고야. 다른 사람은 다 형편없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서구 사회에서는 그런 광고나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구 사회의 광고 시스템 자체가 실제로 “이 세제가 최고입니다! 다른 건 다 별로예요. 이걸 사세요!” 와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그들이 바라는 건 우리의 돈 뿐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나 자신을 광고하고 싶은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최고의 보살입니다. 내가 당신을 가장 잘 도울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드릴게요. 저에게 오세요. 다른 사람들은 저만 못합니다.”와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싶으십니까? 설령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만약 그런 마음의 동기가 “내가 더 많은 제자를 얻고 싶어서”라면 그것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동기를 드러내는 것이고, 보살도의 정신과는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마음을 경계하고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가 최고의 길이다. 다른 영적 전통은 다 틀리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동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적절한 동기란 어떤 것일까요?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단순히 순진한 생각은 아닐까요? 과연 불교의 길이 지금 모두에게 최고의 길일까요?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 다른 종교에 대해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종교 중 하나만이 진리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는 나에게는 최선의 길일 수 있으나 당신에게도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각 종교는 자신만의 영적 목적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는 불교의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대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그들과 논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불교의 천국을 바라며 기도하면 불교의 천국에 이르고 기독교적 천국을 바라며 기도하면 기독교의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영적 전통이 그 사람에게 더 적합한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언제나 다른 종교 전통에 대해 깊은 존중을 표하시며, 다만 불교의 목표(해탈과 깨달음)를 이루는 데 있어 불교의 길이 가장 적합하다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것이 첫 번째 근본 보살계였습니다. 욕망과 탐욕, 그리고 질투심을 동기로 하여 자신을 찬탄하고 타인을 비방하는 행위를 피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업을 하는 입장이라면 이를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광고를 해야 할까요? 만약 우리가 다른 제품이 얼마나 나쁜지를 강조하는 부정적 광고를 사용한다면 이는 분명히 이 계율과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자기 제품을 지나치게 칭찬하면서 “우리 것이 최고입니다. 다른 것은 다 형편없어요.”라고 한다면 이것 역시 이 계율에 어긋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신중히 고민 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광고를 할 때의 동기는 무엇인가?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함인가? 아니면 정말 이 제품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하기 때문에 소개하는 것인가? 앞전에 여러분 중 한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결국은 동기에 달려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업가들이 이 보살계와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습니다. “불교 윤리에 기반해서 사업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만약 우리의 유일한 동기가 이익 추구라면 이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한 가지 좋은 예는 미국의 의료 시스템입니다. 최근 수십년 동안 미국의 전체 의료 체계는 수익 중심의 시스템으로 재편되어 왔습니다. 병원은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한 회사들이 운영하며, 최대한 많은 이익을 주주들에게 안겨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결과, 병원은 환자들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려 하며 병원에 입원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합니다. 그저 침대를 차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로 인해 환자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방향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전반적으로 저하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만약 우리가 타인을 돕는 행위의 동기가 이윤 추구에만 있다면 그 도움의 질은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보살도의 길을 따를 때, 특히 다른 수행자나 스승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이 무엇인가를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2) 법이나 재물을 나누지 않는 것 

두 번째 보살계의 근본 타락 항목, 우리가 피하겠다고 서원하는 부정적인 행위는 법을 나누지 않거나 재산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동기는 집착과 인색함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신이 정리한 법문 노트나 컴퓨터 파일 등에 매우 집착하여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으려 하고 그에 대해 온갖 핑계를 댈 수도 있습니다. “네가 이 책에 커피를 쏟을 수 있으니 책을 빌려줄 수 없어”라는 마음가짐입니다. 혹은 돈에 집착하여 타인과 돈을 나누지 않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이 법회에 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사실상 법문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사람이 법을 들을 경제적 기회를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시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타인을 돕기 위한 시간을 나누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말이 되면 “내 휴식 시간에는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꽤 흔한 경우입니다. 저에게 하나의 웹사이트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운영 과정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말은 내 신성한 시간이니 아무 일도 시키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태도는 보살의 수행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도움이 정말 필요할 때 - 물론 상습적으로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경우에 - 우리는 그 사람이 밤이든 낮이든, 주말이든 평일이든 상관없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침대에서 떨어졌을 때, “지금은 내가 자야 하니 아침에 일어나서 안아줄게”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도울 때 불평하며 돕는 태도 역시 피해야 합니다. 보살의 입장에서 보면 누군가가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배우고 싶어 하거나, 우리의 법문 노트를 공유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이 진지한 태도를 가지고 그 가르침이 적절한 경우, 기꺼이 나누는 것이 옳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동기를 가지고 요청하기도 합니다.

