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이 퇴전하거나 상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행들

우리는 지금 보리심과 보살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리심을 개발해 가는 일반적인 과정 속에서 보살계를 수지하는 것이 어떤 자리에 놓이는지, 또 보리심을 개발하는 단계들 속에서 그것이 어떤 단계에 속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 보살계의 역할과 그것을 언제 수지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보리심의 초기 단계조차 충분히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소 이른 시기에 보살계를 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보리심에 대한 이해가 제한적이고 모든 존재들을 진심으로 평등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직 부족하더라도 보살계의 지침을 따르려는 노력 자체는 매우 유익합니다. 그리고 일단 보살계를 수지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보리심의 발심과 개발을 더욱 더 향상시키는 노력을 해 나아야 합니다. 보리심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실제로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처음부터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상으로 삼으며, 동시에 자신의 깨달음 - 즉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신의 성불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매우 광대한 경지이기에 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보살계를 받는가, 그리고 어떻게 받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보통 보살계는 보살계 수계협회라는 별도의 의식에서 받거나, 또는 탄트라 의식인 성취식의 일부로 받게 됩니다. 성취식의 상세한 종류에 대해서는 여기서 깊이 다루지 않겠지만,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금강승 성취식에는 보살계 수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닝마파의 최고급 탄트라인 마하요가부터, 겔룩파, 사캬파, 카규파 등 신학교 전통에서 행하는 무상요가탄트라의 성취식에서는 보살계와 금강승계가 함께 포함됩니다. 크리야 또는 차랴 탄트라에는 보살계만 있으며, 요가 탄트라에서는 보살계와 금강승계가 모두 포함됩니다 . 또한 신학교의 무상요가탄트라나 닝마파의 마하요가, 아니요가, 아티요가(즉, 총칭하여 족첸) 성취식에도 보살계와 금강승계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스승 사캬 판디타께서는 아주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계를 받지 않으면 진정한 수계는 있을 수 없다.” 즉, 계율을 수지하는 과정은 반드시 ‘의식적인 인식과 수용’을 동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그 계율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수계식 중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진행되는 언어조차 이해하지 못하며, 끝나고 나서야 누군가가 “당신은 보살계와 금강승계를 수계했어요”라고 알려준다면 그것은 계율을 수지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수계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당신이 실제로 한 것은 단지 그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가피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감화 혹은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보살계와 금강승계를 의식적으로 수지하지 않고, 또한 관정식에 의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성취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식으로 무지하게 성취식에 갔다면, 이 참석은 티베트인들이 종종 수계식에 데려오는 반려견이 앉아 있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개가 수계식에 앉아 있더라도 계를 받는 것은 아니죠. 수계는 ‘내가 지금 어떤 서원을 받고, 그 의미를 분명히 알고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그 수계식에서 받은 만트라나 관상, 사다나 등의 수행을 해보려 한다면 미래의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된 의식을 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의도를 가진 상태라면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라고 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계를 수지하려면 반드시 그에 앞서 일정 수준의 별해탈계를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 이는 보살계를 위한 기초이며 수행의 토대가 됩니다. 이 별해탈계는 재가 오계

(五戒), 사미계(沙彌戒), 비구계(比丘戒), 비구니계(比丘尼戒) 등일 수 있으며, 니사야 비구니계와 같은 임시계도 해당됩니다. 재가자 오계는 다섯 가지 항목이 있으며 그 중 일부만 수지할 수도 있습니다. 즉, 다섯 가지 전부를 수지할 수도 있고, 네 가지, 세 가지, 두 가지, 한 가지만 수지해도 무방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내면적 결단에 달린 것이며 타인이나 스승에게 반드시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알려도 상관은 없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을 해치지 않기(불살생, 不殺生), 주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기(불투도, 不偸盗), 거짓을 말하지 않기(불망어, 不妄語),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하지 않기(불사음, 不邪婬) - 여기서 “부적절한”이라는 표현은 번역하기가 다소 어려운 부분이지만 우선은 그렇게 번역해 두겠습니다. 술과 오락성 약물을 삼가기(불음주, 不飮酒) - 단, 말기 암환자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모르핀 등의 약물이나 두통을 위한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의학적 사용은 예외입니다. 

