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보살계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 보살계가 불교 수행길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보살계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람림의 여러 단계를 거쳐 불교 수행을 일정 부분 완성해야 하고, 보리심을 길러야 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보리심에는 먼저 ‘발원 상태’가 있는데 이때는 단순히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을 이루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그 염원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서원 상태’가 있으며, 이 서원 상태에 따르는 수행법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어서 보살계를 받는 방법과 서원의 본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 본격적으로 보살계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며 처음 세 가지 계를 다루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를 찬탄하고 타인을 업신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는 둘 다 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 경우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우리 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칭찬하는 동기는 그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탐욕입니다. 물질적 이익, 칭찬, 사랑, 존경 등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면 타인을 업신여기는 동기는 질투입니다. 그 사람을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내용의 부차적 보살계가 있는데 여기서의 동기는 다릅니다. 이 경우는 자기 자신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교만’이 동기가 됩니다. 즉 “나는 대단하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깎아내리는 동기는 질투가 아니라 단순한 ‘분노’인데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 보살계와 부차적 보살계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근본 보살계는 자기를 칭찬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착취적 동기이므로 단순히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보다 보살행에 훨씬 해롭습니다. 또한 타인을 질투하며 깎아내리는 행위 역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위입니다. 반면, 단순히 싫거나 화가 나서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가 돕고자 하는 다른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해치지 않으므로 부차적 보살계로 분류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해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법을 나누지 않고 재물이나 소유물, 시간을 아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기는 ‘집착과 인색함’이며 모든 것을 자기만 차지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능력을 크게 해칩니다. 반면 ‘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라는 부차적 보살계가 있는데 여기서는 동기가 ‘분노’, 싫음’ 또는 ‘원한’, ‘질투’, ‘게으름’, ‘무관심’ 등 자기 내면의 번뇌 때문입니다. 즉,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감정적 장애로 인한 것입니다. 자기만 차지하려는 이기심으로 법을 나누지 않는 것이 근본 보살계 위반이고, 감정 때문에 가르치지 않는 것이 부차적 보살계 위반인 셈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이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주된 동기는 ‘분노’입니다. 여기서는 실제로 누군가를 꾸짖거나 때리는 상황을 말하며 상대방이나 그를 대신해 누군가가 “죄송합니다. 그만해주세요”라고 요청했을 때에도 멈추지 않는 경우를 포함합니다. 이에 반해 부차적 보살계는 ‘나중에 상대방이 사과할 때 용서하지 않고 원한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근본 보살계는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어 상대에게 실제로 해를 끼치는 중대한 경우이고, 부차적 보살계는 원한을 품고 있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가볍고 덜 무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첫 번째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해치지만, 두 번째 상황에서는 무시하거나 마음속으로만 미워하는 상태입니다.
(4) 대승의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만든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
네 번째는 대승 가르침을 버리고 스스로 만든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보살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대승 가르침을 거부하고 우리가 아는 바른 가르침을 무시하며 자신에게 편한 거짓 가르침을 만들어 그것이 불교의 진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만의 잘못된 이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여 자신의 스승으로 따르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보살계를 어기는 행위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로운 성적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적절한 성적 행위에 대한 가르침을 의도적으로 제외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는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지는 여러 성행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꺼이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보살의 바른 성 행위란 단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라고 가르치며, 이를 곧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라 주장합니다. 사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면 사람들이 다 떠날테니 이렇게 말해야 사람들이 받아들일거야”라고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통 가르침을 희석하여 “이게 부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말씀이야”라고 포장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결국 타인을 속이는 행위이며 진정한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 윤리의 핵심은 강렬한 번뇌, 특히 성적 행위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탐욕과 욕망에 의해 유발되는 다양한 행위를 경계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한 가르침에 있습니다. 