제가 예전에 세르콩 린포체의 통역을 할 때(그때는 히피들이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중 아주 취한 사람이 와서 “나로빠의 육요(六瑜伽)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린포체께서는 이 사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아주 훌륭한 발심이네요. 하지만 그것을 배우려면 먼저 이런 저런 것들을 공부하고 수행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법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적절한 안내를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을 나누지 않는 타락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했던 원칙을 기억하십시오. 수행 단계가 낮은 보살은 자신의 수준을 넘는 수행을 억지로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줄 능력이 없다면, 없는 능력을 있는 것처럼 가장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렇게 해드리고 싶지만 솔직히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물론 티베트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다면 보통 겸손이라고 받아들이고 계속 부탁하겠지만 정말로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이탈리아의 라마 쫑카파 불교연구소에서는 대학원 과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재가자와 출가자 모두를 위한 6년짜리 심화 과정입니다. 한 겔룩파의 게셰가 처음 주제를 가르쳤는데 그 다음 과목인 중관철학을 가르칠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이 과목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겸손하신 거죠?”라며 계속 부탁했으나, 그는 “정말 아닙니다. 저는 이 과목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변 스승들과 동문들에게 확인해 보니 실제로 그 과목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보다 자격 있는 게셰가 오면 자신은 조력자로 남겠다고 했고, 결국 더 적합한 게셰가 와서 그 강의를 맡았으며 그는 보조로 남았습니다. 이 첫 번째 게셰는 법을 나누지 않음으로써 보살계를 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갖추지 못한 자질을 속이지 않음으로써 보살의 서원을 지킨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법을 설명해달라고 하거나, 노트를 공유해달라고 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제 노트를 빌려 드릴게요. 하지만 그리 잘 정리된 건 아닙니다.” 혹은 “제 이해가 부족해서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면, “죄송합니다. 저도 잘 모르기 때문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체력이나 정신력이 너무 고갈되었을 때는 분별력을 써서 상황을 판단해야 합니다. “지금 너무 지쳐서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좀 쉬어야 다시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도움을 청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천수관음처럼 몸을 수천 개로 나눌 수 있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동시에 모두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는 안타깝지만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 지침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장 잘할 수 있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일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들을 추천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가장 고유하게 기여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들자면, 누군가 와서 “티베트어를 배우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초급 티베트어는 다른 분들이 더 잘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티베트어 말고도 다른, 더 소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분야를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제가 아는 좋은 선생님을 추천하고 저는 제 역할에 더욱 집중합니다. 

