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심을 일으켜 수행에 옮기다

사랑

사랑이란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복잡한 상황, 통제되지 않는 순환, 많은 문제들로 가득하여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따라서 타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태를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면서, 먼저 자기 자신, 그 다음에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계속 수행을 해가며 우리의 친구, 적,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중생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사랑의 명상을 합니다. 

신심

또한 보편적인 책임감을 길러야 합니다. 이런 감정을 불러 일으킬 때, ‘나는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처한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소위 신심(信心)이라고 불리는 확고한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신심에 의지하여 자신이 몸소 실천하는 것입니다.   

보리심(菩提心)

설령 우리가 신심을 가지고 ‘나는 모든 중생에게 행복을 주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면 실제로 그것을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청정한 마음으로 완전히 진보하여 자신의 원만한 잠재력에 도달한 인물인 부처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중한 인간의 생을 가지고 있는 기반 위에서 실제로 완성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원만한 깨달음에 이른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온전히 타인에게 바쳐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여 중생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의 동기를 일으키는 것(원행, 願行)을 보리심을 위한 발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깨달음에 이르려는 이 마음의 동기를 키우면 큰 이익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보리심 개발의 이점 

한순간이라도 원행을 일으키는 것은 보석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처에게 공양할 때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꽃 한 송이를 공양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에 의해 구축된 선업(善業)은 우리의 목표에 비례합니다. 그 목표의 범위는 모든 중생입니다. 

보리심의 목표를 재확인하다

아침에 일어나 한밤중에 죽지 않고 깨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느끼고, 하루 종일 자기 자신과 마음을 바쳐 ‘내가 어떤 적극적인 선행을 행하든 이것을 중생의 이익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적극적인 행동과 건설적인 행동은 모두 아침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마음의 동기에 의해 스며들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소망을 동기부여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 자신의 행동을 재검토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루 동안 매우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행동했다면 그것에 대해 매우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이것에 의해 축적된 잠재력을 깨달음을 얻는 것과 모든 중생을 돕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 때 똑같이 강한 의도를 설정해야 합니다. 즉, ‘나는 내일도 긍정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나는 깨달음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분발할 것이다.’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잠에 든다면, 이 긍정적인 에너지 또한 자는 동안 스며들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이로울 것입니다. 

우리가 뿌리로서 축적한 모든 선한 잠재력과 행동을 깨달음의 성취에 투자한다면, 그 잠재력은 진정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것은 원하는 목표, 즉 중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깨달음의 성취에 도달할 때까지 고갈되지 않고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원대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리심의 두 단계

보리심에 힘쓰는 것은 사실 두 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부처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여 중생을 도울 수 있기를 바라거나 열망하는 것은 원보리심(願菩提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보리심(行菩提心)입니다.

행보리심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단지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 보살의 모든 수행을 하는 것으로 그 경지에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수행에 몰입되어 있고, 이런 수행은 중생들에게 이익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 열반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과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네 가지 수행으로 간략하게 분류됩니다. 

이 두 가지 보리심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도를 가고 싶지만 마음속으로만 열망한다면 이것은 바로 원보리심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단지 인도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그곳에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비자를 받고, 항공권을 구매하고, 예약을 하는 등 스스로 이런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행보리심과 유사합니다. 

보시

이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훈련시키려면 무엇보다 베푸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보시(布施) 또는 베푸는 태도란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우리가 현생에서 누린 모든 것들, 가진 모든 소유물 등은 전생에 우리가 수행한 보시의 결과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많은 대상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에게 공양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병든 사람, 빈곤한 사람에게 시주할 수 있습니다. 또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부처는 전생에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암컷 사자와 그 새끼에게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굶주린 암컷을 먹였다고 합니다. 몸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부처는 호랑이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치는 보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명한 전기입니다. 

