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계 제11-18계 해설 및 위반의 의미

(11) 공의 가르침을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설하는 것

우리는 보살계를 살펴보고 있는데, 열 여덟 서원 중 열 번째까지 다뤘고 이제 열한 번째로 넘어갑니다. 이 서원에서 피하려는 것은 마음이 아직 닦이지 않은 사람에게 깊은 차원의 공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보리심의 동기가 있지만, 이 가르침을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이들은 혼란과 두려움을 느껴 보살행을 포기하고 단지 개인적 해탈만 추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꽤 구체적인데, 설명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공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다른 이를 이롭게 하려 합니까?”라는 생각으로 단지 자기만의 해탈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중관뿐 아니라 특히 유식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유식을 혼란스러워해 “모든 것은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며 현실은 전혀 없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데 왜 도와야 합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관에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 행동은 공을 잘못 이해해 법을 완전히 버리게 만드는 모든 경우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 해서 완전한 허무주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설할 때는 반드시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며 점진적으로 이끌어야 하며, 공을 가르칠 때는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거나 오해하지 않도록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게 해야합니다. 사실 이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초감각적 인식(초감각적 지각) 능력이 없으면 누가 그 가르침을 이해할 준비가 되었는지 알기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경전과 인도 대가(용수, 월칭)등이 쓴 공에 관한 많은 글을 보면 그들은 확실히 대승의 길을 따랐고,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도 매우 많은 대중에게 공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르치십니다. 그렇다면 그분들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공을 가르쳐 보살계를 어기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어렵지만, 여기서 도움이 될 만한 점은 그분들이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게 공을 가르치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오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할 뿐입니다. 개별적으로 가르칠 때는 각각의 이해도를 확인할 수 있지만 다수에게 가르칠 때는 쉽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주요 설명의 취지는 보리심 동기가 이미 있는 사람에게 공을 가르칠 때 그것이 그 동기를 버리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타인을 완전한 깨달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

다음 열두 번째는 타인을 완전한 가르침에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 행위의 대상은 이미 보리심을 일으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너는 항상 보시와 인내를 할 수 없고 부처가 될 수 없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며 낙담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 행위는 완전한 잘못이 되지 않습니다. 보살은 모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돕고자 하므로 타인이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3) 개별 해탈 계율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 

열세 번째는 타인을 그들의 개별해탈계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별해탈계는 개인의 해탈을 위한 모든 수준의 근본계 서원을 의미하며 재가자와 출가자(비구, 비구니)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 대상은 이러한 개별해탈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며, 우리가 그에게 “보살로서 이런 개별해탈계를 지킬 필요가 없다. 보살은 모든 행위가 청정하므로 어떤 행위를 해도 괜찮다”로 말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이 근본타락이 완전히 성립하려면 상대가 실제로 그 계를 포기해야 합니다. 분명히 해탈이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토대는 어느 수준이든 개별해탈계를 지니고 그것을 청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부차 계율로 성문승 또는 상좌부를 비방하거나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보살에게 “성문의 가르침, 즉 개별해탈계에 관한 가르침을 들을 필요가 없다”거나 “그것을 지니거나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이 부차 계율을 부정하는 것이 되며 상대가 실제로 계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실제로 자신의 개별해탈계를 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근본타락이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보살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금강승의 계만 있으면 되며 보살꼐나 개별해탈계는 필요 없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쫑카파 대사께서는 이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는 여러 경전과 논서를 근거로, 수행자가 해탈이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수준이든 개별해탈계를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부처님꼐서도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최소한으로라도 거짓말, 도둑질 등과 같은 중대한 악행을 피하고 기본적인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는 것이 수행 근본으로서 매우 중요합니다.