즉, 불교적 성 윤리는 우리가 이러한 탐욕과 애착을 따라 행위하지 않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된다”는 서구적 인도주의 윤리관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금지나 외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인 내면의 번뇌와 갈애를 어떻게 다루고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정한 가르침을 스스로 꾸며내어 그것을 마치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가르치는 일은 다른 이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정통 법이 아니며 청정한 전법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저와 같이 다르마 라이트와 진정한 다르마를 명확히 구분하여, 전자의 경우는 이 생의 삶을 보다 안정적이고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입문적 수준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밝힌다면,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성적 행위를 하나의 입문 단계로 제시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단, 그것이 불교의 본질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당연히 강조하신 부분이며, 그 자체로도 윤리적 실천으로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해탈, 보리심, 즉 열반과 께달음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욕망과 애착, 특히 성적 탐욕과 같은 강렬한 갈애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5) 삼보에 바쳐진 보시물을 가로채는 것
다섯 번째는 삼보, 즉 불, 법, 승을 위해 바쳐진 보시물을 가로채는 행위를 금하는 계율입니다. 이는 곧 훔치거나 횡령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공양물들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불, 법, 승을 위해 바쳐진 것이나 삼보에 속한 어떤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이용하는 행위가 바로 이 계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부처님이나 법, 또는 승가를 위해 공양물을 올렸다고 합시다. 불교 센터에 시주하거나, 불상을 조성하거나, 경전을 인쇄하거나 번역하기 위해, 혹은 비구나 비구니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기 위해 돈이나 물품을 보시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자신의 용도로 사용한다면 이는 이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승가는 네 명 이상의 비구나 비구니로 구성된 공동체를 의미하며 성문성자 승가(아리아 승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경전을 번역하거나 인쇄하는 일처럼 삼보를 위한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에 대한 보수로 일정한 급여를 받는 경우라면, 이는 예외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불법승을 위한 정당한 활동에 종사하고 있고,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대가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정당한 수행 활동과 무관하게 단지 자기 이익을 위해 공양이나 시주를 착복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근본 보살계인 이유는 삼보를 위해 바쳐진 보시는 불교 가르침을 펴고 중생들이 해탈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보살은 사람들에게 방법을 강요하는 선교사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가르침과 방편들을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공양물을 가로채는 것은 도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방해가 되기에 이 계율은 보살 수행에서 매우 중요한 근본계를 구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 보살계입니다.
(6) 성스러운 법을 저버리는 것
여섯 번째는 성스러운 법을 저버리는 행위를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부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넘어서 분노를 동반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님을 주장하거나 논박하려 드는 것, 혹은 그러한 태도를 말이나 행동으로 다른 이들에게 유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저버리는 문제인가 하면, 성문이나 연각, 즉 상좌부 불교라 불리는 교학 체계에 속하는 두 수행체계, 또는 대승의 가르침에 속한 경전들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 부류의 경전들(상좌부나 대승에 속한 전부 혹은 일부)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며, 불교 경전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도 그렇게 믿게 만든다면 이는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다양한 방편으로 설하신 모든 가르침은 그 대상이 누구든 간에 해탈과 깨달음을 이루도록 돕기 위한 것이며 각기 다른 성향의 중생에게 맞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특정한 경전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경전을 통해 해택을 받을 수 있었던 중생들의 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구식 불교학이나 역사적 분석의 관점에서는 언어적 특징이나 문체 등을 근거로 대승 경전이나 금강승 경전들이 부처님의 생존 시기보다 훨씬 후대에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이 경전은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결론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교 경전은 부처님 재세 당시에는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고 구전으로만 전승되었습니다. 이는 당대 사람들의 기억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며 모든 경전을 한 사람이 전부 기억한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이나 제자들이 특정 경전을 책임지고 기억하고 전승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비현실적이거나 과장된 이야기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현대 티베트의 주요 겔룩파 대사찰에서도 이런 관행이 이어집니다. 사찰의 각 학부는 특정 탄트라와 그 의식, 해설 등을 책임지고 있으며 수많은 승려들이 그것을 통째로 암송합니다. 이러한 체계는 전체 부처님 가르침을 여러 사찰이나 학부에 나누어 맡기는 형태로 보자면 문서 없이도 전체 가르침을 구전을 통해 전승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을 수 있다는 점을 뒷받침합니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티베트 승려들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경전을 암기합니다. 대부분 이들은 7-8세부터 암송을 시작하며, 어릴 때 학습한 내용은 평생 동안 기억에 남기 때문에 이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용해왔던 것입니다.