이 오계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쫑카파 대사께서는『경전과 금강승에 대한 실천적 권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불교의 어떤 수행 체계에 들어서든, 상좌부 수행이든, 대승 경전 수행이든, 금강승 수행이든, 반드시 그 수행에 맞는 계율과 윤리적 기반을 먼저 확립해야 한다.” 즉, 상좌부에서는 별혜탈계를, 대승에서는 보살계를, 금강승에서는 금강승계를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특히 비밀진언승(密續乘, 금강승)에 들어설 때, 보리심은 대승 모든 수행의 정수이므로 반드시 보살계를 통해 보리심을 굳건히 해야 한다.” 

즉, 금강승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보살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쫑카파 대사께서는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쫑카파 대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율장의 계율에 따라 이미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또는 재가자의 수준 중 하나로 구족계를 수지한 상태에서는 보살계를 받아 성취되는 깨달음이 단지 보살계만을 수지했을 때 얻는 성취보다 훨씬 뛰어나다.” 즉, 출가 계율을 기반으로 하여 보살계를 수지할 경우 보다 견고하고, 정당하며, 높은 수준의 수행 성취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쫑카파 대사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처님께서 여러 경전에서 모든 면에서 동등한 두 명의 보살이 있다 하더라도 한 명은 별해탈계가 없는 재가자이고, 다른 한 명은 재가자이거나 출가자이든 그 계율을 수지한 자라면 후자의 보살이 더 찬탄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계율 설명에서 이 모든 점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좋습니다. 우리는 보살계를 받기 전에 반드시 어떤 수준에서든 별해탈계를 수지해야 하며 또한 어느 정도 보리심도 개발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살계는 행보리심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수지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는 이미 발심의 상태를 성취해야 하며 이는 두 단계로 나뉩니다: 원보리심 -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길 바라는 단계, 서원보리심 -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 이 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단계. 이 서원보리심은 별도의 수계식을 통해 형성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는 보살계를 수지하기에 앞서 먼저 이러한 발심을 개발하는 수계식을 거행하십니다. 그 수계식에서는 염원보리심과 서원보리심을 모두 포함하여 발전시키며 이후에야 보살계 수지를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이 서원보리심을 발전시킬 때 우리는 다섯 가지 보살 훈련을 따르겠다는 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훈련은 현생에서 보리심의 결심이 퇴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네 가지 훈련과 미래생에서도 보리심의 결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훈련을 의미합니다. 이 마지막 훈련은 네 가지 행위를 피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네 가지를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살계를 수지하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일종의 훈련(일종의 계율 체계)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별해탈계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이 서원들과 훈련들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훈련들은 무엇일까요?

우선, 현생에서 보리심의 결심이 약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네 가지 훈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보리심의 목표, 즉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이 마음이 항상 강하고 분명하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약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보리심을 어떻게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첫 번째 방법은 보리심을 개발함으로써 얻는 이익과 장점들을 매일 상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보리심의 이점들에 대한 긴 목록을 샨티데바의『입보살행론』제 1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읽는 것은 분명 매우 유익하며 날마다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비록 경전을 매일의 수행 시간에 반드시 낭독하지 않더라도, 그 핵심 포인트들을 마음에 떠올리고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보리심의 목표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한다. 나는 그것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 깨달음을 통해 모든 존재들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러한 넓은 관점을 가지고 수행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에게도 이로움을 주고, 동시에 모든 존재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는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샨티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단 한 번, 몇 명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약간의 음식을 나누어 준 것만으로도 칭찬받는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지속될 행복을 가져다주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는 얼마나 더 큰 찬탄을 받아야 하겠는가?”

