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에 대한 질문들

우리는 지금 보살계를 받기 전에 필요한 근본적인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우리는 람림(단계적 수행의 길)의 기초와 보리심을 일으키는 과정과 명상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보리심 자체가 어떻게 다양한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지도 설명했는데, 그것은 원보리심으로 단순히 염원을 품는 상태와 서원을 하는 상태의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원보리심의 단계에서는 이번 생이나 미래 생에서 보리심이 퇴전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섯 가지 훈련이 수반되며, 이와 함께 재가자이든 출가자(비구, 비구니)이든 어느 정도의 별해탈계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이 모든 토대 위에서, 우리가 실제로 행보리심을 발휘할 때 바로 그 시점에서 보살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서원’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 대해 질문이 있으십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처음 별해탈계를 받을 구체적으로 어떤 계율을 받는지 스승에게 반드시 말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서원은 스승 앞에서 받는 것이 아닙니까?

네, 우리는 이 서원을 받드시 스승 앞에서 받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단체로 서원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받는지를 개별적으로 말할 기회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스승과 1:1로 서원을 받는 경우에도, 의식의 일부로서 자신의 몇 가지 계율을 받는지 말하는 절차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스승에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의무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수행이 처음에는 다섯 가지 계율 중 세 가지나 네 가지만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고, 나중에 나머지 계율들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다시 서원식을 통해 추가로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다섯 가지 모두를 받았더라도 실제로 그 중 하나를 잘 지키지 못한다고 느낄 경우, 다음에 다시 서원 받을 때는 그 계율 하나를 제외하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더 많은 계율을 지킬수록 우리의 계율은 더 강해집니다. 쫑카파 대사도 말씀하시기를 만일 우리가 구족계를 받은 완전한 출가 수행자(비구, 비구니)의 계율을 지닌다면 이것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기반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요 책임은 영적 수행뿐이고(물론 사찰 내에서의 책임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세속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별해탈계를 적게 가진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더 쉽고 수월한 길이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더 많은 존재들을 이롭게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수행을 쉽게 하기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이지, 스승을 기쁘게 하거나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원을 세울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중요한 이점 중 하나는 결정 장애(의심, 염경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마시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내가 마음속으로 ‘이제 술을 마시지 않겠다’, 혹은 ‘끊는 것을 노력해보겠다’고 결심했다고 해도, 술을 권유받을 때마다 여전히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마실까, 말까?”하는 고민이 반복되면서 마음은 계속 흔들립니다. 이런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번뇌입니다. 하지만 계율이나 서원을 세웠다면, 이미 그 행동에 대한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난 것입니다. 더 이상 매번 갈등하거나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서도 서원은 우리를 망설임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별해탈계의 실천은 매우 유익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해탈은 윤회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만, 더 단순한 수준에서도, 적어도 특정한 행위에 대한 내면의 갈등에서 해방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1년에 15 정도만 금강승 스승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탄트라 수행이 효과가 있을까요? 스승과의 긴밀한 연결 없이 책만 읽고 수행을 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래도 충분히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실제로 영적인 스승이나 금강승 구루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금강승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능을 부여하고, 서원이나 계율을 수여하며, 무엇보다도 영감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은 사실상 모든 참된 스승들이 수행자에게 주는 가장 근본적인 역할입니다. 금강승 스승은 또한 다양한 교법에 대한 구전 전승과 설명을 전해주기도 합닌다. 하지만 일상적인 수행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상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탄트라에 관한 책들도 매우 많이 나와 있으며, 이런 경향은 과거의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티베트인 누구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탄트라 수행에 대한 설명이 담긴 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종종 농담처럼 말씀하십니다. 기록하거나 인쇄하지 말아야 할 교법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들은 그 첫 페이지에 “이 가르침은 인쇄하거나 필기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지만 정작 그것들은 인쇄되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밀로 지켜져야 할 탄트라 가르침을 공개한 것은 서양인들만이 아니라 티베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이미 정보가 퍼져 있다면 잘못된 정보 보다는 차라리 정확한 정보를 갖는 것이 더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는 또 다른 위험도 따릅니다. 우리가 단지 책을 사거나 인터넷에서 다운 받는 것만으로 수행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 곧 “스승 없는 자력 수행식 탄트라”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행 중 잘못을 저질러도 그것을 지적해 주거나 바르게 안내해 줄 사람이 없고, 수행 중 의문이나 문제가 생겨도 물어 볼 대상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살아 있는 스승의 본보기로부터 받는 ‘영감’이 결여되기 때문입니다. 스승의 모범에서 오는 영감의 중요성은 모든 수행서에서 일관되게 강조되는 핵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수행의 생명력과 방향을 불어넣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물론, 수행 중에 우리가 어려움을 겪고 실수를 하고 있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스승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할 기회가 거의 없으며, 스승 또한 우리 수행 상태를 직접 살펴보고 질문을 던질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서구의 상황에서는 스승과 제자간에 그렇게 밀접하고 지속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의 스승은 한 장소에서 와서 수백명에게 점수를 주고 곧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지역에는 실제로 수행을 지도해 줄 자격이 있는 분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과거 티베트에서는 진지한 수행자들 대부분이 사원 내에서 생활했으며 그렇지 않은 재가자라고 해도 사원과 가까운 곳에 거주했습니다. 언제든지 질문하고 도움을 받을 만한 지식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항상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그런 환경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더 위험한 점은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것처럼 행세하며 그릇된 조언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수행에 진심인가? 나는 이 수행에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투자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수행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가?