전통에 따르면 상좌부 경전은 대승 경전보다 공개적으로 널리 독송되었고, 대승 경전은 금강승 경전보다는 더 공개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는 동일하게 구전의 방식으로 전승되었습니다. 경전들이 마침내 문자로 기록되었을 때, 부처님께서 남기신 지침 가운데 하나는 “법을 다양한 언어로 설하라”, 즉 각자의 언어로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경전이 기록된 최초의 언어가 그것이 출현한 역사적 시대의 언어라는 사실은 그 경전이 부처님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경전은 팔리어로 기록되었고, 어떤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또 어떤 것은 후기 산스크리트 문체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 방식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러한 점이 경전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샨티데바 보살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탁월한 논리를 제시하신 바 있습니다. “대승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모든 논거를 똑같이 사용하여 상좌부 경전의 진정성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좌부 경전 또한 구전을 통해 전해졌고, 문자로 기록된 것은 부처님 열반 이후 수 세기가 지난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상좌부 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증명하려 할 때 사용하는 논리는 동일하게 적용해도 대승 경전 또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타당한 논리적 추론이며, 이와 같은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어떤 경전이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것인가?”라는 문제를 따질 때는 “그 경전을 설한 존재로서의 부처님은 어떤 분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상좌부 경전을 설하는 부처님은 누구인가?”, “대승 경전을 설하는 부처님은 누구인가?”, “금강승 경전을 설하는 부처님은 누구인가?”의 대한 답은 각기 매우 상이한 부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상좌부 경전에 나타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그 생애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든 후로 그 마음의 연속체가 종결되었다고 보는 역사적 인물로 이해됩니다. 반면에, 대승 경전에서의 부처님은 단지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에 그치지 않고 아득한 과거에 이미 성불하였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화신(응화신)으로 나타나 중생을 가르치며, 여러 가지 신체 형태(화신, 보현신 등)와 다양한 부처님 세계(불국토)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대승 경전이나 금강승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다고 해도 그것이 반드시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상좌부 관점에서는 부처님이 오직 그 한 생에에만 존재한 역사적 인물로 한정되지만, 대승에서는 훨씬 더 넓은 의미의 부처님 개념이 존재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승 경전을 설하는 부처님은 역사적 부처님으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오래 전에 깨달음을 이루셨고 현재도 무수히 많은 화신(응신)으로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나타나십니다. 화신신과 보현신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불국토에서 설법을 하기도 하십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연생기를 적용해보면, 대승 경전을 설하는 부처님은 경전 속에 묘사된 부처님이고, 이 점에서 ‘부처님이 대승을 설했다’라는 말이 시간적으로 달라져도 모순이 없습니다. 실제로 대승 경전(상좌부 경전에는 잘 없는 듯 하지만)에서는 부처님께서 다른 이들이 설법하도록 영감을 주시고, 반야심경에 나와있듯 부처님께서 직접 계시면서 마지막에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임을 확인하시는 모습도 나옵니다.