(14) 성문승을 경시하는 것 

그 다음, 열네 번째는 성문승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성문승은 다른 이름으로 상좌부라고 불립니다. 상좌부 경전이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임을 부정하는 것이 타락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경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임은 인정하지만, 그 안에서 설해진 수행법을 통해 번뇌를 완전히 여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쉽게 생길 수 있습니다. 요즘은 세계 곳곳에서 위빠사나 수행 과정을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좌부 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대승 수행자들이 “이런 수행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하며 비웃거나, “그저 앉아서 호흡만 바라본다고 번뇌가 사라지겠느냐. 그런 수행은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타락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들을 피상적으로만 보고 그 전체 맥락이나 그 수행들이 어떤 연속된 체계속에서 발전하는가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채 쉽게 폄하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좌부 계통의 수행법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갖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대승 수행은 상좌부의 모든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그 위에 더 많은 것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항상 상좌부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물론, 보살계의 부차 계율에서는 같은 목적을 이루는 데에 대승의 방법이 있다면 굳이 상좌부의 방법에만 시간을 쏟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상좌부 수행자들과 일곱 밤 이상 함께 머물지 말라”는 계율이 있는데 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좌부 수행자’란 오직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만 수행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또한 대승 수행자들의 보살행이나 금강승 수행을 비웃고,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다 쓸데없는 일이다”라고 비난하며 수행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오래 함께 지내면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아 보살의 발심을 잃을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존재하는 유일한 전통인 상좌부 안에는 이런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대승 수행을 존중하는 수행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율은 그런 상좌부 수행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공통적 주제는 이렇습니다. 보살이거나 혹은 보살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깨달음과 일체 중생의 깨달음을 함께 지향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목표에서 멀어지게 하는 영향에 노출되거나, 다른 이로 하여금 그 목표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그만두라”고 말하는 것이든, 혹은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든,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 공성에 대한 거짓된 체험을 주장하는 것 

열다섯 번째는 공성에 대한 거짓된 깨달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아직 공성에 대해 완전한 체득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을 완전히 깨달은 것처럼 거짓으로 설법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종종 스승들에 대한 질투로 인해 발생합니다. 위대한 스승들은 공성을 설하고 있으며, 아마도 그것을 올바르게 설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 대한 질투심으로 인해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큰 스승인 양 가장하며 공성을 이해한 것 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거짓된 인상을 주며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우리의 설명을 이해하든, 우리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든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 사람은 정말 훌륭하구나, 공성을 깊이 이해했구나”라고 생각하든, 혹은 “이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는구나”라고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설법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우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면, 그 행위 자체가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 조항은 특히 공성에 대한 거짓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리심이나 그 밖의 다른 모든 법의 핵심 가르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마치 이미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가장하여 설법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모든 중생을 깨달음에 이끌고자 하는 선의에서 비롯된 행위라 하더라도, 결국 불완전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성을 완전히 증득하지 못했더라도 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가르치는 것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 부분은 제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이해의 수준에서는 이렇게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깨달음을 가장하지 않는 한 설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달라이 라마 성하께서도 자주 “이 부분은 나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하께서는 가장 심오한 공성 관련 경전을 강의하실 때에도 어떤 구절에 이르면 “이 부분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여러 주석서의 해석을 제시 한 뒤 “그 설명은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현장에 있는 학식이 깊은 게셰나 켄포(겔룩파 이외의 전통에서 게셰에 해당하는 학위)들에게 의견을 구하십니다. 성하께서는 때로 직접 이름을 부르시며 질문하십니다. 그때가 아무리 수만 명이 모인 대중 법회라 하더라도, 그 학승은 반드시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하께서는 그들의 해석을 들으신 후 “그것은 이러한 이유로 옳지 않을 것 같습니다”라며 변론을 이어가십니다. 그 후 다른 학승의 견해를 다시 묻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논의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각 승원과 학파에서 사용하는 교재와 주석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구절이라도 학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성하께서 불성에 대해 설하실 때 이러한 토론이 실제로 벌어진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논의 주제는 “어떤 법이 어떤 유형의 불성에 포함되는가”, “어떤 용어가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부분이 매우 모호했기 때문에 성하와 여러 스승들이 길게 논의했지만 결국 명확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성하께서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결코 아는 척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하께서 다른 모든 부분을 설하실 때에는 진정으로 이해하고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성하께서 경전의 구결이나 구전을 전하실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독송하십니다. 그렇게 빠르게 읽어 내려가시다가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나오면 즉시 멈추어 그 뜻을 주위의 학승들에게 물으십니다. 놀랍게도, 그 빠른 독송 속도에도 학승들은 정확히 어느 구절을 읽고 계신지 파악하고 즉시 답변을 올립니다. 이것은 성하께서 단순히 경문을 기계적으로 읽으시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이해와 함께 독송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모습은 정말로 감탄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킵니다. 