대부분 서구 수행자들에게 안타까운 현실은 그들에게 법 수행이 삶에서 최우선순위가 아닌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티베트 스승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수행자들을 진지한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수행이 그저 여가 시간에 취미처럼 하는 활동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간절하게 수행을 원하고, 이 수행이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제자가 스승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과거의 티베트 수행자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험난한 길을 걸어 인도로 향했던 일들을 떠올려보십시오. 밀라레빠가 마르빠에게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기울였던 지극한 정성과 인내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라고 해서 더 쉽게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리라고 기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승에게 내가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한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령 우리가 달라이 라마 성하로부터 권능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곧 개인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달라이 라마께서 연세가 많으신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보다 지위는 낮지만 자격을 갖춘 스승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분들로부터 수행의 실질적인 지도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침과 지침을 책에서 얻고 있다면, 그것을 영적인 스승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불교 수행에서 스승이 항상 손을 잡아주고 작은 하나하나의 단계까지 다 이끌어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승은 가르침을 주고, 그 다음은 우리가 스스로 그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게 만드는 것도, 감시하는 것도 스승의 역할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성취든지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미계같은 별해탈계를 받을 스승은 단지 우리가 서원을 하는 앞에서 증인 역할만 한다고 말합니다. , 서원을 하게 하는 진정한 힘은 우리 자신의 결심이며, 스승은 그저 증인의 역할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스승이 없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스승이 있다면 계율을 어길 경우 자신과 스승 모두를 속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은 우리에게 무언가를주는존재가 아니라는 관점을 강조합니다. 이런 견해는 옳은 것일까요?

여기서부터는 좀 더 기술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별해탈계의 경우 우리는 사실상 부처님과 법, 승가를 앞에 두고 계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약을 하는 대상은 바로 이 삼보이며, 스승은 이 과정을 매개하는 존재입니다. 스승은 또한 끊기지 않는 전승의 대표자로서 중요합니다. 이 전승이 끊기지 않고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전승이 순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계보에 속한 모든 인물이 계율을 완벽히 지켜왔는지를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승이 끊기지 않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 조건입니다. 이는 티베트 전통에서 비구니계(승가 계율 중 여성의 완전 출가 계율)을 복원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전승이 많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계율의 성립에는 끊기지 않은 전승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탄트라 계율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에서는 구루가 본질적으로 탄트라의 본존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계율을 받는다는 것은 그 본존 앞에서 서원하는 것과 같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는 ‘계율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입니다. 계율은 스승이 갖고 있는 어떤 ‘사물’처럼 “여기 내가 가지고 있던 이 축구공(계율)을 너에게 줄게”하듯이 전달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치 계율이 실제하고 스승이 그것을 넘겨주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 보관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계율은 그런 실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율은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해서 우리 마음의 연속체 위에 생겨나는 의존적인 현상(의존생기, 依緣生起)입니다. 이 점이 다음에 이야기하고자 했던 ‘서원’의 핵심입니다.