우리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면 실망하거나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침은 단순히 하루의 끝에서 느끼는 종류의 피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우리는 이런 힘을 얻게 됩니다. “나는 모든 존재들을 돕기 위해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해야만 해.” 이러한 태도는 늘 엄청난 에너지와 원력을 불러일으켜 우리가 타인을 돕기 위한 길 위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파괴적인 행위를 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고의 보호막이자 해독제입니다. “내가 정말로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해로운 방식으로 행동하여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는가?” 이렇듯 수많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이 점들을 의식적으로 상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니, 단순히 ‘노력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겠다고 ‘서원’한 것이며 그 서원을 바탕으로 이 수행을 실제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 훈련은 이 동기를 매일 되새기고 강화하는 것입니다. 즉, 매일 아침 세 번, 저녁 세 번 보리심을 되새기고, 되살리고, 새롭게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의미없는 주문처럼 기계적으로 구절을 반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티베트어나 자신의 언어로 보리심 발원문을 외우지만, 그것이 자기 언어라고 해서 반드시 마음이 온전히 담긴 것은 아닙니다. ‘의미 없이’라는 말은 단지 중얼 중얼하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감정도, 의식도, 마음속에서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은 먼저 보리심의 이점들을 떠올린 후, 실제로 발심에 이르는 수행 단계들을 차근차근 따라야 합니다. 평등심을 닦고, 모든 존재에게 차별 없이 마음을 열고, 모두가 나의 어머니였고, 나에게 한없는 자비와 친절을 베풀어 왔다는 사실 등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마음속으로 항상 되새겨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할 때 우리의 보리심은 점점 더 굳건해지고, 매일 이 수행을 반복하면 보리심의 결심이 약화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일정한 수행문구나 정형 문장을 사용하여 아침에 세 번, 저녁에 세 번 낭송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단지 의미 없이 읊조리는 수준에 머무르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렇게 하기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 번째 훈련은 선업과 깊은 지혜의 수집, 즉 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쌓아나가려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보리심의 염원 상태를 갖고 가능한 한 타인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함으로써 긍정적인 힘을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방석 위에 앉아서 “모두에게 복이 있기를”, “나는 깨달음에 이르러 모두를 돕겠다”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보살계를 받기도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타인을 돕는 행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긍정의 힘의 망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안전한 명상의 장소에만 머무르며 “나는 모두 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깨달음을 이루어 모두를 돕겠다.”라고 하지만 막상 일상에서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너무 바빠요”,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라고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도울 수 있는 만큼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가능한 한”이라는 것은 지금 자신의 단계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현실적으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샨티데바는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하지 말라는 점을 매우 분명히 강조합니다. “나는 모두를 깨달음의 향연에 초대합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샨티데바는 이런 식으로 매우 시적으로 표현 했는데, 이 말은 “나는 당신의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결국에는 당신을 이 깨달음의 잔치에 초대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약하는 것이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 반드시 이행할 약속입니다. 이는 앞전에 언급한 것 - 즉, 아직 수행이 깊지 않은 보살이 더 높은 수행 단계에 있는 보살이 실천하는 행동을 무리하게 흉내내는 것 - 과는 다릅니다. 이것도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여우가 사자가 뛸 수 있는 곳까지는 뛸 수 없다.”는 말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다.  

샨티데바 보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기 전에 자신이 그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는지를 신중히 살펴보라.” 예를 들어, “나는 전체 칸쥴(대장경)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겠다”고 말하지만 지금 이 생애에서 그것을 다 해낼 수 있는 역량이나 시간이 없다면 그런 약속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지금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시작한 후에 중도 포기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모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겠다”는 보살의 큰 서원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 서원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다른 이들을 돕고, 공덕 자량을 쌓고, 공에 대한 명상을 통해 지혜 자량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공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수준에 있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동기 부여가 보살의 결심이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제 네 번째 훈련으로 넘어갑니다. 아무리 어려운 사람이더라도 그들을 돕고자 하는 시도, 혹은 최소한의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보리심이란 어떤 중생이든, 아무리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사람일지라도, 그들 모두를 이롭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이건 심지어 잠을 청하려는데 우리 머리 위를 귀찮게 날아다니는 모기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습니다. “네가 전생에 내 어머니였을 수도 있으니 나는 너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마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거야.” 물론, 이런 발심은 상당히 고차원의 보리심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최소한 인간들에게라도 이 보리심을 적용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독일에 심각한 조현병을 앓고 있는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 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계속 다르마 단체나 스승들에게 의존하려 하고, 특히 저에게 집착하며 계속 전화하고 이메일을 보내옵니다. 이미 그녀는 수많은 다르마 센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굉장히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행동은 꽤나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녀가 저에게 전화를 걸어오면 저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지금 저는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이건 제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고 당신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만트라 구절을 하나 알려주고 외우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행동입니다. 그녀의 상태는 그 정도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녀가 또 연락해올 때,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고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말해버리면 훨씬 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보살 수행의 훈련이 있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없지만, 당신을 도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염원일 뿐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럴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상당한 인내심과 포용심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보살 수행을 통해 배워나가는 태도입니다. 최소한 그녀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실질적으로 그녀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게 솔직한 현실입니다. 