지계

육바라밀의 두 번째 항목은 도덕적 계율을 엄수하는 수행인 지계(持戒)입니다. 예를 들어, 살생하지 않고, 다른 유정들을 해치지 않고, 십악(十惡, 열 가지 죄악)을 삼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런 도덕적 계율이 없다면, 인간이나 신으로 환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환생을 하기를 원한다면 계율을 지니고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시를 수행하지만 지계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환생하지 않고 많은 것을 소유한 짐승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시에 의해 물질적 풍요를 가졌지만 지계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사람으로 환생하지 못하고 축생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들을 비축한 축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욕

육바라밀의 세번째 항목은 관용과 인내를 유익한 마음의 습관으로 만드는 수행인 인욕(忍辱)입니다. 관용과 인내가 없으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우리가 쌓아온 긍정적인 잠재력과 에너지를 완전히 파괴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것을 축적해 왔지만 분노는 그것을 완전히 파괴합니다. 예를 들어, 현상 필름을 공항의 엑스레이 기계를 통해 비추면 필름의 내용물은 모두 지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화가 났을 때 바로 마음을 진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화를 내면 생기는 모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정을 잃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생에 쌓인 습성과 본능으로 늘 불행하다고 느끼고 자제력을 쉽게 잃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늘 화를 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특정한 사람들과 마주치거나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화가 난다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곳을 떠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짜증의 근원을 완전히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화나게 하는 대상을 접하지 않는 것이 화를 내는 성질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화가 난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배우지만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배운 것을 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분노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분노를 극복하여 화가 나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고 존중하며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절대 자제력을 잃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항상 화를 낸다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코는 우스꽝스럽게 생겼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바로 화를 낼 것입니다.  

화를 내면 다른 사람과 조화나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고, 하고 싶은 어떤 일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계속 화를 낸다면 불가능합니다. 타인과 조화롭게 지낼 수 있다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쉽게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진

육바라밀의 네번째 항목은 선법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정진(精進)입니다. 이는 긍정적으로 일할 때 넘쳐나는 끈기, 열정 및 행복의 감정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평범하고 세속적인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면 이것은 정진이 아닙니다. 영적인 수행과 훈련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정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진의 반대는 나태함입니다. 나태함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나태함은 무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살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은 모든 놀라운 선행을 보고 ‘나는 절대 저런 일을 할 수 없다.’라고 무능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나태함입니다. 자신을 수행하고 훈련하면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나태함은 낙담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일을 시작하여 몇 주 혹은 몇달 동안 광적으로 일을 하다가 하던 일을 끝내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태함의 한 형태인데, 중요한 것은 이런 태도를 갖지 말고 꾸준하게 정진하여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형태의 나태함은 항상 하는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입니다. 우리는 ‘내일이나 모레 다시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계속 해야하는 일을 미룹니다. 이것은 매우 나쁜 마음가짐 입니다. 사람이 게으르면 좋은 자질을 기르거나, 배우거나, 개선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게으름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게으름으로 인해 평생을 낭비하게 하기 때문에 매우 부정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정진의 수행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진 돔퇸빠(Dromtonpa)라는 위대한 승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사인 세톤빠(Setonpa)를 정성껏 섬겼습니다. 돔퇸빠의 수행은 앉아서 상사의 가죽을 두 발로 부드럽게 하고, 두 손으로 우유를 휘젓고 좌우로 흔들며 요거트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자신의 책을 곁에 두고 열정과 끈기로 공부했습니다. 그는 가죽을 밟으며 부드럽게 했는데, 이는 모두 동물의 표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면을 위아래로 밟아야 합니다. 또한 그는 손으로 우유를 계속 젓고 등에 짊어지고 흔들면서 요거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띠샤 존자가 티베트에 와서 돔퇸빠를 만나 과거에 한 일을 묻자 그는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띠샤 존자는 “네가 하는 모든 영적 수행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은 네가 상사를 섬기는 이러한 행동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매우 유능한 사람이라면 세속적인 일과 영적 수행을 함께 할 수 있지만,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처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다양한 영적 가르침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이것은 저를 매우 행복하게 합니다. 

선정

육바라밀의 다섯 번째 수행은 선정(禪定), 즉 마음의 굳건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중력과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개발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집중된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선택한 대상이 어떤 것이든 한곳에 마음을 두고 집중해야 합니다. 수행을 위한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하고, 그 대상을 바꾸지 말고 마음을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수행이 올바르다면 우리는 6개월 안에 완전히 집중되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인 사마타(지, 止)를 얻을 수 있습니다.   