(16) 삼보로부터 도난당한 것을 받는 것 

열여섯 번째는 삼보로부터 도난당한 것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살계의 근본 계율 중 하나인 부처님, 법, 승가, 즉 삼보께 공양된 것을 훔치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훔치게 하는 행위를 하지 말하야 한다는 서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직접 훔치는 것이 아니라, 훔쳐진 삼보의 재물을 선물, 보시, 보수, 급여 등의 형태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직접 받든,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받든 모두 동일한 잘못이 됩니다. 이 경우, 그 대상은 앞선 근본 계율에서와 달리 네 명 이상의 승가 구성원에게 속한 재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즉, 여기서는 그것이 단 한 명, 두 명, 혹은 세 명의 비구나 비구니에게 속한 것이라도 포함됩니다. 

이 계율에 대해 우리가 그것이 삼보로부터 도둑질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아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된다면 반드시 반환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삼보로부터 훔치지 않는 것을 이렇게도 강조하는지 궁금하실 수 있지만 생각해 보면 돈이나 법을 널리 알리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 - 예를 들어 경전 인쇄, 번역, 사찰 불상 제작, 비구와 비구니의 식사 제공 -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보살행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이들이 깨달음을 얻는 기회를 빼앗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17) 부당한 기준을 세우는 것

열일곱 번째는 부당한 정책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특정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수행자가 매우 진지한 수행을 하는 경우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거나, 화가 나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거나, 덜 진지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대우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불교 센터에서 명상 수행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법당을 주로 사교 모임 장소로 생각한다고 합시다. 우리는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 있기 위해 센터에 갑니다. 누군가 센터에 기부를 했을 때, 그 기부금을 명상 수행 시설을 짓는 데 쓰지 않고 다과실이나 커피 라운지를 만들어 사람들이 법문 후에 휴식하고 사교 활동을 하도록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당한 기준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진지한 학생들과 수행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돕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수행에 전혀 열심이지 않은 사람들을 돕고 진지한 수행자를 도외시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들은 단지 사교 목적이나 편안한 이유로 법을 찾는 것일 뿐, 해탈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우리가 진지한 학생들을 싫어하거나, 그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화가 나는 이유는 그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가 수행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편안하고 친근한 학생들에게 더 애착을 갖고, 그들과 차나 커피를 마시며 함께 있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진지한 수행자들을 돕는 데 쓰여야 할 노력을 그들에게 쓰지 않고 다소 덜 진지한 사람들에게 쓰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승원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부금을 방문객 숙소 건축에 더 많이 사용하고 교육 환경 개선에는 덜 사용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18) 보리심을 포기하는 것 

그렇다면 마지막 열여덟 번째 보리심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곧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두 가지 수준의 보리심을 다루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입니다. 원보리심, 즉 발원하는 상태는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깨달음을 이루고자 바라는 마음이며, 행보리심은 보살계를 받고 실제로 수행에 임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첫 번째, 즉 원보리심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포기한다면 자연스럽게 보살계를 지키고 수행하는 행위 역시 포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피해야 할 여러 보살계의 목록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규칙이 너무 많고 따르기 어렵다”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속에서 여러 규정을 지킬 수 있다는 분명한 예가 있습니다. 바로 자동차 운전입니다. 운전에는 지켜야 할 법규가 아주 많고, 실제 운전 기술 역시 매우 복잡합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도로교통법을 공부하고 시험에 합격해야 면허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 나라에서는 뇌물을 내고 면허를 얻는 경우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법규를 배우면, 운전할 때 빨간불에서 정지하고, 정지선에서 멈추고, 차선을 올바르게 변경하는 등 다양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키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합니다. 