이것들은 이번 생에서 보리심이 퇴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네 가지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섯 번째 훈련입니다. 다섯 번째 훈련은 미래 생에서도 보리심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며 우리는 이 역시 지키겠다고 서원하게 됩니다. 이 훈련은 네 가지 쌍의 상반된 행동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특정한 방식의 행동을 피하고 중단하며 그 대신 그 반대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방식을 상반된 행위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스승, 부모, 삼보를 속이거나 기만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그 대신, 그들을 언제나 정직하게 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동기나 남을 돕기 위한 노력에 있어서 더욱 그래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선 부모님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부모는 우리가 아기일 때부터 돌보고 길러준 존재입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는 부모에게 의지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물론, 우리가 연꽃에서 태어난 구루 린포체처럼 예외적인 존재라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부모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미래에 의지할 수 있는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님을 속이거나, 우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인 척하거나, 특히 영적인 부분에서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이 점은 영적 스승에게도 마찬가지로 명확히 적용됩니다. 스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어요.”, “저는 다양한 수행을 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 이것은 명백한 속임수입니다. 불, 법, 승 삼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제 삶을 이렇게 전환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해로운 목적이나 자기 이익만을 좇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또한 기만입니다. 우리가 미래 생에서도 보리심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부모, 스승, 삼보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의 인연을 바르게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정직함은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그래야만, 미래 생에서도 보리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새롭게 함양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됩니다. 

보살계와 금강승계는 별혜탈계와는 다릅니다. 별해탈계는 이 생에서만 유효한 계율입니다. 반면에, 보살계와 금강승계는 모든 미래 생에 걸쳐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 유효합니다. 예를 들어, 이 생에서 보살계를 받았다면 다음 생에서도 그 계율은 유지됩니다. 다만, 그 상태에서는 ‘잠재적’인 형태로 남아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다음 생에 바퀴벌레로 태어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바퀴벌레가 전생에 보살계를 받았다면 그 바퀴벌레에게는 보살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활성 상태가 아니라 잠복 상태, 즉 잠자는 상태입니다. 그 바퀴벌레의 마음의 연속체 어딘가에는 그것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히 그 바퀴벌레가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보살계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유지하는 서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보살계를 지닌 채로 죽고 다음 생에 바퀴벌레로 태어난다 해도 그 바퀴벌레 생에서도 보살계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다만 그 서원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휴면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생에서 우리는 다시 보리심을 개발해야 하고 보살계를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인간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가 미래 생에서도 다시 보리심을 발현하고 보살계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부모, 스승, 삼보에 의지하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관계는 기만이 아닌 정직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기만적인 스승을 인연을 맺게 된다면 학대나 잘못된 종단 또는 사이비 종교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또 부모에게 학대를 당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부모, 스승, 삼보와의 관계는 정직하고 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생에서도 순수한 보리심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부모가 우리의 영적인 길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반대하는 상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함이라는 것은 무조건 모든 개인적인 삶을 낱낱히 말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드시 모든 것을 다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을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정직함이란, 영적인 삶과 관련된 문제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 부모를 속이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를 도와주기로 약속했으면 그대로 실천해야 하며, 자신의 수행이나 신행 생활에 대해 물었을 때 그것이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거짓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보살들을 비난하거나 업신여기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나거나 불만이 있어서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고 비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처가 아닌 이상, 누구를 보살이라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모든 존재를 내 스승으로 여기려는 태도를 갖추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무례하고 거칠게 행동하더라도, 그는 나에게 그러한 방식으로는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합니다. 이것을 마치 절대적인 원칙, 실제적인 법칙처럼 여겨서, 그 상황의 상대성과 맥락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면, 그것을 방치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해를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이를 멈추어야 합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도 그리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것이 분노나 증오에서 비롯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넌 나쁜 사람이야. 그래서 벌을 받아야 마땅해”라는 식의 태도는 보살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 이가 해로운 행동을 하고 있더라도 그 역시 나의 스승입니다. 그는 나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고, 그가 악업을 짓지 않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가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자비에서 우러난 실천입니다.