또 다른 기준 하나는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 기준 중 하나는 그 사람과 내가 매우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사람이 나에게 매우 잘 마음을 열고 있을 때입니다. 아주 좋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두 분의 스승이 계셨습니다. 그 중 한 분은 링 린포체의 환생이고, 다른 한 분은 세르콩 린포체인데 이분은 제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공식적인 직함으로는 ‘보조 교사’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래의 직책은 변론 상대 스승(대논의 스승)이었습니다. 세부 사항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지만, 어쨌든 두 분 모두 달라이 라마의 스승이셨습니다. 이 두 분은 나이 차이도 거의 없어서 환생하신 뒤에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셨습니다. 아마 세네살 무렵이었을 텐데, 달라이 라마께서 두 분에게 티베트 문자를 처음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이후에 계속해서 글자를 가르쳐주신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그들과의 인연이 매우 특별하고 깊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환생하신 뒤에도, 그 특별한 인연으로 인해 처음으로 글자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저의 친구 중 한 명인 앨런 터너도 세르콩 린포체와 매우 가까운 인연을 맺었습니다. 앨런은 티베트어를 실제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세르콩 린포체께서 그에게 티베트어의 씨앗을 심기 위해 아주 기초적인 첫 수업을 해주셨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수업을 해주신 적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티베트어를 가르쳐주신 적은 거의 없고, 그렇게 하신 경우는 정말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들, 그것도 자신의 스승이 환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은 특별한가? 내가 이 사람을 도왔을 때 그 사람이 앞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을까? 이 사람과 인연이 깊은가? 또 정말 내 말에 잘 귀울이고 마음을 여는가?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는, 나는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많지 않은가? 또 다른 요청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대안이나 조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짜증을 내면서 “저 좀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귀찮게 하지 마세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보살의 태도와는 정반대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가 링구 툴쿠 린포체께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링쿠 툴쿠 린포체는 카규파의 아주 훌륭한 스승이십니다. 그 분이 해주신 말씀이 아주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아직 윤회하는 중생이고 부처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할 때 또 하나 고려할 수 있는 요소는 바로 “내가 즐기는 일인가?”라는 것입니다. 즉, 약간의 이기적인 동기는 사실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더 힘을 내고 열정적으로 봉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주된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서 어떻게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보살계를 수지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나는 이 계율을 지킬 수 있는가?” 혹은 “정말로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로 욕망이나 탐욕, 질투심 때문에 자신을 과도하게 칭찬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집착이나 인색함 때문에 법이나 재물, 물건, 시간 등을 남과 나누지 않는 행동도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게으름, 분노 등으로 “난 네가 싫어. 너와는 아무것도 나누고 싶지 않아.”라는 태도로 법이나 자원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근본계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부차적 보살계를 어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겨납니다. 왜 어떤 것은 근본계이고 어떤 것은 부차계일까요? 그 이유는 보살의 핵심 정신이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착이나 인색함으로 인해 “나는 이걸 가지고 있고, 나만 가질거야. 남과는 나누지 않을거야.”라는 태도는 보살도의 본질적 목표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근본계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 “도와주고 싶지만 너무 게을러서 하지 않을래.”와 같은 태도는 본질이 아예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이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보살의 핵심 의도를 완전히 거스른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어서 부차적 계율로 분류됩니다.

(3) 다른 이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폭행을 가하는 것

세 번째 보살계 과실행에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남이 사과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타인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 계율에는 두 가지 상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타인을 때리는 것인데, 이 둘의 공통된 동기는 주로 분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혼내며 소리를 지르거나 때릴 때, 아이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하거나 배우자가 “그만해요 제발!”이라고 간청하는데도 멈추지 않는 경우가 해당됩니다. 다른 하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치거나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나중에 - 즉 그 상황이 지나간 후에 - 그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했을 때, 우리가 여전히 화가 나 있어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한을 품고 있는 것도 부차적 보살계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렇게 두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실제로 화를 내거나 때리는 순간에 상대방이 “제발 그만 소리지르세요”라고 말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거나 화를 내며 아주 심하게 대하고 있을 때, 상대방이 “미안해요. 그만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자리에서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다”는 개념은 사실 조금 이상합니다. 이는 그리 적절하지 않고 사실 “용서”에 해당하는 티베트어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분노를 멈추고 상대를 때리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다”는 표현은 마치 우리가 상대방을 그들의 업의 과보로부터 분리시켜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그것은 불교적이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화를 멈추고, 상대방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는 행위를 그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거나, 그들을 때리거나, 분노로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그만하세요. 죄송해요”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행동을 멈추고 사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차적 보살계의 경우는 그 이후의 일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화가 나 있거나 원한을 품고 있을 때, 상대방이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그 때,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분노나 원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계율을 범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차이는 우리가 실제로 강한 분노로 인해 어떤 파괴적인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경우 -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때리거나, 그 사람에게 해가 되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경우 -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행위는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상태, 즉 원한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타인을 돕고자 한다면 설령 잠시 화가 나더라도 그 분노와 원한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계율의 또 다른 측면은 타인을 때리는 행위를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분노에서 비롯된 폭행입니다. 물론,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오히려 유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행위가 분노에 기반하지 않았다면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물소를 몰기 위해 물소의 등을 손바닥으로 툭툭 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자”고 말해도 물소는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소를 분노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소는 인도와 네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동물로 소보다 크고, 검으며, 뿔이 있고, 진한 우유를 생산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소를 소유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어떤 사람들은 물소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나 낙타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으로, 아주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도로로 뛰어들려고 할 때, 그 아이가 다치거나 차에 치일 위험이 있다면 우리는 아주 강한 방식으로 아이를 붙잡거나, 도로로 뛰어들지 않도록 쳐야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분노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양한 행위의 결과는 그 행위의 동기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여기서의 동기는 분노 혹은 악의입니다. 즉,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제발 그만하세요. 멈춰주세요”라고 말했는데도 우리가 이를 거절한다면, 이 보살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보살계의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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