제가 모스크바에서 심각한 교통체증을 겪으며 웃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흔히 보는 상황과 비슷했는데, 한 차선이 꽉 막혀 움직이지 않을 때 일부 차량이 반대 방향 차선으로 넘어가서 이동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은 도로 규칙을 따릅니다. 제가 멕시코를 자주 방문하는데 그곳에는 ‘빨간불은 단지 권고일 뿐’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 보살계가 있다고 해서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들은 매우 유익합니다. 적어도 겔룩 전통에서는 고급 금강승 계위를 받으면 “육회요가” 수행의 일환으로 하루에 여섯 번 이 계들을 낭송하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계를 상기하게 돕습니다. 물론 너무 빨리 외우면 모르고 중얼중얼 거리게 될 수 있지만, 실제로 티베트 수행자들은 반복하여 기억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아직 암송하지 못했다면 반복해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이제 이러한 계를 약화시키거나 잃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기 전에 계 자체에 대해 질문이 있으십니까? 

한 사람이 삼보로부터 돈을 훔쳤다가 그 돈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가 정확히 훔친 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특히 현금이 아니라 은행 계좌를 통해 이루어진 지불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실 정확히 같은 돈인지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훔친 돈 이외에도 자신의 돈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경전에서는 그것이 도난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는지 여부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물리적 물건인 경우에는 훨씬 명확합니다. 예를 들어, 도난당한 불상이나 탕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티베트 사원에서 그림과 불상을 훔쳐 홍콩 등지의 서양인에게 판매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물건이 사원에서 훔친 것임을 안다면 그것을 사는 순간 계를 깨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장에 나와 있는 오래된 탕카 등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압수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확실히 사원히 판매했을리는 없습니다. 

물론 탕카나 불상을 선물로 주는 사원이나 스승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엇이 사원의 소유이고, 무엇이 개인 소유인지를 매우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티베트의 린포체 - 이를 티베트어로 ‘랍랑’이라고 부릅니다 - 에 공양금을 드릴 때에는 그 공양이 가정 전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 가정의 특정 인물을 위한 개인적 공양인지 매우 정확히 해야 합니다. ‘랍랑’이란 한 가정을 의미합니다. 즉 린포체의 집과 그 안에 함께 거주하며 시봉하거나 공부하는 제자들, 수행자들 모두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 가정은 재가자와는 다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돈을 린포체의 랍랑 전체를 위해 보시한다면 그것은 그 가정을 위한 공동 부엌 운영비나 건물의 보수, 개선과 같은 공용 목적에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린포체를 포함한 어떤 개인도 그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새 가사를 사는 데 쓸 수 없습니다. 혹은 랍랑에서는 그 공양금을 사용하여 공동으로 푸자(의식)를 주관하거나 불단에 공양을 올리는 등의 공용 수행을 후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랍랑에서는 재정 사용이 매우 엄격하게 관리됩니다. 

하지만 질문하신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누군가 삼보로부터 돈을 훔친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누군가 불교센터에 기부된 돈을 도둑질했다고 합시다. 문자 그대로 경전에서 말하는 대상은 승원으로서의 승가를 뜻하지, 일반적인 불교센터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서구의 상황을 보면, 승원보다는 법당 형태의 공동체가 많습니다. 그리고 서구에서는 ‘승가’라는 말을 티베트 전통 불교권에서의 의미와는 달리 재가 수행자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는 식으로 매우 느슨하게 사용하는데 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구적 상황에서 불교센터에 공양된 돈을 개인적 용도로 유용하는 것이 이 보살계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논서들에 따르면 ‘승가로부터 훔친다’는 것은 네 명 이상의 비구나 비구니에게 속한 재산을 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한 명, 두 명, 세 명의 비구, 비구니에게서 훔치는 경우에는 별도의 계율이 존재합니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계율이 제정될 당시에는 재가 불교센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불교센터에 공양된 돈을 도둑질하는 행위가 보살계 위반으로 직접 규정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히 피해야 할 행위입니다. 

서구에서 더 흔한 예는 누군가 불교센터에 공양금을 보시하는 경우인데, 그 돈을 회계 담당자나 재정 관리자가 개인 은행 계좌에 넣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돈으로 실제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급여를 지급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그 돈이 다른 여러 돈들과 함께 개인의 은행 계좌에 들어가게 되고, 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선물을 주거나 돈을 주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때 그 사람이 “내가 훔친 돈을 너에게 주고 있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이제는 그것을 자기 돈의 일부로 간주하여 구분하지 않는지는 판단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우리가 도둑질하거나 법당, 승원, 혹은 어떤 법 관련 기관의 자금을 유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어떠한 것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어떤 불상이나 탕카를 훔친 뒤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그 돈으로 무엇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같은 경우입니까?