부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는 가르침은 여러 종류가 있으며, 이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금강승 경전에서 묘사되는 부처님을 본다면 훨씬 더 넓고 깊은 부처님의 개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을 원초적 청정성, 즉 모든 존재의 가장 미묘한 마음의 본질로서 바라보는 ‘금강정’이나 ‘삼방하라’같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이 순수한 환각 혹은 깨달음의 환상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고, 그 가르침을 다른 이가 받아 적어 금강승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금강승 경전이 어떻게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도 모순이 없습니다. 순수법신 차원의 부처님으로부터 가장 미묘한 마음의 청명함을 받아 어떤 이가 환상이나 다른 방식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은 금강승의 기원 방식이기도 합니다. 금강정 부처님이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하셨고, 그 사람이 순수토에서 받아 적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부처님이 상좌부, 대승 경전, 그리고 금강승 각각의 가르침을 설하셨는지는 그 가르침이 담긴 경전 속에 묘사된 부처님의 모습에 따라 달라집니다. 경전마다 부처님에 대한 묘사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경전을 누가 설했다 하는 문제도 그 경전 내에서의 부처님 묘사를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을 단일하고 고정된 실체로 보면서 역사적 부처님이 모든 경전을 설했다고 보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이해는 그 경전 내 부처님 묘사에 근거해야 합니다. 금강승에서 묘사하는 부처님은 가장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그 안에는 대승 경전 속 부처님 묘사도 포함되고, 그 대승 경전 속 부처님 안에는 역사적 석가모니 부처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는 ‘광대한 수단’일 뿐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묘사도 상좌부 경전에 비해 훨씬 광대합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순수한 환상이나 숨겨진 가르침을 통해 받은 가르침이 진짜 금강정이나 삼방하라 같은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진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기준이 꽤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환상에서 받았거나 숨겨진 경전인 ‘터마’는 불교 가르침의 핵심 내용과 일치해야 합니다. 즉, 부처님의 주요 주제들인 삼보, 출리심, 보리심, 해탈, 깨달음과 같은 것들과 모순이 없어야 합니다. 보리심, 사성제, 모든 조건적 현상은 무상하고 고통이라는 기본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철학적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중심 주제들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고, 그 경전이 전하는 수행법을 따라 수행자가 실제 깨달음과 성취를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을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인정합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고 그것을 수행한 사람들의 체험을 통해 입증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진정성 판단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개념으로 대승을 저버리는 부차적 보살계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대승 경전을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중 어떤 부분들은 비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대승 경전에 묘사된 부처님의 무수한 많은 화신이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거나, 모든 언어를 이해하고, 말을 하면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한다는 점 같은 부분을 “너무 과장됐다. 말도 안 된다”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나는 대승불교와 보리심, 자비의 정신은 좋아하지만 이것은 너무 지나친 설정이 아닙니까?”라거나 혹은 “공성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누가 그것을 원하겠습니까?”하며 비판하는 경우도 이 부차적 보살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런 비판을 네 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용이 열등하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부처님이 그렇게 무수히 많은 화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열등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수준이 낮고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밀라레빠가 야크의 뿔 끝으로 쑥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터무니없다”라고 하면서 저급한 가르침이라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세련된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고, 유목민 같은 사람들에게만 맞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매우 오만한 태도입니다. 두 번째는 ‘표현 방식이 열등하다’는 것인데 글이 형편없고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으며 수준이 낮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저자가 열등하다’는 것인데 많은 주석들이 이러한 비판을 합니다. “이 저자는 별로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사용이 열등하다’는 것인데 이 가르침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밀라레빠가 야크 뿔 끝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차적 보살계이고, 우리는 이런 태도를 갖지 않겠다고 서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부차계는 깨기 쉽고 사람들이 흔히 하는 행동입니다. “어떤 가르침은 말도 되지 않으니 그냥 무시하고 좋은 부분만 취하자” 하는 태도입니다. 지옥이나 성 윤리 같은 부분이 불편하다면 그냥 듣지 않겠다는 식입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이렇게 비유합니다. “이빨 없는 할아버지가 감자 삶은 것만 먹고 고기는 뱉어내는 것과 같다”라고 말입니다. 쉽게 씹을 수 있는 것만 먹고, 씹기 힘든 건 다 뱉어내는 것입니다.