명상을 시작하거나 집중력을 배워 유익한 습관을 기르려 할 때는 매우 짧지만 반복적인 수행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약 18번의 짧은 연습은 수행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본존의 진언을 염송하는 수행을 하고 그들을 관상하여 자신을 본존으로 일으키려고 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집중력이 없습니다. 앉아서 옴 마니 반메 훔(OM MANI PADME HUM)의 진언을 암송하려 할 때,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은 산란하여 도저히 집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일을 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업무와 관련된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잠깐만요, 제가 진언을 외우면 기억이 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명상을 할 때 굳건한 신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는 동안 마음이 산란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우리는 이 수행으로부터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을 기른다면 어떤 긍정적인 것에 에너지를 쏟고 싶든 간에 즉시 그 긍정적인 목표에 마음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조용하고 안정된 마음을 기를 수 있다면, 한층 더 예민한 감각을 발달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어떤 감각 능력도 얻을 수 없습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을 기르는 것은 멋진 비행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긍정적인 일을 하고 싶든 간에 즉시 강력한 힘과 에너지로 그곳에 도달할 것이고, 마음을 두는 어디든지 비행기는 그곳에 머물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 상태를 가졌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극도로 분석적인 마음인 위파사나(관, 觀)를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안정적이고 통찰력이 있어야만 현실을 편견없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

분별력을 기르는 것은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현실, 공성, 환상이 투영된 모든 존재의 공한 본질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바라밀의 마지막 항목인 지혜(智慧) 혹은 반야(般若)입니다. 지혜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진정한 자아의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진술을 할 때, 우리는 허상의 자아, 즉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변하지 않는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변하지 않고 항상 독자적으로 존속하는 실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두 종류의 ‘나’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 또는 ‘자아’로 나타나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와 환상이 투영된 반박되어야 할 ‘자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문제에 직면할 것입니다. 

세속적인 의미의 ‘나’는 먹고, 걷고, 부정적인 행동을 하여 이로 인해 문제들을 겪습니다. 또한 ‘나’는 긍정적인 행동을 하고, 행복을 느끼는 등 다양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의 ‘나’입니다. 하지만 고유한 실체로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환상이 투영된 ‘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아는 우리의 심리적 기제들과 요소들 때문에 존재한다고 여겨질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과 분리되어 있고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환영이며 반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결코 세속적인 의미의 ‘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걷고 일하는 ‘나’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이 생의 소중한 인간의 몸을 바탕으로 우리는 이러한 지혜를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통해 소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보리심을 발전시키고 온 마음을 다해 중생을 위해 봉사하고,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소중한 우리의 몸을 바탕으로 우리가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지혜를 갖추면 공성을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창조한 ‘자아’의 실체가 ‘무아(無我)’인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 후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제거하고 어떠한 어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우리는 모든 중생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히 청정한 마음의 상태를 얻는데 힘쓰며,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원만한 진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결국 부처의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귀중한 인간의 생명을 가진 우리는 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마지막 조언

단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삶을 살아간다면 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지 않고 언제나 불만족스러워 할 것입니다.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고,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는 마음의 상태를 개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세상의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원할 것입니다. 

매우 좋아하는 아주 맛있는 음식이 있지만 적당한 것을 모른다면 구역질이 날 때까지 절제 없이 계속 먹게 될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가지고, 만족을 느끼고, 적당한 것을 알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도울 생각을 가지며, 절대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을  유지하고, ‘옴 마니 반메 훔’을 암송해야 합니다. 이렇게 수행한다면 우리의 삶을 매우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몰두하여 삶을 낭비하지 말고 더 큰 일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내생에 이익을 가져오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진정한 수행의 요점은 항상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기쁨을 느끼고 항상 친절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상처주거나 해하려는 감정이나 생각을 절대 가져서는 안됩니다. 모든 해로운 생각을 끊고 선심을 배양하여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요점입니다.

만약 우리가 중생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스스로도 가장 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좋은 자질을 개발하고 좋은 교육을 받는다면, 우리는 좋은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직책을 맡게 되면 매우 효과적으로 중생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이 원만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리심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노력을 우리의 기본 수행으로 삼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소망을 유지하고, 모든 중생에게 마음을 바치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중생들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사랑이나 보리심에 관한 조언을 들을 때는 개인적인 충고로 받아들이고 바로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중에 할 수행이라고 생각하거나 달성하기에 너무 심오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우리는 바로 알파벳을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A’로 시작해서 그 다음부터 조금씩 발전해 나갑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중생을 돕고 자신의 원만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타인을 위해 바친다면, 유익한 정신적 습관이 형성되고, 타인을 위한 수행은 자연스럽게 우리 내부에서 안정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수행을 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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