네, 확장해서 보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불상을 훔쳤는데 그것을 참회하거나 후회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이제 그 불상을 가지고 있고 싶지 않게 됐다면,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어떤 센터에 가져가야 할까요?

이론적으로는 그 사람이 그것을 훔친 원래의 곳으로 돌려주는 것이 옳습니다. 삼보로부터 훔친 것에 대해서는 “이게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 완전히 성립되어야 ‘도둑질’이 완성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후회하고 더 이상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당연히 가능한 한 그것을 돌려주려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기회가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그것을 훔쳤다가 고국으로 돌아와 여러 해가 지난 경우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동기입니다. 첫 번째는 처음부터 남에게 주기 위해 훔친 경우, 두 번째는 자신이 변해서 그것을 후회하고 돌려주려는 경우입니다. 동기가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동기는 분명 다릅니다. 말씀하신 상황에서, 예를 들어 집에 탕카나 불상이 있는데 수년 후 그것이 문화혁명 때 사찰에서 도난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제 그 사찰에 돌려줄 방법이 없고, 아마 그 사찰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 불상이나 탕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진다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도 어떤 법당이나 불교 센터에 그것을 공양물로 바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팔아서는 안 되고 그 경위를 솔직히 설명해야 합니다. 혹은 사찰에 공양하되 그 사정을 명확히 알리는 것, 다시 말해 삼보께 돌려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제 어떤 상황에서는 사찰이 매우 가난하여 그들이 보물들을 미술상에게 팔고, 미술상은 그것으로 이익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윤리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도둑질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과도한 이득을 취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해 그것이 법보이든 아니든 그것은 탐욕으로 행하는 것이며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율장이나 이런 문제들을 마치 변호사처럼 접근하여 수많은 세세한 예외 조항들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학자들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불교 윤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설명했듯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분별지를 개발하여 상황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경우 무엇이 가장 적절한 행위일까?”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집에 있는 물건이 사찰에서 도난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계율 위반의 무거움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계들은 아주 미세한 형상, 즉 비표현색으로서 마음의 연속체에 존재하여 우리의 행위를 조형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계로부터 성숙하는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세한 형상의 강도는 완전히 온전하고 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 계를 받을 때의 발심의 강도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계를 받을 때, 단지 친구들이 받기 때문에 “내가 빠질 수는 없다”는 정도로 동참한다면, 그 계의 힘은 분명 약할 것입니다. 반면 진정한 출리심이나 보리심으로 계를 받는다면 그 힘은 훨씬 강해집니다. 그래서 일상 수행에서 보살계를 매일 갱신하고 강화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동기를 재확인하여 계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계를 범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계를 완전히 잃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계의 힘이 약화될 뿐입니다. 계를 완전히 잃으려면 단순히 “나는 이제 이 계를 버리겠다”라고 말하는 것 이외에도 아주 구체적인 조건들이 모두 갖추어져야 합니다.

우선, 여러 경전에는 계를 범하게 되는 요인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무지) 입니다. 즉, 그 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무관심 입니다. “내 행동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 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번뇌에 압도되어, 분노나 욕망에 사로잡혀 계를 잊고 범하는 경우입니다. 넷째는 존경심 결여입니다. 계나 계를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망각입니다. 계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섯 째는 약한 정념으로 인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주의력이 부족한 경우입니다. 

이 열여덟 가지 보살계 가운데 “왜곡되고 적대적인 관점을 갖는 것”과 “보리심을 포기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계를 완전히 잃기 위해서는 네 가지 결합 요인이 모두 갖추어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모든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보살행 따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라고 생각하고 보살행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과 논쟁하려는 왜곡되고 적대적인 관점을 지닌다면, 그 순간 바로 보살계를 잃게 됩니다. 또한 원보리심을 포기하는 즉시 그 계는 단절됩니다. 