서원이란 무엇일까요? 서원은 어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 자체의 힘으로오직 스승쪽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우리 쪽으로 ‘이동’해 오는 식의 존재 방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식의 존재 방식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잘못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스승이 “나는 이 서원을 깨끗하고 순수하게 지켜왔고 이제 너에게 그것을 넘긴다. 그러니 너도 이를 순수하게 지켜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계율 존재 방식이며 부정해야 할 견해입니다. 계율은 의존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이며, 그것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과 원인이 결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서원은 무엇에 의존하여 생겨날까요? 바로 끊기지 않는 전승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승의 대표자가 있어야만, 그의 임재 하에 그 서원이 우리의 마음의 연속체위에 성립하게 됩니다. 

보살계의 경우에는 별해탈계나 탄트라 계율과는 다릅니다. 보살계를 수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승이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 없이 부처님과 보살들을 관상하면서 수계하는 방식입니다. 즉, 보살계의 경우에는 반드시 스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별해탈계와 금강승계에서는 계맥과 그 끊어지지 않는 전승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전승의 대표자로서 스승이 반드시 의식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살계의 경우, 순수한 보살계를 지닌 존재(스승 혹은 부처님, 보살)의 존재가 필요할 뿐, 반드시 육신의 스승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보살계는 언제든지 갱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매일 관상과 간단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 보살계를 갱신할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부처님과 보살들 앞에서 보살계를 받는 것이며, 그 분들은 끊어지지 않은 순수한 보살계를 지닌 분들이기에 가능합니다. 왜 보살계를 스승 없이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저도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들어본 적도 없고 문헌상으로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됐든 일반적인 원리로 말하자면, 어떤 계든 끊어지지 않은 계맥을 가진 존재가 하나의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계율이 성립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끊어지지 않는 계맥을 지닌 존재입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의 스승일 수도, 부처님과 보살들일 수도 있습니다. 별해탈계의 경우에는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의 출리심, 즉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보살계의 경우에는 보리심의 발전, 특히 행보리심이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금강승의 경우에는 출리심과 보리심 뿐 아니라 공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예비 수행 등 여러 가지 선행 조건들이 추가로 요구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계율이 자신의 마음의 연속체 위에 형성되도록 하려는 분명한 의도와 최선을 다해 그것을 지켜나가겠다는 결심을 지녀야 합니다. 비구계나 비구니계 같은 출가계의 경우에는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구성 등 좀 더 복잡한 조건들이 필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그것이 아니므로 생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계율이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경량부, 유식학파, 그리고 중관학파 중에서 응성중관(應成中觀)을 제외한 모든 학파의 입장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계율이란 특정 해로운 행동을 자제하려는 마음작용입니다. 즉, 일정한 의식을 통해 그런 행위를 삼가겠다는 식으로 서약함으로써 형성된 윤리적 자기 절제의 강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와 특히 겔룩파의 응성중관 해석에 따르면 계율은 단순한 마음작용이 아닙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계율은 비표현색(非表現色)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의 연속체 위에 존재하는 매우 미세한 형식으로, 앞서 말한 ‘자제하려는 마음작용’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즉, 우리의 행동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비표현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매우, 매우 미세한 색법입니다.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비표현색’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행위가 어떤 동기로 수행되었는지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행위의 일종인 ‘색’, 즉 형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위에는 두 가지 형태의 색이 있습니다. 하나는 표현색(表現色)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를 때리고 얼굴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면 그 행위의 모양이나 표현은 분노라는 동기를 드러냅니다. 또는 내가 화를 내며 소리친다면 그 소리 역시 분노를 드러내는 표현이 됩니다. 이처럼 행위의 외형이 동기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표현색입니다. 반대로 비표현색은 마치 아주 미세한 진동과 같은 것으로 그것만으로는 행위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불교의 업에 대해 설일체유부나 겔룩파 응성중관의 관점에서는 신업과 어업이란 이 표현색과 비표현색에 포함된 에너지 충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업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수반된 에너지의 충동적 측면입니다. 표현색은 행위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용하는 에너지입니다. 비표현색은 행위가 시작될 때부터 생겨나며 행위가 끝난 뒤에도 계속하여 마음의 연속체위에 남아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행위를 반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이 비표현색은 지속해서 유지됩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으로 “나는 다시는 이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면, 이 비표현색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비표현색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경전이나 주석에서 명확히 언급된 바는 없지만, 제 개인적 분석에 따르면 이 비표현색은 후속적인 유사행위를 낳는 원인이 됩니다. 즉, 이전과 유사한 행위를 반복하게 만드는 업의 잔존물 중 하나로 성숙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마음먹으면 비표현색이 사라지고, 결과적으로 그 행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서원은 이러한 비표현색의 더 강한 형태인데, 단순히 ‘집 청소’와 같은 어떤 행위를 반복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강한 서원 의식을 통해 “나는 반드시 이런 행동을 반복하겠다”고 의식적으로 맹세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서원은 보통 부정적 혹은 해로운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바탕으로 성립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어떤 것을 '하는 것’이거나, ‘하지 않는 것’의 신체적, 언어적 실천 모두 포함됩니다.) 이러한 서원은 우리가 동일한 유형의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인과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더 이상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순간, 우리는 그 서원을 잃게 됩니다. 즉, 더 이상 그 서원이 우리의 마음의 연속체 위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정오 이후에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서원은 정오 이후에 식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강한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앞으로 난 이 규율을 따르지 않고 저녁에도 항상 먹겠다.”라고 결심한다면, 그 때부터는 더 이상 그 서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서원은 매우 미묘한 형태도 마음의 연속체에 계속 존재합니다. 가장 비슷한 비유는 매우 섬세한 진동처럼 계속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 비유가 ‘뉴에이지’적 느낌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것이 스승이나 부처 또는 보살의 마음 연속체로부터 ‘축구공’처럼 건네받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티베트어로는 서원을 우리 마음 연속체에 ‘받는다’고 표현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뭔가를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얻는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여러 조건과 인연이 갖추어져서 마음 연속체 위에 서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해서 그 서원을 가능한 한 강하게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서원을 깨뜨린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원의 내용에 따른 행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서원의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서원을 어긴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우리는 서원의 경계를 넘은 것이고 어긴 정도에 따라 서원의 힘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서원이 약해지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하는 힘도 줄어듭니다.