(7) 출가 수행자를 환속시키거나 그들의 가사를 훔치는 등의 행위
다음 일곱 번째는 출가 수행자를 환속 시키거나 그들의 가사를 훔치는 것 같은 행위를 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비구나 비구니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말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앞에서 삼보를 위한 보시를 빼앗는 것은 네 명 이상(4인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한 두 세 사람에 대한 해가 문제됩니다. 그들이 계율을 심하게 어겨 성, 품행을 잃었는지(사근대계)가 아닌지, 가사를 제대로 입지 않는지, 공부를 많이 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원한 때문에 그들을 때리거나 모욕하거나 그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예로는 옆집에 사는 출가자가 라디오를 틀어 명상에 방해된다고 여겨 그 라디오를 부수거나 훔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비구나 비구니가 네 가지 주요 서원을 깨뜨려 출가자의 지위를 잃은 경우라면 그들은 더 이상 비구, 비구니가 아니므로 다른 문제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중대한 위반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우리가 그들을 싫어하거나 함께 지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들을 쫓아내거나 가사를 빼앗아 “당신은 이곳에 있을 수 없다”라고 단정짓는 경우입니다. 그런 행위는 이 계율을 어기는 것입니다. 요지는 승가를 존중하고, 적어도 출가의 길로 첫걸음을 뗀 이들을 돕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 다섯 가지 극악무도한 죄를 짓는 것
여덟 번째 보살계는 다섯 가지 극악무도한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죄”라는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매우 강력하게 파괴적인 행위들을 말하며 연속적으로 그런 행위를 저지르면 죽은 직후 곧장 매우 나쁜 태생(畜生道, 아귀, 지옥 등)으로 떨어질 수 있는 행동들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가장 중대한 악업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 둘째,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 셋째, 아라한(성취한 자)을 살해하는 것, 넷째, 악의로 부처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여기서는 부처가 자발적으로 피를 내는 경우가 아니라 부처를 해치려는 의도로 상처를 입히는 경우를 말합니다). 다섯째는 승가 공동체에 분열을 야기하는 것, 즉 승가를 갈라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 법회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법회를 새로 여는 것, 또는 승가를 위한 추가적인 규율을 제정하는 것만으로는 분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즉, 불교 승가 공동체에서 또 다른 종파적 승단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부처님의 승가를 심하게 비난하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 - 부처님의 승가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분열입니다. 참고로 불교 내에는 보다 엄격한 승가 수행의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3가지 고행법인 ‘두탕가(수도 수행 지침)’입니다. 이 13가지를 따르는 것을 근거로 태국의 숲속 전통이 형성되었고, 티베트 전통에서는 3년 출가 수행 중 일부가 이 수행법을 실천합니다. 이 13가지는 부처님의 사촌인 데바닷타가 처음 제안했는데, 그는 부처님께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13가지 수행법을 따르는 전통을 만드는 것이 법에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분열이 되는 것은 그런 수행 전통을 따르면서 “부처님의 승가는 쓸모없다”고 분노와 악의를 품고 부처님의 승가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경우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가 내 분열행위인 파분입니다.
그 13가지 두탕가 수행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승려 및 비구니가 누더기 옷을 이어 만든 헌 옷으로 된 승복을 입는 것 (2) 세 벌의 승복만 입고, 스웨터 같은 추가 의복을 입지 않는 것 (3) 발우 공양을 하며 음식을 받으며 식사 초대를 받지 않는 것 (4) 발우를 들고 공양을 할 때 한 집도 거르지 않는 것 (음식이 좋지 않거나 심한 말을 들어도) (5) 받은 공양을 한 번에 모두 먹는 것 (남겨두거나 나중에 먹기 위해 보관하지 않음) (6) 오직 발우에서만 식사를 하는 것 (7) 식사를 시작한 후에는 추가 음식을 받지 않는 것 (8) 숲이나 정글에서만 거주하는 것 (9) 나무 아래에서 거주하는 것 (10) 집이나 처소가 아닌 노천에서 생활하는 것 (11) 주로 시체장이 있는 곳에 머무르는 것. 시체장이란 시신을 화장하거나 잘라서 개나 독수리에게 먹이는 종류의 묘지를 말합니다. 이런 장소에 머무르는 것은 꽃과 관목, 나무, 벤치가 있고 예술적으로 조성된 묘비만 있는 깨끗하고 쾌적한 묘지와는 달리 죽음과 무상에 대한 훨씬 강력한 가르침이 됩니다. (12) 머무르는 장소에 만족하며, 계속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것. 즉, 살기 좋은 나무 밑 한 곳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장소를 옮겨 다니는 것 (13) 마지막은, 3년 동안의 출가 수행에서 행해지는 누워서 자지 않고 앉아서 자는 것, 즉 좌선 자세로 수면을 취하는 것.