그 외의 열여섯 가지 계에 대해서는 이 네 가지 결합 요인이 반드시 계율을 범하려는 동기를 일으킨 직후부터, 계율 위반 행위를 완전히 마친 직후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즉, 중간에 우리가 “이건 잘못된 행동이구나.”라고 후회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범계가 아닙니다. 계를 완전히 잃으려면 이 네 가지 요인이 행위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결합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자신의 행위를 해로운 것으로 보지 않음. 즉,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이로움을 보며 후회 없이 그 행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전에 그와 같은 계를 범한 적이 있고 지금이나 미래에도 그것을 멈출 의사나 의지가 없음. 다시 말해, “앞으로도 나는 이것을 계속하겠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입니다. 셋째, 그 행위 자체를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수행함. 즉, 계를 범하면서도 그것을 즐기고, 자신이 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넷째, 도덕적 자존심이나 체면심을 전혀 느끼지 않음. 즉,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고, “이 행위가 나의 스승이나 불교,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상태입니다. 또한 이 네 번째 요인에는 "자신의 잘못을 상쇄하거나 보완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도 포함됩니다. 이 네 가지 마음가짐이 모두 구비되었을 때 우리는 보살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만 갖추어져 있다면 그 계는 단지 약화될 뿐이며, 약화의 정도는 그 요인들이 얼마나 갖추어졌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불교 서적을 빌려 달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집착하거나 인색함 때문에 빌려주지 않는다고 합시다. 우리는 “상대가 책에 커피를 쏟을 수도 있고, 돌려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 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기며 그것이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한 번도 법서를 빌려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의도가 없습니다. 거절하면서도 마음이 즐겁습니다. 우리는 보살로서 모든 중생을 꺠달음으로 이끌어야 함을 알고 있지만, “법서를 나누지 않는 것이 부끄럽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이런 행위가 스승이나 불교의 명예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이 이기적인 행동을 보완할 의도도 없습니다. (이 네 번째 요인에 포함되는 부분입니다.) 이 모든 태도가 완전히 구비된 상태에서 우리가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그 순간 우리는 보살계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만 결여되어 있다면 그만큼 계는 약화될 뿐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어떤 계를 범했지만, 위의 네 가지 결합 요인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이 경우에는 실제로 계의 힘이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우리에게 법서나 노트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우리는 빌려주지 않았다고 합시다. 표면적으로는 ‘법을 나누지 않은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는 정책적 의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절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나 스승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신경을 씁니다. 게다가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책을 직접 사용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가 있는 경우, 즉 불경 번역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며칠만 사전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 사전을 번역에 계속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인색함이 아닙니다. 혹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로 약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동기는 집착이나 인색함이 아니며 우리는 그것을 보완하려고 노력합니다. 즉, “지금은 빌려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제가 번역을 마치는 대로 꼭 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사과하고 이유를 설명하며, 대신 “필요하시면 제 노트를 함께 보시거나, 책의 내용을 설명해 드리거나, 제가 사용하지 않을 때 집에서 보실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라고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표면적으로는 계를 범한 듯 보여도 우리는 보살계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의 강도, 즉 그 계의 힘이 얼마나 유지되고, 얼마나 약화되는가는, 이 네 가지 요인이 어떤 조합으로 존재하는가에 따라 세세히 달라집니다. 그 모든 세부 사항을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계율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점, 즉 우리가 어떤 악업을 범했더라도 그 업력의 세기를 가능한 한 약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나쁜 결과가 너무 무겁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업의 과보의 강도는 이 네 가지 요인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요인들에도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그 행위에 수반된 번뇌의 강도, 그 행위를 얼마나 자주 반복하는가, 그리고 행위의 대상과 행위자의 영적 지위도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법서를 빌려주지 않았을 때 만약 그 사람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그 책이 필요한 법사라면, 단순히 호기심으로 책을 보고 싶어 하는 일반인에게 빌려주지 않는 경우보다 훨씬 더 무거운 업이 됩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지위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나는 이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계율을 이미 수지한 자인가, 아니면 아직 계를 받지 않은자인가에 따라 그 무게는 다릅니다. 그래서 “계율을 지킬 능력이 없다면 그 계를 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계의 경우 우리는 지킬 수 있는 만큼만 선택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술을 전혀 끊을 수 없다면 음주 금지 계를 받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부적절한 성행위를 피할 수 없다면 그 계도 받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이처럼 업의 결과를 강하게 만드는 여러 요인들은 업론에 매우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율을 범했을 때 생기는 부정적 업력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는 것을 항상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네 가지 결합 요인의 반대되는 네 가지 수행을 실천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즉, “이건 아무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이것이 잘못이었다 혹은 실수였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행위를 후회해야 합니다. 여기서 후회란 죄책감을 느낀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이걸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혹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책을 빌려드리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습니다.”라는 식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겠다”는 대신, “이런 범계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세웁니다. 또한 “도덕적 자존심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염려가 없는 상태”의 반대는 바로 우리의 정신적 기반인 안전한 귀의처와 보리심을 다시 확립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 우리는 “나의 미래와 나의 경험에 대해 신경 쓰며, 나의 스승들과 그분들의 명예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귀의와 보리심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겠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을 의도조차 없음”의 반대는, 보완행(對治行) 또는 참회행(對治力)을 취해 자신이 범한 허물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표준적인 네 가지 대치력을, 앞서 언급한 네 가지 결합 요인의 반대 방향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상이 바로 보살계에 관한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보살계를 수지하려면 올바른 동기와 적절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스스로 혹은 지도 스승과 함께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그 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 계율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매일 상기하지 않더라도 때때로 목록을 읽어보며 근본 계율과 부차 계율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우리가 계를 범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네 가지 결합 요인이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즉, 범계를 가능한 한 약하게 만들고, 이후에 다시 계의 힘을 강화하도록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으십니까?