예를 들어, “오후 이후에는 먹지 않겠다”는 서원을 아주 엄격히 지키다가 어느 날은 먹고, 또 다른 날에도 먹었다면 이제 그 서원은 힘이 약해집니다. “나는 가끔은 지키지 않고 있구나”라고 스스로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원이 약해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이것은 비슷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하는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음 연속체에서 서원이 사라지려면 여러 조건이 결합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조금 더 명확해졌나요? 서원이란 조금은 복잡하고 미묘한 개념이지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원은 우리 마음 연속체에 생성되어 미래 행동을 형성하는 미묘한 형식이며 매우 강력한 약속에 기반합니다. 

아비담마에서는 서원에 대해 논의하며, 번역하기 굉장히 어려운 개념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반서원같은 것은 정말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간의 종류도 있습니다. 서원은 부처님,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공식적으로 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계율서원, 보살서원, 금강승서원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원은 기독교의 결혼 서약 같은 것이 아니며 그런 것은 ‘중간 범주’에 속합니다. 반서원은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이는 파괴적 행위를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 입대하여 적을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불교 서원에서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 사이에 있는 중간적인 것은 약속인데 보통 앞의 두 가지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강한 약속입니다. 

성적 윤리에 관한 서원의 예를 들면, 부적절한 성행위를 삼가는 서원은 매우 길고 구체적인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목록에서 일부, 예를 들어 강간만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합시다. 물론 그 행동을 절대로 할 일은 없겠지만, 다른 항목들 중 일부는 아직 지키기 어렵다고 느껴 서원의 일부만 받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원이라는 것은 부분적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서원은 전체를 받거나 아니면 받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도 서원을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중간적인 범주의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즉, 전체 서원은 아니지만 그 안의 일부 항목을 강력히 삼가겠다고 강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완전한 서원을 받는 것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단순히 어떤 행동을 가끔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긍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강간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약속하는 것은, 단순히 강간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업을 쌓는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피하겠다”는 완전한 불교 서원에서 강간을 포함한 부분적 서원을 받은 것과는 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이해한 것이 맞을까요? 제가 어떤 서원이 잘못되었거나 어리석다고 생각해서 이상 지키지 않기로 하면 서원은 사라질까요?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조건 때문에 지키지 못하지만 다음에는 지키려고 한다면 그때는 서원이 약해지는 것이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다루어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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