세르콩 린포체께서는 티베트의 하위 금강승 대학에서 모두가 좌선 자세로 함께 잠을 잤으며 종이 울리면 단지 눈만 뜨고 바로 기도와 명상을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서로 기대어 머리를 이웃의 어깨에 얹고 잠을 잤다는 이야기처럼, 실로 엄청난 고행의 규율입니다. 이런 엄격한 방식으로 숲 전통 등을 따르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이유로 다른 승가를 깎아내리며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이 문제라는 요지입니다.
(9) 왜곡되고 적대적인 관점을 갖는 것
아홉 번째는 왜곡되고 적대적인 관점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진리나 가치 있는 것을 부정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업과 과보의 법칙(행위의 인과), 올바른 삶의 방향, 귀의, 윤회, 해탈, 깨달음, 타인에 대한 친절과 이타적 도움 같은 것들을 부정하고 적대하며 그것이 나쁘다고 증명하려 드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그런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거나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자신의 부정이 옳다고 굳게 믿으며 그 옳은 견해를 억누르고 반박하려는 마음을 갖습니다. 매우 편협하고 무지한 심리 상태에서 옳고 가치 있는 것을 완강히 배척하려는 것입니다.
쫑카파 대사께서는 왜곡되고 적대적인 사고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 동기에는 다섯 가지 다른 번뇌적 태도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고 방식에 대한 것이지, 실제로 법정에 가서 싸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러한 싸움을 계획하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어떤 숭고한 현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는 사실인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우리는 단지 알지 못하고 눈이 멀어 있어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둘째는 논쟁적 태도입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태도를 즐기는 비뚤어진 감각을 말합니다. 단지 싸우는 것과 논쟁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반박하는 것을 즐기고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 것을 즐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셋째는 잘못된 사유에 근거해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상태입니다 즉, 어떤 현상에 대해 나름의 분석을 거쳤지만 그것이 잘못된 분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된 결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옳다”고 완고하게 고수합니다. 넷째는 완전한 비정하고 냉담한 태도입니다. 심술궂은 태도, 즉 자비도 없고 타인을 돕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며 영적 수행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그런 비정한 태도입니다. 다섯째는 성공욕입니다. 남을 이기려는 마음으로, 자신이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라는 사실에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네가 뭐라 하든 상관없다. 이 토론에서 반드시 너를 이길 것이다. 네가 옳다고 믿는 것을 무너뜨리겠다. 그것이 내게는 즐거움이다”라는 태도입니다. 타인의 올바른 믿음이나 긍정적인 가치관을 무너뜨리려 하면서도 그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마음이 바로 왜곡적 적대적 사고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흔히 사견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히 어떤 것을 잘못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의도와 강한 집착이 수반된 매우 무거운 악행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심각한 부정적 행위입니다.
(10) 마을과 같은 장소를 파괴하는 것
마지막 열 번째는 마을과 같은 장소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폭탄을 던져 도시나 마을을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사람이나 동물이 살고 있는 환경, 즉 도시, 마을, 시골 같은 거주지를 해치거나 훼손하여 그것이 해롭거나 불건전한 장소가 되게 만드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런 행위는 생명체의 안락과 복지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타인의 행복과 복지를 증진시키고,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보호해야 합니다. 다른 존재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과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사는 곳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보시와 자비의 길을 걷는 수행자로서, 우리는 중생이 살아가는 곳을 해치지 않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보전하며 그 안에서 평화롭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