저작권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불교 서적에는 저작권이 있으므로 출판물로 복제할 수 없는데, 개인적 용도로 복사하는 것도 삼보에게서 훔치는 행위로 간주됩니까? 그리고 인터넷 웹사이트나 자료를 판매하는 것은 어떤가요?

이에 대해선 법률가에게 자문해야 할 문제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인터넷상의 자료는 기본적으로 공개 영역에 속하므로 누구든지 복사하거나 붙여넣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정하고, 그 자료를 보려면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시한 경우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그 자료를 취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물론 그러한 제한을 우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자료의 제공자가 분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알렸음에도 그것을 무단으로 얻는다면 그것은 법을 훔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저작권이 있는 서적의 경우 이것은 전적으로 법적 문제에 해당합니다. 현재 구글이 모든 서적을 온라인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려는 계획을 두고 큰 법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유료로 하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절판된 책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여전히 출판사나 저자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법적 논의가 많으며, 구글은 저자들에게 일정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제 법을 통해 돈을 벌거나 이익을 취득하는 문제는 또 다른 윤리적 쟁점이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히 논의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샨티데바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인이 올바르게 일을 한다면 그 하인에게 필요한 만큼의 보수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인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 하인에게 보수를 주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이것은 분명한 비유로, 우리에게 고용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 비유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살로서 자신을 모든 중생을 섬기는 하인으로 바치기로 결심하여 평생을 불교 서적을 번역하거나 널리 전파하는 일에 헌신한다고 합시다. 실제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즉 “일을 하는 하인”이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즉, “하인에게 급여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단지 부를 축적하려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교 서적을 판매하여 얻은 수익으로 번역자, 편집자, 저자 등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수를 주지 않고, 단지 책을 무단으로 복제하거나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책을 스캔하거나 도서관에서 복사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대학 도서관에는 학생들을 위한 복사기가 비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책 전체를 복사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복사하는 것이 허용될까요? 이 문제는 결국 법률적 논쟁으로 흘러갑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동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책을 살 돈이 충분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출판사를 속이거나 “내가 얼마나 영리한가”를 과시하기 위해, 혹은 단순히 인색함 때문에 복사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반면에, 진지한 수행자로서 그 책의 내용이 수행에 꼭 필요하지만, 정말로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서 구입할 수 없는 경우라면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릅니다. 따라서 저는 모든 것이 동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계를 범하는 행위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핵심은 그러부터 생길 수 있는 부정적 업의 힘을 가능한 한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윤리적 자제의 수행은 분별지와 동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요인들과 매우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법을 지켜라, 복종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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