나의 스승이었던 세르콩 린포체께서 말씀하신 일화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특정한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티베트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스승은 제자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매우 고차원적인 수행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린포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 스승의 동기는 순수할 수 있어.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보리심의 동기일 수 있지.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숙련되지 못했어.” 린포체께서는 그 스승을 비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스승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닌 제자인 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험담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린포체께서는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다 하더라도 타인을 도울 때는 그 방법이 지혜롭고 능숙해야 한다는 것을 저에게 가르쳐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어떻게 가르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누군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노로 반응하지 않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배울 점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잘못을 조심스럽게 지적해줄 수 있습니다. 보살이거나, 보살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고 해도 반드시 부처님처럼 완벽한 지혜와 숙련된 방편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상대방에게 “나는 성스럽고 위대한 존재이니 내가 옳고 네가 틀렸어”라는 오만한 자세가 아니라, 겸손하게 조언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중요한 점은, 비난하거나 헐뜯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해 분노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경멸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단지 서툰 보살이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리석고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보살의 잠재력을 지닌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며, 그의 행동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고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존중심은 다음 생에서도 보리심을 다시 일으키고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세 번째는 타인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행동을 했을 때 그로 하여금 후회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그들의 건설적인 노력을 격려하고, 만약 그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면 보리심을 개발하고 깨달음의 길을 따라가도록 붇돋아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영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거나, 우리가 따르지 않는 스승에게 배우고 있을 때, “그 스승은 별로인데 어리석게 왜 거길 다니나요?”라며 그들을 불쾌하게 만들거나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든다면 그들은 쉽게 낙담하고 수행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들의 실천이 건설적이고 유익한 것이라면 격려하고, 더 발전할 수 있는 조언은 그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제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기를 원한다면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건설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긍정적인 일을 했다면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졌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 센터가 아니라 다른 센터에 보시했나요?” 같은 말은 하지 않는 것이 바른 태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항목은 위선적이거나 잘난 척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위선이란 자신에게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기고 없는 척하는 것이며, 잘난척이란 사실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질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몰래 피우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는 자기 결점을 숨기고 있는 위선적인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나섰다면 그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솔직하고 진실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숨기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불교 수행자나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성스러운 존재인 척하거나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쉽게 상대방을 이상화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며, 그 결과 심각한 실망과 환멸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행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입장에 있거나 또는 스승의 위치에 있다면 모든 단점을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우리의 부족한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 부분은 아직 공부하지 않았어요.”, “저는 참을성이 부족해요.”, “가끔은 화를 내기도 해요.”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숨기지 않고 “저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도우려고 할 때, 그들이 우리의 이상화된 모습에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진지하게 극복하려 애쓰는 사람의 모습이 더 깊은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학생의 입장에서 훨씬 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발심의 상태’, 특히 서원한 발심보리심을 가졌을 때 따르겠다고 약속하는 다섯 가지 훈련입니다. 첫 네 가지는 이번 생에서 보리심이 퇴전하기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이고, 마지막 한 가지 훈련은(네 가지 실천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 미래 생에서도 보리심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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